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징 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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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sisop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3월 5일 (일) 08:1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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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 Data

요약

조선의 학자로 호남(湖南)의 이황 문인(門人)이자 필암서원에서 제향되는 인물 소쇄원의 주인인 양산보의 아들로, 김인후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그의 제자가 되어 사사하였으며 이황에게 나아가 배워서 장려와 인정을 받았다.

생애

본관은 탐라이며 자는 중명이고 호는 고암이다. 고암 양자징은 소쇄원 주인 양산보의 둘째 아들로 창평에서 출생했다. 양자징은 5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피를 토하는 슬픔으로 병을 얻었고 8세 때까지 삼년상 동안 새벽부터 위자하여 근신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소학'공부를 철저히 하여 실천하였으며, 15세에 경사에 통달하였고, 침잠하여 홀로 이치를 깨닫고 연구해 감이 스스로 마음으로 이해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서 김인후 선생을 뵙고 깊이 존경하여 그의 딸을 처로 맞아 들였다. 그 후 김인후의 제자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일취월장하여 학업에 더욱 더 정진하였다. 이황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이이와 성혼에게서 강의를 받았다. 선조때 감사 정종영이 천거하여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가 의영고직장, 거창현감, 석성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아들 양천경과 양천희가 기축옥사로 죽고 양자징도 옥살이하는 두아들의 옥바라지를 문제삼아 파직당하게 되어 집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하며 지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찬한 행장이 송자대전에 전한다. 정조 10년(1786) 호남의 선비들이 양자징을 필암서원에 배향할 것을 청하자 이를 예조에 물어 고암 양자징을 필암서원에 배향하도록 하였다. 정조는 '그가 김인후 공의 사위로 학문의 정통을 이어받았고 또 퇴계와 율곡, 우계 등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니, 배향하더라도 의리상 안될 것이 없다. 더구나 문정공의 집안에 직접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고 또 그의 후손을 조정에 채용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때에 이 일은 우연한 것이 아니므로 허락한다."고 하였다.

하서 김인후와의 관계

하서선생에게 조희문, 양자징, 기효간, 변성온, 노적, 남언기를 비롯한 많은 제자가 있었다. 그리고 이후대, 기대승, 김천일, 박순, 정철 등도 후배 문인으로 자처하였다. 하서 선생은 친분이 깊었던 양자징을 봐왔고 필암서원에 유일하게 스승과 함께 배향되어 있어 수제자였음을 알 수 있다. 스승 김인후가 일찍이 자석벼루 하나를 양자징에게 주자 양자징은 그것을 잘 보관하여 가전의 보배로 삼으니, 세상 사람들은 복재 기준이 하서 김인후에게 붓을 준것과 동일한 아름다운 일이라 여겼다. 양자징이 쓴 장인이자 스승인 김인후의 행장에 따르면, "소자 자징은 문하에서 알아줌을 받음이 이미 후하였고, 또 음성을 들으며 직접 배운 것이 여러 해였다."고 하여 본인이 문하에서 가장 후한 스승의 사랑과 동료들의 격려를 받은 자자였다고 자평하였다.

출처

필암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