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산 오리길에 (김성우)
김성우 에세이, 한국일보 1998. 2. 14.
부용산 오리길에
사람들마다 입만 열면 IMF(국제통화기금)를 한숨짓는 우울한 세상에 잠시 노래나 한곡 부르며 시름을 달래자.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내가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것은 20년도 훨씬 전이다. 어느 자리에서 박성룡 시인이 불렀다. 내게는 전혀 생소한 노래였다. 애상의 곡조가 가슴에 짜르르했다. 박시인은 이 노래의 작사·작곡자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했다. 그 뒤로 나는 이 노래를 잊고 있었다. 아무도 부르는 것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우연히 목포 출신의 배우 김성옥씨가 이 노래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뜻밖이었고 반가웠다. 노래의 출처를 물으니 역시 잘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자기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아는 사람이 없더라는 것이다. 그런채로 호남지방, 특히 전남지역에서 언제부터인가 오래전부터 악보도 없이 구전으로 불려온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20여년전 내게 이 노래를 처음 들려준 박시인도 전남 해남 출신이다
호남인이라야 아는 노래가 따로 있다니. 왜 이 아까운 곡조의 노래가 전국적으로 유행하지 않았을까. 이런 고운 노래를 왜 어느 가수도 취입하지 않았을까. 도대체 이 노래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목포에 낙향해 있는 김성옥씨에게 이 노래의 내력을 추적해 보도록 부탁했다. 얼마뒤 그가 황급히 상경했다. 서울에 사는 한 여성이 이 노래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 온 것이다. 경기대에서 일본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김효자 교수라고 했다.
그 김교수의 증언은 이러하다.
광복 직후 무렵이었다. 김교수가 재학하던 목포의 항도여중에 안성현이라는 작곡가가 음악교사로 부임했다. 당시 지방의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크게 활약했던 조희관 교장이 우수한 교사들을 모으면서 초빙해온 것이었다. 안교사는 교장집에 피아노를 갖다놓고 함께 기거했다. 그는 월북한 무용가 안막(최승희의 남편)의 조카였다.
김교수와 같은 반에 김정희라는 학생이 있었다. 광복직전에 서울의 경성사범에 합격한 천재소녀였다. 광복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와 항도여중에 전학해 있었다. 좋은 집안인데다 성적은 늘 수석이었고 아주 예쁘고 조숙했다. 책을 많이 읽었고 자작시가 문예지에 당선된 바도 있는 문학소녀이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던 이 스타소녀는 1948년 여중 3학년 때 그만 폐결핵으로 죽었다. 온 학교가 울었다. 시인이기도 했던 박기동이라는 국어 선생이 이 제자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가사를 썼고 안교사가 곡을 붙였다. 이래서 만들어진 것이 「부용산」이라는 노래다.
이 슬픈 노래는 상급생이던 배금순이라는 노래 잘하던 학생이 발표하면서 전교생이 부르기 시작했고 이윽고 교문 밖으로 퍼져나갔다.
작곡자 안성현 교사는 6·25 때 월북했다. 소문으로는 북한에서 국립교향악단 단장을 지냈다고도 한다. 「부용산」이 낮은 목소리로 입에서 입으로 불리면서 차츰 작곡자의 정체가 숨어버린 것은 이 때문이었다.
작사자 박기동 교사는 3년전까지 서울에 거주하다가 호주로 이민을 갔다.
김효자 교수는 그때 김정희와 그리고 임성순이라는 동학년생과 셋이서 아주 친한 단짝 친구였다. 임성순은 항도여중 6학년 때 역시 폐결핵으로 숨진 스승을 기려 「양귀비」라는 노래의 가사를 썼고 당시 음악선생이던 이동욱교사가 작곡하여 이 노래 또한 한때 널리 유행했다. 임성순씨는 그 뒤 영문학을 전공했고 현재 목포에 살고있다. 「부용산」의 주인공은 무덤이 목포에 남아 있다고 한다.
건국초기 사제간의 이런 끈끈한 정이 우리 교육의 시발점이었다.
김교수는 안성현 작곡집을 소장하고 있다. 여기 「부용산」이 수록되어 오랫동안 실종했던 악보가 재생하게 되었다. 악보를 찾았으면 곡도 사연도 아름다운 이 노래가 이제 호남만이 아닌 전국의 노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작곡집에는 명곡들이 많다고 한다. 김순남도 벌써 해금되었으니 안성현의 노래들이 어서 큰 목소리로 불렸으면 싶다.
〈김성우, 한국일보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