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설 부용산 (김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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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tor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8년 4월 12일 (목) 00:4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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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에세이, 한국일보 1998. 2. 14.

定說‘부용산’

호남인의 애창곡 「부용산」의 내력이 소개되자(2월14일자 본란) 여러 애창자들의 호응이 있었다. 정곡(定曲)없이 입에서 입으로 흘러다니던 노래의 악보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노래가 50년동안 초야에서 굴러다니면서도 시들지 않고 널리 확산되어 있다는데 놀랐다. 인기 TV드라마였던 「목욕탕집 남자들」에서 양희경이 이 노래를 부르더라는 제보도 있었다.이런 반응속에 커다란 볼멘소리가 섞여나왔다.

「부용산」이 목포의 노래로 주장된데 대해 전남 보성군 벌교읍 쪽에서 이것은 벌교의 노래라고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작사자 박기동(朴璣東)씨가 벌교사람인데다 부용산은 벌교에 실재하는 산이고 노래의 주인공은 작사자의 목포 항도여중 제자가 아니라 벌교의 친누이동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벌교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이 곡을 고향의 노래처럼 합창한다고 했다.

「부용산」이 벌교의 노래라는 뒷받침으로는 광주에서 발행되는 「예향」이라는 월간지가 94년에 쓴 기사가 있다고 한 독자가 알려주었다. 그 잡지를 구해보니 현재 전남 순천의 금둔사 주지로 있는 지허(知虛) 스님의 증언을 빌려 「부용산」은 작사자가 16세때 죽은 그의 누이동생을 벌교의 부용산에 묻고 돌아오면서 가사를 지은 제망매가(祭亡妹歌)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지허스님의 전언은 출처가 불분명하다.

「부용산」의 본향을 다시 찾아나설 수밖에 없다.

5년전 호주로 이민가서 시드니에 살고 있는 박기동씨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올해 81세인 그의 육성증언의 내용은 이러하다.

박씨는 전남 여수의 돌산이 고향이다. 일본의 간사이(關西)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1943년 귀국해 벌교의 남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해방이 된 이듬해 벌교상업중학교로 옮겨 국어와 영어를 가르쳤다. 이무렵 아버지가 벌교로 이사와 있었다. 1947년 박교사는 새로 설립된 순천사범학교로 전근했다. 이 해에 큰 누이동생인 박영애가 순천도립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죽었다.

누이동생은 심성이 곱고 얼굴도 예뻐 천사같다고 소문나 있었다. 1941년 18세때 벌교로 시집을 갔고 죽은 것은 24세때였다. 30세이던 박교사는 벌교의 부용산에 누이동생을 장사지내고 돌아와 순천에서 「부용산」이란 시를 썼다.

이듬해인 1948년 박교사는 목포의 항도여중으로 초빙되어 갔다. 여기서 안성현(安聖絃) 음악교사를 처음 만났다. 안교사는 극단적인 낭만주의자였다. 이때 항도여중 3학년에 김정희라는 학생이 경성사범에서 전학해 와 있었다. 특히 문예방면에 소질이 뛰어난 천재소녀였다. 조희관 교장 말이 이 학생에게 국어를 가르칠 선생이 없어서 박교사를 모셔왔노라고 했다. 이해에 이 아까운 소녀가 폐결핵으로 죽었다. 박교사는 장지까지 따라갔다.

얼마 뒤 서랍속에 넣어둔 박교사의 시작(詩作)노트를 안교사가 몰래 가지고 가서 곡을 하나 붙여왔다. 그것이 「부용산」이었다. 박교사는 맨 끝구절인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를 상여 나가는 소리로 만들자고 조언했다.

「부용산」은 노래를 잘하던 배금순이라는 상급반 학생이 맨처음 불렀고 금방 전남일대로 유행해 나갔다. 나중에는 전혀 사상성이 없는 노래이면서도 지리산 빨치산들의 개창곡이 되기까지 했다.

곡이 나오자 학생들이 수근거렸다. 『박선생님이 정희의 무덤에 가서 울었단다』하는 소문이 퍼졌다. 박교사는 그때 아직 총각이어서 여학생들한테 인기있는 선생이었다. 「부용산」의 주인공이 정희라는 설은 이래서 와전된 것일 것이다. 박씨의 카랑카랑한 전화 목소리는 여기서 끝난다.

작사자 본인의 토로이니 제망매가설을 정설로 굳힐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말의 의문은 남는다. 누이동생이 결혼까지 하고 24세에 죽었다면 <피어나지 못한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라는 구절은 어색하지 않은가. 박씨는 『시를 미처 다듬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예향」이란 잡지에는 항도여중때 김정희의 단짝친구로 「부용산」의 애제자곡(哀弟子曲)설을 내세운 경기대 김효자교수의 기고도 실려있다. 김교수는 이 글에서 박교사가 누이를 묻고 읊은 시가 「부용산」이라고 해명하는 것을 들은 적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부용산」은 우리에게 의당 사랑하는 친구 정희를 애도하는 노래였다. 부용산이 어디 있은들 무슨 상관이랴. 그것은 차마 일찍이 잃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운 사람이 묻힌 상징적인 산일 뿐이다』라고 썼다.

「부용산」은 「향수」의 가수 이동원이 곧 취입을 한다 하고 벌교에서는 노래비도 세울 것이라 한다. 「부용산」이 어디 것인들 무슨 상관이랴. 차마 잃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운 노래 하나를 만50년만에 살려 널리 불려지게 할 수 있다면 족할 뿐이다.

〈김성우, 한국일보 논설고문〉

출처: 定說‘부용산’(김성우 에세이), 한국일보 2018. 3.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