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보 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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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 Data



요약

양산보(梁山甫, 1503년~1557년)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본관은 제주, 자는 언진(彦鎭), 호는 소쇄옹(瀟灑翁)이다. 담양 소쇄원의 창건자로, 1519년 기묘사화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소쇄원을 지었다.


내용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소쇄원(瀟灑園)의 창건자로 자는 언진(彦鎭), 호는 소쇄공(瀟灑公)이며 양사원의 세 아들 중 장남으로 담양 창평에서 태어났다. 15세 때 상경하여 당시 사림들의 우상이었던 조광조(1482∼1519)의 문하생이 되어 수학하였으며 1519년 17세 때 현량과에 합격하였으나 나이가 어리다고 하여 벼슬에 나가지는 못했다. 그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스승 조광조가 화를 입어 귀향을 가게되자 유배지까지 스승을 모셨다. 그해 겨울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사망하자 이에 충격을 받고 벼슬길을 등지게 되었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소쇄원을 지었다. 이때 양산보의 나이 17세였다. 그는 이곳에서 세속적인 것과 거리를 멀리하고 성리학에 몰두하였다고 전하지만 그의 학문적 행적은 뚜렸하지 않다. 그가 지은 효부(孝賦)와 애일가(愛日歌)가 전하고 있다. 소쇄원의 형태는 1528년까지 정자 한 채만 있었고 그의 말년에 이르러 '원(園)'을 갖추었으나 별서원림(別墅園林)을 직접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현재 남아 있는 사적 제304호 담양소쇄원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그의 손자인 양천운(梁千運:1568∼1637)이 1614년에 재건한 것이다.

소쇄원 경영에는 송순(松純:1493∼1583)과 김인후(金麟厚:1510∼1560) 등도 참가했다. 송순은 양산보와는 이종사촌 간이었으며, 김인후는 양산보와 사돈 간이었다. 그밖에 담양부사를 지낸 임억령(林億齡:1496∼1568)과 인근 환벽당의 주인인 김윤제(金允梯) 등도 참가하여 풍류를 즐겼다.


출처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