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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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입: 인물
  • 한글항목명: 김부식
  • 한자항목명: 金富軾
  • 영문항목명: Confucius
  • 편자: 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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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5년(문종 29)∼1151년(의종 5). 고려 중기의 문신·학자·문인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입지(立之). 호는 뇌천(雷川). 얼굴이 검고 우람하였으며 고금의 학식에 있어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신라무열왕(武烈王)의 후손으로 신라가 망할 무렵 그의 증조부인 위영(魏英)이 고려태조(太祖)에게 귀의해 경주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주장(州長)에 임명되었다. 그 뒤 김부식(金富軾) 4형제가 중앙관료로 진출할 때까지의 생활기반은 경주에 있었다. 그의 가문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 근(覲) 때부터였다. 그의 아버지는 과거를 통해 중견 관료인 예부시랑(禮部侍郞)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까지 이르렀으나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김부식은 13·14세 무렵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의 슬하에서 자랐다. 그를 포함해 4형제의 이름은 송나라 문호인 소식(蘇軾) 형제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4형제 모두 과거에 합격해 중앙관료로 진출하였는데 이로 인해 그의 어머니는 훌륭한 어머니로 칭송받았고 매년 임금이 정기적으로 내려주는 곡식을 받았다. 더구나 4형제 중 부식과 둘째형 부일(富佾), 동생 부철(富轍, 뒤에 富儀로 개명함) 3형제는 당시 관직 중에서 가장 명예스러운 한림직(翰林職)을 맡아 남들의 부러움을 샀다. 이때 어머니 또한 포상되었으나 아들들이 임금의 은총으로 이미 녹을 받고 있음도 감사한데 그 위에 또 다시 포상을 받을 수 없다하여 받지 않았다고 한다.

