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염색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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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암각화(盤龜臺岩刻畫) | |
대표명칭 | 반구대암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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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盤龜臺岩刻畫 |
영문명칭 | pánguītáiyánkèhuà |
유형 | 문화재,유적 |
주소 | 울산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산234-1 |
목차
정의
● 천연염색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내용
선사시대&삼한시대
- 선사시대[1]
- 1973년 층청북도 제천의 점말 동굴에서 중기 구석기시대 코뿔소 정강이뼈에 사람의 얼굴을 새겨 놓은 조각품이 출토되었다.
- 1976년 청원 두루봉 동굴의 2굴에서 동물뼈와 암석에 두 눈과 입으로만 얼굴을 표현한 것이 발견되었다.
- 얼굴상 외에 공주 석장리 유적의 반암, 자갈돌에 새겨진 미세한 선각은 구석기시대부터 암각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 선각의 형태로 발견된 울산광역시 울주군 반구대암각화는 채색을 했는지 알 수 없으나 원시적인 방법으로 채색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 반구대암각화는 현재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본다.
- 반구대암각화에는 호랑이, 사슴, 멧돼지 등과 고래, 물개, 거북 등 생물을 비롯하여 250여 마리의 동물과 사람, 사냥 도구, 고기잡이 배, 그물과 수많은 추상적*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져있다.
- 선각 혹 색 있는 흙이나 돌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원시 형태의 염색이 행해졌음을 나타내며, 이러한 것을 통해 염색의 최초 증거를 확인할 수 있다.
- 붉은 흙을 이용한 채색 방법은 점점 발달하여 조선시대의 관복에 사용한 토홍색(土紅色)으로 이어졌다.
- 삼한시대[2]
- 문헌을 통해서 염색 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 『후한서』「동이열전」한전(韓傳)과『삼국지』「위서」한전(韓傳), 진서(晋書)를 보면
- "진한 사람들은 누에를 치고 뽕나무를 가꿀 줄 알았으며 양잠이 성행하여 비단을 잘 짰다. 폭이 넑고 가는 베를 짜기도 한다."
- 라는 내용이 나온다. 폭이 넓고 가는 베를 짰다는 것은 직조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증명한다. 직조 기술의 발달은 염색 기술과 긴밀한 상관관계가 있으므로 염색술을 엿볼 수 있는 단면이다.
- 같은 책 마한 부분에
- "마한 사람들은 농사를 짓을 줄 알고 양잠을 할 줄 알며 길쌈하여 면포(綿布)를 짰다. 그리고 금, 보화, 비단, 모직물, 무늬를 넣어 짠 비단 등을 사용하고 색실로 수를 놓은 비단 등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 염색술이 보편화되고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 무늬를 넣어 비단을 짜고 수를 놓았다는 것은 색실을 많이 사용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 고구려 “『삼국사기』”와 “신당서 「동이전」 고구려조”에 왕은 오채복(五采服)을 입었고 대신들은 자(紫), 청(靑), 강(絳), 비(緋)색의 관을 쓰고 황(黃)색 가죽신을 신었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는 한반도 중부에 위치하여 신라와 일본에 문화를 전파 그 문화는 우아하고 섬세한 세련미를 지니고 있다. 왕, 신하, 평민의 복식구분이 명확하였는데 왕은 보라색의 넓은 포를 입고 청색의 무늬를 두어 짠 바지를 입었다. 또한 복식의 계급적 구분화가 일찍이 이루어져 의복뿐만 아니라 관모, 대등으로 계급의 차이를 두었다. 신라는 대륙문화를 수입하는데 고구려, 백제보다 늦었지만 독창적 문화를 완성한 나라로서 점차 국력이 강해짐에 따라 복식도 무풍적일 뿐만 아니라 창의적 수식이 풍부했다. 또한 골품이란 신분관념을 확립하여 계급적 사회질서를 세우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삼국 모두 다양한 색상을 통하여 신분을 표현하였으며 의복에 다양한 색상을 이용한 것으로 보아 염색 기술 수준이 높았던 것으로 생각된다.[3]
고려시대
