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 사망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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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252.128.224 (토론) 사용자의 2015년 6월 9일 (화) 16:2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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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요약

2002년 6월 중학교 여학생 2명이 갓길을 걸어가다 훈련중인 미 제2사단 공병대대 44공병대 소속 차량에 치어 바퀴에 깔려 압사당한 사건.

사건의 개요

2002년 6월 13일 오전 10시45분경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56번 지방도에서 미2사단 44공병대(캠프하우즈) 소속 미군 장갑차(운전사 워커 마크 병장.36세)가 앞서 가던 여중생 신효순(14.조양중2년), 심미선(14.조양중2년)양 두명을 치어 그 자리에서 숨지게 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신양 등은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 생일잔치에 가기 위해 갓길을 걸어가던 중이었고, 미군 장갑차의 오른쪽 궤도부분에 치어 장갑차가 몸을 그대로 밟고 지나가 사망하고 말았다.

미군은 사고 직후 미군 의무요원만 호출하였을 뿐, 한국경찰에 전혀 연락하지 않은 채 약 1시간 가량 방치하였고 결국 사건 발생 1시간 후쯤 지나가던 차량운전자가 경찰에 신고해 인근 파출소 경찰관이 현장에 도착하여 현장사진 촬영과 거리측정 등 기초조사를 하고 의정부경찰서 사고조사계로 지원요청을 하였다. 그리고 같은 시간 제보를 받은 구급차 운전자가 현장에 도착하여 시신을 수습하고 병원으로 옮긴 후 의정부경찰서에서 현장에 도착하였다.

사건 발생 다음날인 6월14일 관련 사회단체에서 사건현장을 확인하였고, 미 제2사단은 같은 날 사회단체를 배제하고 유족들만 참여시킨 채 정확한 기초조사가 없이 현장브리핑을 하였다.

미군측은 6월 19일 한미합동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미 2사단장이 가족에게 사과한다고 말하고 이번 사건의 책임은 운전사만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좁은 도로에서 무리한 교행을 지시한 지휘체계에 있음을 시인했다.

하지만 책임자에 대한 자체처벌 문제에 대해서는 답변을 회피하고 사건의 여러 가지 의혹에 대해서도 여전히 분명치 않은 대답으로 일관하였으며 책임자 처벌문제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채 끝마쳤다.


사건 이후 재판과정

한국측에서 이 사건을 조사, 재판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졌으며 2002년 7월 10일 처음으로 미군측에 재판권 포기를 요청했으나 미군은 이를 거절했다.

주한미군 지위협정(SOFA)에는 주한미군의 공무수행중 발생한 사건의 경우 미군측이 1차적 형사재판관할권은 갖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건에 관련한 재판관할권을 미군이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SOFA는 상대방 국가에서 사건의 경중에 따라 1차적 권리 포기를 요청할 경우 서로 '호의적 고려(sympathetic consideration)'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이 규정에 따라 한국은 미군이 재판권 이양을 요구할 경우 대부분 재판권을 미군에 넘겨주어 왔다.

반면 한국이 미군에 형사재판관할권 포기를 공식요청한 경우는 없었으며, 2002년 6월 발생한 여중생 사망사건과 관련해 지난 2002년 7월 10일 처음으로 미군측에 재판권 포기를 요청했으나 미군은 이를 거절했다.

결국 2002년 11월20일 장갑차를 운행하다 여중생 2명을 치어 숨지게 한 혐의(과실치사)로 기소된 미군 장갑차 관제병이 미군측 재판에서 배심원의 무죄 평결을 받았으며, 장갑차 운전병에게도 22일 무죄 평결이 내려졌다. 배심원은 모두 현역 군인들로 구성됐다.


SOFA개정 요구와 촛불시위

한국측의 형사재판관할권 포기 요구에도 불구하고 불성실한 태도로 사건을 처리한 미군측과 책임자의 처벌없이 무죄 판결로 끝난 미군측의 재판에 유가족을 비롯한 국민들의 항의가 거세졌으며, 국민들의 반미감정이 높아졌다.

추가적인 사태 악화를 막기 위해 11월27일 미국 부시 대통령은 토마스 허바드 주한 미국대사에게 보낸 메시지를 통해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유가족과 한국민들에게 사과의 뜻을 전달한다"면서 "유사한 사건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미국은 한국 정부와 긴밀히 협력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사건발생 이후 6개월이나 지나서야 이루어진 부시 대통령의 사과 표명과 미국대사를 통한 형식적인 사과에 반미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었으며, 여중생 사건 무죄판결 무효, 불평등한 한미 SOFA 전면개정 요구, 반미시위 등이 계속되었다.

어느 네티즌의 제안으로 11월30일부터 서울 광화문 일대를 비롯한 전국에서 촛불시위가 일어나게 되었고 결국 부시대통령은 12월13일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깊은 애도와 유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국민들은 부시 대통령의 직접 사과와 SOFA 개정을 계속 요구하였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주한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편찬자 : 김범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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