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직공도 역사적 배경: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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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영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6년 12월 26일 (월) 17:5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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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전성기 때에 한반도 북부와 중부 일대, 중화인민공화국동북 3성 일부, 러시아연해주 일부를 지배하였다.[1]

역사

틀:한국사

성립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부여의 왕자라 전해지는 주몽이 건국하였다. 부여한사군(漢四郡)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산간지대에 위치한 고구려의 지리적 사정으로 인한 부족한 식량 사정과 부족한 논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비옥한 영토를 정복하는 적극적인 정복 활동과 한군현을 공격하는 대규모 정복전쟁을 벌였다. 중국 사서에서는 약탈로 인해 신나라 왕망의 분노를 일으켰고 고구려 후[侯(왕)] '추'가 요동군에 소환되어 참수당하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왕망의 군대는 고구려군에게 참패 당하였다.[2] 그 후 고구려는 태조왕 때 왕족인 계루부(桂婁部)를 포함한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했다.

고구려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동명왕(東明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졸본부여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3]에 도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설이 제시되기도 한다. 기원후 3년에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왕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고구려는 국가적 체계를 마련하고 계속해서 주변 유목 부족과 연맹체 침략하여 북옥저와 졸본, 국내성 주변의 지역을 흡수하였다. 고구려가 이렇게 성장하자 이에 대항하는 국가가 늘었다. 농안을 근거지로 성장한 부여는 기원전 6년13년 침공하고 복속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세력을 키운 고구려가 21년,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부여왕 (대소왕)을 죽이고 돌아왔다. 이후 부여는 고구려를 섣불리 침공하는 일이 없어졌다. 부여를 물리친 고구려는 더욱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자 28년 한나라가 이에 위협을 느껴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농성을 펼치며 막아냈고, 32년 낙랑국도 일시적으로 정복하는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위세를 떨쳤다.

53년에 즉위한 태조왕(太祖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고, 이후로 소노부 왕가가 물러나고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태조 때로 본다.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는 옥저·동예(東濊), 남으로는 살수(薩水),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로는 한의 요동군·현도군과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태조왕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무력으로 복속케 하고 한사군에 대한 원정 및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6년(동천왕 16년) 위나라(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4]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은 194년에 봄에 곡식을 빌리고 가을에 갚게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왕위의 형제 상속을 부자 상속으로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야 왕위의 부자 상속제가 확고히 되었다.

위기와 극복

틀:참고

한편 후한(後漢) 말기에 중국이 3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했던 시기,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북부 중국의 (魏)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그 세력이 동쪽으로 뻗쳐오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했다. 하지만 2년 뒤에 위의 장군 관구검이 남흉노와 선비족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246년 고구려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농성하며 싸웠으나, 결국 함락되어 동천왕은 옥저로 피란을 가고 말았다.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위군은 물러났고, 피폐해진 환도성 대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4]

큰 위기를 겪었던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이 오호 십육국 시대로 혼란해짐을 틈타 정복 활동을 재개하였다. 미천왕(美川王)은 폭군 봉상왕창조리와 함께 내쫓고,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진과 낙랑을 잇는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313년 낙랑군(樂浪郡), 314년 대방군(帶方郡)의 고지를 함락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정복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고국원왕(故國原王)대인 339년부터 343년까지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모용황과의 전쟁으로 수도가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표면상의 복속의 예를 갖추는 치욕을 겪었다. 고구려는 한동안 눈을 남쪽으로 돌려 369년 백제의 치양성(雉壤城: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을 공격하여 백제를 도발하였다. 그러자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역공을 받고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

백제와 북방 민족의 양면 협공을 견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때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았다. 또한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

광개토태왕

광개토태왕릉 비문 탁본

소수림왕의 중흥을 기반으로 하여 5세기 광개토왕(廣開土王) 때에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꾀하여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다. 391년 광개토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는 남쪽으로 백제를 먼저 공략하였다. 392년 백제의 대방 땅을 수차례 공격하여 백제를 약화하게 했으며, 396년 한성을 대대적으로 포위하였다. 아신왕은 다급히 항복하였고, 고구려에 스스로 복속하기를 청하였다. 동맹국 신라가 백제의 후원을 받는 가야·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400년 그들을 격파하고 금관가야를 재기 불능 상태에 빠뜨렸다. 하지만 남쪽의 병력이 집중되어서 후연에게 고구려 북쪽 500리 땅을 일거에 잃었다.

남쪽을 공략한 광개토왕은 402년부터 후연과의 본격적인 전쟁으로 돌입하였다. 고구려는 요동을 장악하고 이어서 등장한 북연과 친선 관계를 맺어 서쪽을 안정케 했다. 북쪽으로는 부여 및 숙신(肅愼), 거란비려(碑麗)를 복속게 했으며, 동으로는 읍루(挹婁)를 정벌하였고, 동예(東濊)를 완전히 병합하였다. 또한 광개토왕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락(永樂)이라는 연호(年號)를 써서 중국과 대등함을 과시했다. 그의 업적은 지금의 만주 통구(通衢)에 있는 거대한 광개토태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평양 천도와 남진 정책

그 후 413년에 즉위한 장수왕 때에는 대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중국 대륙의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다면(多面) 외교 정책을 써서 중국 대륙을 견제하였다. 또 427년(장수왕 15)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고, 이에 백제는 큰 위협을 느껴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신라와 433년에 나·제 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 세력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고구려의 압력을 피할 수 없게 된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북중국의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위군의 내원(來援)을 청한 일까지 있었다. 이에 장수왕은 승려 도림(道琳)을 백제에 간첩으로 보내어 경제적 혼란을 일으킨 다음 교묘히 백제 침공의 태세를 갖추었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함락하여 한강 유역을 정복하였고, 그로 인해 백제의 개로왕이 전사하고 말았다.

