66. 북문(北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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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숙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4월 21일 (일) 17:1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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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북문(北門) 鎭松門下久徘徊 진송루 성문 아래서 한참을 머물러 보니, 山自高麗屈曲來 산은 고려산에서 굽이쳐 흘러왔고, 眼下一千茅瓦屋 눈 아래는 일천 채의 초가집과 기와집, 烟火影裡半塵埃 연기 그림자 속에 절반이 티끌이네. 부내면(府內面) 97 ○ 강화부의 북산(北山)을 송악(松嶽)이라 하고 북문으로 진송문 (鎭松門)이라고 하였다. ○ 정조 계묘년(1783)에 유수(留守) 김노진168)이 다음과 같은 기문 을 지었다. “강화도는 산을 빙 둘러 성을 쌓은 것이, 또한 10 리이다. 무릇 4문을 설치하였는데 동문 서문 남문에는 모두 누각이 있으나 유독 북문만 누각이 없으니 어찌 북쪽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겠는가. 대개 미처 누각을 쌓을 겨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절도사직을 제 수 받고 송정에서 전함을 사열하였는데, 길이 이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벗겨진 첩과 짧은 구릉이 어슴프리 쑥대밭 사이로 보였다. 이어 좌 우에 있는 수행원에게 ʻ아, 이와 같은데 방어를 보장할 수 있겠는가.ʼ 라고 말하였다. 이 문은 송악을 근거지로 삼으면서 송악과 대치하고 있으니 옛 서울과 접하는 것이다. 송정에 임하여 굽어 살펴보니 전 함이 정박해 있는 모습이 마치 사람들이 담장 밖에서 지나가는데 그 (지나가는 사람들의) 상투가 보이는 것과 같다. 돈대와 섬들이 멀리 희미하게 보이고, 날개 모양으로 숲 사이로 드러난 것이 연미정이다. 호서와 영서의 조운선이 경유하는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짝 지어 경 작하는 볼만 하다. 갓옷을 입고 허리띠를 두르고 있으니 편안한 날 로 교화할 수 있고, 빗장을 단단히 잠가서 폭도를 막을 수 있으니 이 가운데 한 가지만 해당되어도 누각이 없을 수가 없다. 하물며 두 가지를 다 갖추고 있는데 누각이 없어서 되겠는가. 이에 누각을 지 어 앞선 사람들이 남긴 나머지를 대신하면 좋지 않겠는가.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ʻ좋다ʼ라고 하였다. 돌을 캐고 재화를 모아서 축조를 시작하니 얼마 안 되어 완성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이 168) 김노진(1735∼1788) 본관은 강릉. 자는 성첨(聖瞻). 강화유수·형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편서로 ≪강화부지 江華府志≫가 있다. 98 譯註 沁都紀行 에 누각에 편액을 달아 ʻ진송ʼ이라 이름을 명명하고 그 대략을 이와 같이 기록한다. 계묘년(1783) 초여름 하순에 유수 김노진(金魯鎭)은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