1096년(숙종 1) 과거에 급제해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의 사록(司錄)과 참군사(參軍事)를 거쳐 추밀원 승선위계정(魏繼廷)의 천거로 한림원의 직한림(直翰林)에 발탁되었다. 이후 20여 년 동안 한림원 등의 문한직(文翰職)에 종사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발전시켰고 한편으로는 예종(睿宗)·인종(仁宗)에게 경사(經史)를 강(講)하기도 하였다. 1116년(예종 11) 7월에 문한관으로서 추밀원 지주사(知奏事)이자량(李資諒)을 따라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송나라가 대성악(大晟樂)을 보내준 것에 대한 사의를 표하였다. 6개월간 송나라 휘종(徽宗)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오는 길에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 한 질을 가지고 왔다. 인종이 1122년에 즉위하자 인종의 외조부인 이자겸(李資謙)이 한안인(韓安仁) 일파를 제거하여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나서 국왕의 외조로써 국왕에게 칭신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처와 함께 집안 행사에 궁중의 음악을 사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김부식이 중국고사(中國故事)의 예를 들어 그것의 부당함을 논하고 적극 제지하였다. 1126년(인종 4)어사대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올랐으나 이자겸의 난 때에는 침묵을 지킨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송나라에 고종(高宗)의 등극을 축하하러 갔으나 금나라 군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어 남천(南遷)을 하였으므로 수도에 가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사실 당시의 사신 파견은 표면적으로 송나라 고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송나라와 금나라의 사이의 정세를 알아보기 위한 정보수집 차원이었다. 그러나 이를 감지한 송나라의 반대로 수도까지는 가보지도 못하고 중도에서 돌아왔다. 이자겸 일파가 정계에서 축출된 이후 관리들의 승진이 용이해졌는데 1130년(인종 8) 12월에 정당문학 겸 수국사(政堂文學兼修國史)로 승진되어 재상직에 오른 후 다음해 9월에는 검교사공참지정사(檢校司空參知政事)로, 1132년(인종 10) 12월에는 (守司空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로 순조로운 승진을 거듭하였다. 과거 1126년(인종 4) 이자겸의 난으로 개경의 궁궐이 불에 타자 묘청(妙淸) 일파가 서경천도설(西京遷都說)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개경 유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천도가 어렵게 되자 묘청은 1135년(인종 13) 1월서경에서 난을 일으켰다. 이때 김부식은 중서시랑평장사로서 판병부사(判兵部事)를 맡고 있었는데 원수(元帥)로 임명되어 직접 중군을 거느리고 삼군(三軍)을 지휘 통솔해 그 진압을 담당하였다. 출정하기에 앞서 재상들과 의논해 먼저 개경에 있던 묘청의 동조세력인 정지상(鄭知常)·김안(金安)·백수한(白壽翰) 등의 목을 베었다. 당시 개경의 재상들과 부하 장군들이 그에게 조속한 진압을 독촉하고 건의하였으나 오히려 지연책을 추진함으로써 관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며 진압하려고 노력하였다. 서경 진압 도중 묘청의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나 조광(趙匡)이 묘청·유참(柳旵) 등의 목을 베어 윤첨(尹瞻)으로 하여금 개경정부에 바치도록 하였다. 이때 반란군의 진압을 위해 그들을 관대하게 처분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개경의 재신(宰臣)들이 이를 듣지 않고 윤첨을 극형에 처함으로써 반란군의 재결집을 야기시켰다. 이로 인해 1년 2개월이 지난 시점에서야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었다. 김부식은 묘청의 반란을 제압한 공으로 개경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에 책봉되고, 검교태보 수태위 문하시중 판이부사(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判吏部事)에 승진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감수국사 상주국 태자태보(監修國事上柱國太子太保)의 직도 겸하게 되었다. 그런데 김부식은 서경에서 개선한 뒤 묘청의 난을 진압할 때 자신의 막료로서 전공을 세운 윤언이(尹彦頤)를 포상하지 않고 도리어 탄핵해 양주방어사(梁防禦使)로 좌천시켰다. 그 이유는 윤언이가 이전에 주장했던 칭제건원론(稱帝建元論)이 묘청의 난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개경의 재신 중 그의 건의에 비협조적이었던 추밀원 부사한유충(韓惟忠)도 좌천시켰다. 그러나 인종은 1140년(인종 18) 김부식 등 재신과 대간들의 건의를 들어주지 않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그 결과 윤언이·한유충이 중앙정계로 복귀할 전망이 보이자 정치보복을 염려해 세 번이나 사직상소를 올려 결국 왕의 허락을 받아냈다. 이후 그의 형제들이 죽고, 자신의 우호세력인 정습명(鄭襲明)마저 탄핵을 받아 퇴임하자 그 자신 역시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인종은 그에게 동덕찬화(同德贊化) 공신호를 더해 주었다. 그리고 의종대에 이르러 낙랑군개국후(樂浪郡開國候)에 봉해졌다. 만년(晩年)에는 개성 주위에 관란사(觀瀾寺)를 원찰(願刹)로 세워 불교수행을 닦기도 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왕은 그를 도와줄 8인의 젊은 관료를 보내어 『삼국사기』의 편찬을 명하였으며, 김부식은 인종이 죽기 직전인 1145년(인종 23) 50권의 『삼국사기』를 편찬해 바쳤다. 『삼국사기』의 편찬체재(編纂體裁)를 스스로 정하였고, 이에 따라 참고직(參考職)의 조수를 시켜 사료를 발췌·정리시켰으며, 사론(史論)은 자신이 직접 쓰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인종 초년에 『예종실록(睿宗實錄)』을 편찬하였고, 의종(毅宗) 초년에는 『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도 담당하였다. 문인이기도 했던 그는 한림원에 있을 때 선배인 김황원(金黃元)·이궤(李櫃)와 함께 고문체(古文體) 문장의 보급에도 대단한 노력을 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육조풍(六朝風)의 사륙변려문체(四六騈儷文體)에서 당·송시대에 발전한 고문체를 수용하려는 것이었다. 『삼국사기』의 중찬도 이러한 문체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문집은 20여 권이 되었으나 현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글들이 『동문수(東文粹)』와 『동문선(東文選)』에 전해져 오는데 우리나라 고문체의 대가라 할 수 있다. 송나라 서긍(徐兢)은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인물조에서 그를 “박학강식(博學强識)해 글을 잘 짓고 고금을 잘 알아 학사의 신복을 받으니 능히 그보다 위에 설 사람이 없다.”라고 평하였다.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을 만나보기도 하였고, 윤관(尹瓘)이 지은 영통사대각국사비문(靈通寺大覺國師碑文)이 잘못되었다고 문도들에 의해 문제가 제기되자 다시 짓기도 하였다.

1153년(의종 7)에 죽자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되었으며, 인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내용

  • 이름 : 김부식
  • 시대 :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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