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서문안 당산
부안 서문안 당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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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번호 | 국가민속문화재 제18호 |
지정일 | 1970년 05월 20일 |
지정 명칭 | 부안 서문안 당산 (扶安 西門안 堂山) |
한자 명칭 | 扶安 西門안 堂山 |
영문 명칭 | |
분류 | 유적건조물/종교신앙/민간신앙/마을신앙 |
건립·제작 | 조선시대 |
주소 |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203번지 |
위도 | 35.730440 |
경도 | 126.731708 |
웹사이트 | http://www.buan.go.kr/tour/index.buan |
개관
당산은 민간신앙에서 신이 있다고 믿고 섬겨지는 대상물이다. 부안 서문안 당산은 높은 돌기둥과 돌장승이 각각 1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돌기둥은 마을 밖의 부정한 것에 대한 침입을 막고 마을의 평안함을 위해 세운 솟대의 일종이다. 이 돌기둥은 각각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으로, 할아버지 당산은 서문안 당산의 주신으로서 꼭대기에는 돌로 조각된 새가 얹혀 있다. 할머니 당산은 새를 따로 얹지 않고 돌기둥 윗부분에 새겨서 표현한 특징을 보인다.
돌장승 역시 남녀 한 쌍이다. 할아버지로 불리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은 탕건(모자의 일종)을 쓰고 수염이 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조금 작은 모습으로 몸체에는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 새겨져 있다. 풍수지리설에 바탕을 둔 신앙물 중 하나인 이 돌기둥은 ‘짐대’라고도 하는데 이곳의 지형이 배가 떠있는 형상과 같아서 안정감을 주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보여진다.
마을에서는 돌장승 2기와 돌기둥 2기를 하나의 단위로 삼아 마을의 신으로 모시며, 매년 음력 정월초하루 자정을 전후해서 당산제를 지낸다. 예전에는 공동체의식이 강해서 마을사람들이 함께 모여 제사를 드렸지만 최근에는 몇 집만이 참여하는 것으로 축소되었고 이들의 위치도 보호관리상 할머니당산 쪽에 모아두고 있다.
돌기둥에는 조성 연대와 건립자를 알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어 숙종 15년(1689)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지만, 돌장승의 경우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보통 나무로 세워지는 장승과 솟대가 돌로 만들어지는 변화의 과정을 볼 수 있는 민속자료이다.[1]
역사
서문안당산은 본래 6기의 당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오늘날에 볼 수 있는 당산 이외에 별도로 2기의 신목(神木)이 신앙의 대상으로 모셔진 것이다. 신목은 서문에서 각각 서북쪽과 남쪽 150m 지점에 있었다. 남쪽의 신목은 고사되어 흔적을 알 수 없고, 서북쪽의 신목은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 4기의 당산이 함께 자리하게 된 것은 1980년의 도로확장 공사와 관련이 있다. 원래 서문으로 통하는 길을 사이에 두고 할아버지·할머니 솟대당산이 서로 마주보고 서 있었고, 성문 입구에 있던 한 쌍의 석장승 역시 서로 마주보며 문지기장군으로 서 있다가 이 공사로 인해 현재 자리에 4기 모두를 나란히 옮겨 세우고 그 옆에 담장과 울타리를 설치하여 보존하게 되었다.
이들 당산이 세워진 시기와 연유, 그리고 모두 같은 시기에 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솟대당산에 새겨진 ‘강희이십팔년(康熙二十八年)’이라는 글자를 보면 할아버지 솟대당산은 1689년(숙종 15)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서문안당산은 동문안당산과 마찬가지로 성 안 마을의 안과태평을 기원하고 풍농과 번성을 빌기 위한 대상 신으로 받들어져 왔다. 또 다른 유래가 있다. 부안 읍성의 형세가 행주형이어서 허한 곳에 짐대를 세워야 배가 뒤집히지 않고 잘 운항되어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무사하고 잘살게 된다고 믿는 풍수설과 관련이 있다. 옛날에 새가 부락을 지켜주기 위해 날아와 앉았다는 내용으로, 이 때문에 일부 주민들은 그 새를 위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부안 읍성을 중심으로 모두 세 곳에 서문안당산과 유사한 형태의 당산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부안의 대표적인 산의 명칭이 ‘성황산’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들 당산은 마을의 당산으로서의 성격 이전에는 성 안의 주민들이 함께 지내던 성황제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2]
당산제
역사적으로 볼 때 부안 지역에서 서문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모습을 반영하듯 부안 읍성의 세 성문 안 당산 가운데 서문안당산은 신체 수가 가장 많고 복잡한 편이다. 특히 부안성내 모든 당산의 주신은 서문안당산신이었다. 예전에는 정월 초하룻날 밤에 풍물을 치면서 동문과 남문의 당산신을 맞아와 서문안당산에서합동으로 당산제를 모시고 난 뒤 자기 마을로 돌아가서 자신들의 당산제를 지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성 안 마을이 행정적으로 세분화되고 마을에 구장과 이장이 별도로 생기면서 합동당산제가 없어졌다고 한다.
