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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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아차산성은 일명 아단성·아차성·양진성(楊津城)·광진성(廣津城) 등으로 불리운다. 아차산의 원이름은 기록상으로 아단산이다. 산이름과 산성의 이름이 아단성(阿旦城)에서 아차성(阿且城)으로 다시 아차성(峨嵯城)으로 표기가 변화된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이 성은 삼국의 격전지였으며 군사적으로 중요했다. 최대의 津城이었다.
아단성(阿旦城)에 대한 기록
三國史記 卷第24百濟本紀第2,責稽王元年,‘高句麗伐帶方帶方請救於 我先是王娶帶方王女寶菓爲夫人故曰帶方我舅甥之國不可不副其請遂 出師救之高句麗怨…王慮其侵寇修阿旦城蛇城備之’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 軍□□首攻取 寧八城,臼模盧城,各模盧城,幹氐利城,□□城,閣彌城,牟盧城,彌沙城,□舍蔦城,阿旦城,古利城,□利城,雜珍城,奧利城,勾牟城,古模耶羅城
- 광개토왕릉비 수묘인 연호조
古城國烟一看烟三, 客賢韓一家爲看烟, 阿旦城, 雜珍城合十家爲看烟, 巴奴城韓九家爲看烟, 臼 [2]
'阿旦城과 雜珍城은 합하여 10가가 간연'
-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이끈 군대가 한성을 포위 함락시킴에 따라 개로왕은 생포되어 아단성 아래서 처형된 기록이 있다.
- 증보문헌비고-권 26 輿地考14 영음고성조(永音古城條)에서 아단성을 阿朝城이라 기재
- 국사기 백제본기와 지리지에 아단으로 기록됨
流矢所中路而死 遂行與羅 軍戰於阿旦城之下爲
- 조선후기 김정호의 『대동지지』 양주의 성지(城池)항에 의하면 아차산에는 양진성과 아차산고성이라는 2개의 성곽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온달전의 소재로 쓰인 예로 (잡지명: 서우 제9호,발행일 :1907년 8월 1일,기사제목: 溫達傳, 기사형태:잡지)
... 與羅軍으로 戰於阿旦城之下라가 爲流矢所中야 死於路니 欲葬에 柩不肯動이라.[3]
관련 문서
이 문서 | 관계 |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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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단성 | ~에 기록되었다. | 삼국사기 |
아단성 | ~에 기록되었다. | 광개토왕을비문 |
아단성 | ~와 관련있다. | 개로왕 |
아단성 | ~의해 보수되었다. | 책계왕 |
아단성 | ~와 관련있다. | 온조 |
아단성 | ~와 관련있다. | 온달 |
아단성 | ~의 이칭이다. | 아차산성 |
지도
클래스
- 유적
기여
- 장선옥: 최초작성
주석
- ↑ 廣開土王陵碑의 永樂6年條
- ↑ 출처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gskr_001_0010_0010_0030 中國 吉林省 集安縣 太王鄕 九華里 大碑街 한국고대금석문 (국사편찬위)
- ↑ 출처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ma&setId=1091935&position=0 한국근현대잡지자료 서우 제9호 온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