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천도
개관
1096년(숙종 1) 풍수가 김위제(金謂磾)는 풍수도참서를 근거로 하여 남경천도를 주장하였는데, 특히≪삼각산명당기≫와≪신지비사≫에 남경의 풍수지리를 설명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 건의에 따라 1101년에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을 설치하여 남경 조영공사(造營工事)를 진행, 1104년에 궁궐이 준공되었다.
그 뒤 14세기 말기에 공민왕은 보우(普愚), 즉 원증국사(圓證國師)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제현(李齊賢)을 남경에 보내어 궁궐을 짓고 남경천도를 하려다가 중단한 일이 있었다.
공민왕의 뒤를 이은 우왕(禑王) 때도 남경천도론이 재연되어 임금이 친히 남경에 거둥하기도 하였다.
우왕의 뒤를 이은 공양왕 때도 임금이 남경에 거둥하여 정무의 분사제도를 실천해보기도 했으나, 결국 남경천도는 성취되지 못하였다. 고려 태조 이래 역대의 제왕은 도참설에 크게 현혹되었는데, 남경천도 이외에도 많은 역사적 사건이 도참설과 관련되어 일어났다.
≪삼각산명당기≫의 내용은, 삼각산이라는 곳은 북을 등지고 남을 향한 仙境으로서 거기서 시작한 花脈(산맥)은 세 겹 내지 네 겹으로 갈려 나와(三角山·文殊峰·普賢峰·白岳 등) 산이 산을 등지고 명당(서울)을 지키고 있으며, 案前의 朝山은 다섯 겹 또는 여섯 겹을 이루고(冠岳·牛眠·狐峴·淸溪·鶴峴·葛山 등), 방계·직계의 姑山·叔山·父山·母山은 모두 솟아나서 이를 옹호하고, 內水口·外水口에는 각각 충실히 주인을 지키는 세 개의 犬山이 있고(내수구 즉 내문은 往十里·馬場里, 沙斤里 부근을 말한 듯하고, 외문 즉 외수구는 한강 하류방면을 지칭한 듯함), 좌우의 청룡·백호는 세력이 비슷하니 전체의 균형이 잡혀 있으며, 내부의 商客과 寶貨가 이 곳으로 모여들어 국왕을 돕고, 임자년중에 이 땅을 개척하면 정사년에는 聖子를 낳을 것이고 또 삼각산에 의지하여 帝京을 세운다면 9년 만에 4海로부터 조공을 받을 것이라는 예언이다.0328) 한편≪신지비사≫의 내용은, 3京을 저울에 비유하여 개경을 저울대로 하고, 五德丘(지금의 서울)를 저울의 추로 삼고, 서경을 저울의 증판으로 삼아서 머리와 꼬리가 균형을 유지하면 국가가 번영을 누릴 수 있으며 만일에 이들 3개소가 폐지된다면 왕업이 쇠퇴하여 기울어지리라는 것이다.
.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김위제는 새로운 예언서들을 발굴해 인용했고, 결과적으로 왕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숙종은 연이은 자연재해로 정치적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흉년과 실정이 겹치는 바람에 고려의 민심은 국가를 이반했다. 숙종은 정치적 돌파구가 필요했고, 궁지에 처한 왕을 돕기 위해 김위제는 남경천도론을 제시했다. 이런 근본적인 배경과는 무관하게 그의 천도론에는 ‘정감록’의 기원에 해당하는 여러 가지 요소가 숨어 있다. 참고로 말하면, 김위제가 한동안 몸을 담았던 위위시(衛尉寺)는 풍수지리와 직접 관계가 없는 부서였다. 이 관청은 의장(儀仗)에 사용되는 예기(禮器)와 병기(兵器)를 관장하였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통령 경호실과 유사한 기관이었다. 위위승은 이 관청의 중간 정도 벼슬이었다. 김위제는 술관이라 본래 이 관청과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하지만 숙종 원년 그는 남경천도론으로 직무상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이를 표창하는 뜻에서 왕은 위위승동정 벼슬을 주었던 것 같다.
남경천도론을 펼 때 김위제는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란 새로운 예언서를 인용해 관심을 끌었다
고려시대의 귀족들은 유달리 한시를 즐겼다. 그런 까닭에 예언서마저도 시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달리 말해,‘삼각산명당기’는 고려중기 귀족문화의 산물이다. 신라 말에 저술된 예언서로 보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내용상으로 보더라도, 이 예언서는 고려 때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
‘삼각산명당기’를 이용해 김위제는 남경천도의 긍정적인 효과를 뚜렷이 부각시키려고 했다. 그는 삼각산의 지세를 검토한 결과 명당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물샐틈없이 방어되고 있으므로, 이곳에 왕궁 터를 정하면 절대 반역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했다. 또한 청룡과 백호의 모양으로 점쳐 볼 때 신하들 사이에도 파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안과 바깥의 장사꾼이 각기 보배를 바쳐” 왕실의 재정도 풍부해진다고 보았다. 사방의 인재들이 조정에 가득차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이치이고,“재상(輔國)과 바른 임금(匡君)이 모두 한 마음”이 되어 국정운영이 순조롭다고 예언했다.
김위제는 남경천도의 시기도 못 박아 두었다.“임자 년에 만일 궁전 지을 공사를 시작하면, 정사 년에는 성스러운 아들을 얻으리라.”고 하여 성군(聖君)이 출현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삼각산에 의지하여 황제의 서울을 지어라. 아홉 해만에 사해가 조공을 바쳐 온다.” 했다.(‘고려사’, 권122)
지난 호에선 묘청의 서경천도론을 다루었다. 그것이 ‘정감록’에 예언된 계룡산천도론의 모태가 된다는 점을 밝혔다. 그런데 이제 알고 보니 김위제는 묘청보다 한 세대 앞서 천도론을 폈다. 물론 묘청의 주장은 좀더 새로운 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국태민안(國泰民安)과 사해조공설(四海朝貢說·천하가 고려에 복종한다는 뜻)을 폈던 점에서 묘청은 김위제의 남경천도론을 계승한 셈이다. 국운상승의 힘을 천도론에서 찾은 점에서 김위제는 ‘정감록’의 보다 심원한 뿌리였다.
『신지비사』관련 기록들
- 『삼국유사』 권제3, 흥법 3 보장봉노 보덕이암(寶藏奉老 普德移庵)
- 『고려사(高麗史)』 권122, 열전35 김위제(金謂磾)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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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비사의 저울대, 저울추, 극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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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선: 처음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