서문안당산을 대상으로 하는 마을의 당산제는 오래전부터 행해졌으나 1978년에 중단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마을의 공동체의식이 약화되고 당산신에 대한 신앙심도 크게 쇠퇴하면서 서문안당산은 신체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만 하더라도 서문안당산제가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과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근래에 오면서 부안읍 내의 중고생들이 합동으로 음력 정월 초하룻날 낮에 제물을 올리고 사흘 동안 제의를 지냈다고 한다.
서문안당산을 대상으로 하는 제의인 서문안당산제는 서외리 주민들을 중심으로 음력 정월 초하룻날 밤에 지낸다. 서문안당산제와 유사한 형태인 동문안·남문안 당산제의 제일이 정월대보름이라는 점을 보면 서문안당산제가 가장 먼저 진행되는 셈이다. 다만 서문안당산제는 제의 당일 마을에 초상이나 출산하는 일이 발생하면 제일을 음력 이월로 연기한다. 이때 미리 준비한 제물은 이러한 일이 생긴 집으로 보내고, 음력 이월 제의 때 그 집에 새로 음식을 장만하게 한다.
마을 주민들은 섣달 초순에 마을회의를 통해 제의 전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나서 본격적으로 제의를 진행한다. 마을회의에서는 제의를 주관할 제관을 선출한 제관은 덕망이있고 궂은일이 없는 원로자 가운데에서 한 명을 선정한다. 회의에서 선정된 제관은 제의가 끝날 때까지 부정한 곳에 가지 않으며, 함부로 말하지 않고, 행동을 삼간다. 특히 제관은 비린 것을 절대 먹어서는 안 되며, 냉수로 목욕재계를 하여 부정을 가리기도 한다. 또한 제관은 설날에 세배를 받지도 않고 하지도 않으며, 부부간에 한 방에 들지도 않는다. 정결치 못하면 지골을 만든다고 생각해서이다. 제의 사흘 전에 제관 집의 문에 금줄을 걸고 황토를 펴서 잡인(雜人)들의 접근을 금한다. 당산제 제수로는 떡과 과일 등이 있다. 제수 비용은 마을 주민이 공동으로 부담한다. 과거에는 특별히 시주한 쌀이나, 각 가정에서 조금씩 걷은 쌀로 제수를 마련하였다.
섣달그믐날 저녁이 되면 제관은 당산 주위를 깨끗이 청소하고 황토를 펴고 주당산인 석간에 금줄을 쳐서 부정을 가린다. 이튿날인 정월 초하룻날 밤이 되면 풍물을 울리면서 제의가 진행된다. 풍물패는 마을에 있는 샘 주위를 밟아 가며 샘굿을 먼저 지낸다. 마을에 있는 모든 우물을 돌면서 굿을 하고, 이 굿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서문안당산제가 진행된다.
서문안당산제는 진설-분향-헌작-독축-소지 순으로 진행된다. 소지를 올릴 때에는 “군수영감 소지요”,“서장영감 소지요” 하면서 기관장·유지·주민들의 순으로 축원을 드린다. 마을의 공동 소망과 개개인의 집안 소망을 소지축원으로 올려 마을의 액운을 씻고 새해의 밝은 소망을 이루고자 축원하는 것이다. 축원 내용은 ‘올해에도 마을의 모든일을 잘 보살펴 주시고, 아무런 어려움이 없도록 도와주시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제의는 새벽 3시나 4시가 되면 끝난다. 날이 밝아 아침이 되면 당제에 올린 흰떡을 먹으면신수에 좋고 무병하다 하여 동민들은 백설기 떡을 나누어 간다. 제상은 4상으로 차려 개별 신체에 하나씩 놓는다.
당산제가 끝나면 정월대보름날 당산솟대에 옷 입히기를 한다. 옷을 입힐 때 사용되는 동아줄은 마을 사람들이 줄다리기를 목적으로 미리 만들어 놓은 것으로, 줄다리기가 끝나면 이 줄을 가져가 당산 신체에 옷을 입히는 것이다. 이 지역의 줄다리기는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당산제가 진행되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회관에 모여 당제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제의가 끝나면 모두 모여 음복을 한다.
서문안당산제는 동문안당산제와 비슷한 시기(1990년대)까지 해마다 마을 주민 중심으로 제의를 지냈다. 하지만 이농현상으로 인해 이 이후부터 격년제로 지내오다 2000년대 초반에 전승이 단절되었다. 그러다가 2010년에 부안군의 지원을 받아 다시 제의를 지내게 되었다. [3]
사진
관련 사이트
- 문화재청 (http://www.cha.go.kr/)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http://www.grandculture.net/)
참고문헌
출처
- ↑ 문화재청 '부안 서문안 당산'
- ↑ 네이버 지식백과 '부안 서문안 당산'
- ↑ 한국민속대백과사전 한국민속신앙사전 '부안 서문안 당산'
기여
일자 | 역할 | 이름 | 전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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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4 | 정리 | 조선애 | 인문정보학 |
2018.4 | 편집 | 조선애 | 인문정보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