이와 함께 신라를 쳐서 죽령(竹嶺)까지 차지하여 죽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히는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펼쳤다. 이와 같이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강대국을 형성하여 중국의 제국과 거의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5]

장수왕대 이후 고구려와 고려는 혼용되었다.[6]

국력의 쇠퇴

고구려는 6세기 들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안원왕(安原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 계승을 놓고 왕족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내분을 틈타 551년 백제와 신라가 연합군을 조직하여 대대적인 영토 회복전에 나서, 한강 유역을 빼앗았다. 동일한 시기에 북쪽에서는 돌궐(突厥)이 발흥하였다. 또한 위·진·남북조로 분열된 중국을 589년 수나라가 통일함으로써 고구려는 요동에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때 동아시아의 정세는 돌궐(突厥) ·고구려 ·백제 ·일본을 연결하는 남북 진영과 수(隋: 후에는 唐)나라와 신라가 연결하는 동서 세력으로 갈라져 대립상태에 놓였다.[7]

수나라와의 전쟁

틀:참고

결국, (隋)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고구려왕의 친조를 요구했는데 고구려가 이를 완강히 거부하자, 598년·612년·613년·614년에 각각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598년 수나라의 초대 황제인 수 문제는 고구려가 요서를 선제 공격하자 이를 계기로 30만 육군과 10만 수군을 보내 반격하였다. 하지만 육군은 요동에 다다르기도 전에 장마로 인해 돌림병이 돌고 군량미가 떨어져 퇴각했으며, 수군도 풍랑을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612년 수 양제는 113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출병하였다. 수 양제는 내호아를 수군총관으로 임명하여 평양성으로 곧장 향하게 하고, 육군은 요동성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요동성의 끈질긴 저항으로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결국 수 양제는 우중문우문술을 각각 우장군과 좌장군으로 임명하여 30만의 별동대를 평양으로 직접 보냈다. 그러나 이들은 살수에서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크게 패했다(살수대첩). 결국 수는 이 전쟁으로 국력을 소진하여 멸망하였으며, 고구려 역시 국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당나라와의 전쟁

틀:참고

고구려는 수나라를 뒤이은 (唐)나라와도 대치하였다. 고구려는 당의 공격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았는데,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이에 위협을 느낀 중앙 귀족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하자 연개소문은 642년 군사 반란을 일으켜 영류왕(榮留王)을 비롯한 귀족을 모두 살해하고, 보장왕(寶臧王)을 왕으로 세운 뒤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정권을 찬탈하였다. 이후 연개소문은 대외 강경책을 펼쳐 648년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645년 당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옛 한군현을 되찾고 난신적자 연개소문을 치겠다며 공격해 왔으나 실패하였다.

이후에는 당나라가 소모전으로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왔으나 그 때마다 격퇴하였다. 하지만 동맹국인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하고, 주변국이 대부분 당나라에 복속하면서 고구려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백제를 멸망시킨 그 이듬해인 661년(보장왕 20년)에 당나라는 대규모로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평양성이 포위되는 위기를 처했으나 고구려는 잘 막아내었다.

파일:History of Korea-645.png
제1차 고구려-당 전쟁

그러나 그 후 고구려의 국내 사정은 변모를 거듭하였다. 당이 융성 일로를 걷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고구려의 국력은 쇠퇴해 가고 있었다. 60여 년에 걸친 수·당과의 전쟁으로 백성의 생활은 파탄에 직면했고, 국가 재정은 파탄하였다. 그 위에 동맹국인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은 더욱 그 국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고구려의 멸망과 부흥운동

틀:참고

666년에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 연남생·연남산 형제 사이에 막리지 자리를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그 결과 남생은 국내성으로 쫓겨난 뒤 당 고종에게 항복하였으며,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하였다. 결국 668년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 이후 검모잠, 안승 등의 고구려 부흥 운동이 지속되었으며, 안시성과 요동성 및 일부 요동의 성은 고구려 멸망 이후인 671년까지 당나라에 항전하였다. 또한 보장왕말갈과 함께 나라를 다시 세우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698년에 고구려의 장수 출신인 대조영만주 동부의 동모산 일대에서 발해를 건국하면서 고구려 부흥 운동은 일단락되고, 고구려는 발해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리고 발해가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의 모두 수복하고, 동북쪽 영토를 고구려보다 더욱 확장했다. 발해는 매우 번영하여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도 불렸다.

중국 역사서에 나타난 고구려의 영토

구당서의 고구려 강역

원문:틀:인용문

번역: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하였으니,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이다. 장안에서 동쪽으로 5천 1백리(약 2000km) 밖에 있다.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른다.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으로는 말갈에 이른다. 동서로는 3천 1백리(약 1,220km)이고, 남북으로는 2천리(약 785km)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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