- 통일신라시대 이후 복식을 그대로 수용하여 사용하였는데 중국의 당, 송, 원등의 문화를 다각도로 흡수 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고구려의 후계임을 자처하였다. 한편, 고려사에서 홍화, 자황이라는 식물성 염료의 명칭이 거론되는 것으로 보아 다양한 식물을 이용한 천연염색이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계림지에 “고려는 염색을 잘하는데 홍색과 자색이 더욱 묘하고, 자초 뿌리의 굵은 것은 모란 뿌리만큼 굵고 이것의 즙을 짜서 비단에 물들이면 매우 선명하다”고 하였다. 이를 볼 때 고려의 자초 염색술은 우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4]
조선시대
- 황색을 비롯하여 자색, 홍색등 착용해서는 안 되는 금제복식이 많았다. 일반인들은 염색하지 않은 백의를 입는 것이 편하였고, 그것은 관습화 되었다. 우리 민족이 백의를 입는 관습은 우리 민족성이 백의를 선호한다는 설이 있지만, 반면에 염료를 구하기 힘들며 값이 비싸고, 복색에 대한 금제복식이 그 원인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의례용과 관복을 제외한 특수한 것 이외에는 유색복을 거의 입지 않았다. 이것으로 인해 염색 기술이 크게 발달될 수 없었고, 전시대의 염색기술을 계승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 후기의 규합총서를 보면 진홍, 람, 옥색, 초록, 두록, 팥 유청, 목홍, 반물 드리는 법 등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주로 식물성에서 염료를 추출하고, 식물의 잎, 줄기, 꽃, 열매 등에서 추출하였고, 촉염제, 완염제, 발색제로 잿물, 백반, 얼음, 오미자등을 사용했으며, 불순물이 섞이지 않게 단물을 이용하였다.[5]
*조선시대 많이 입었던 홍색과 청색*
근대시대
- 1940년대까지 조선시대의 염색법은 일반 민가에서 쪽염색과 간단한 염색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합성염료가 시장에 많이 퍼지면서 그마저 단절되었다.
- 우리나라는 1876년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이루어진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 인천, 원산이 열리자 새로운 문물이 봇물처럼 밀려 들어욌다.
- 19세기 말 일본, 중국, 영국, 러시아에서 들여온 품목은 이미 200여 개가 넘었고, 모피와 카펫에서 석유, 성냥,염료, 화장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 그러나 문호 개방 이전부터 이미 중국을 통하여 양화(洋貨)로 통칭된 서구 상품이 들어왔는데, 대략 19세기 전반기부터 자본주의 제품인 면직물이 들어와 국내 상업계에 파문이 일기 시작하였다.
- 1837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 "청포(靑布)……서양포급(西洋布及)……매매"라는
- 내용은 이 시기에 서구 면직물, 즉 옥양목(玉洋木)•당목(唐木)•광목(廣木)으로 불린 대량 생산 면직물이 저지망을 뚫고 흘러 들어와 일부 상류 사회에서 애용했음을 말해준다.
- 공업의 근대화로 산업 공장이 설립되었다.
- 근대화 이전에 밀무역으로 상당한 양의 서양 물품이 들어와 있었다.
- 궁중이나 지체 높은 양반들과 부호들의 집에는 서양 물건이 한둘쯤 있게 마련이었고, 항구가 뚫리고 일본과 청나라 사람들에게 문이 열리자 서양 물품들이 본격적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서민의 생활 문화까지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 신식 물건 → 이러한 물품 중 합성염료가 들어와 궁이나 양반가에서 먼저 사용하였고, 일반 서민에게 확산되기 시작한 시기는 1900~1910년으로 추정된다.[6]
문양염의 역사
- 삼국시대부터 문양염이 있었으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그 맥이 이어졌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 맥이 끊기고 유물 자료와 문헌 자료도 빈약한 실정이다.
- 문양염이란 꽃 등의 무늬를 나타내는 염색법이다.
- 문양염의 기법에는 방염(防染), 채회염(彩繪染), 목판 날염법에 인한 인화염(印花染)이 있다.
- 방염법이란 물들이고 싶지 않은 부분에 염액이 스며들지 않게 방염되는 재료를 이용하여 무늬를 넣은 염색법이다.[7]
전통 문양의 염색 기법
- 납힐(蠟纈)= 납방염(蠟防染)= 갈힐(葛纈)
- 납힐은 직물에 문양을 그리고 필요로 하는 부분만 밀랍*파라핀*풀 등으로 염액이 들어가지 않게 방염하고 염색한 후 밀랍*풀 등을 제거하여 문양을 나타내는 염색법이다.
- 협힐(夾纈)= 판체염(板締染) 파일:협힐염색.jpg
- 협힐은 2개의 판에 같은 문양을 조각하고, 그사이에 옷감을 접어 끼워 꽉 쪼인 후 염색하여 문양을 나타내는 염색법이며, 지금의 판염(板染)과 비슷하다.
- 부채접듯이 상하좌우로 일정하게 접은 직물의 양 평면 위에 문양을 파낸 목판을 밀착하여 고정시킨 후 염색한가. 직물에는 상하좌우 대칭적인 문양이 나타난다.
- 교힐(絞纈)= 교염(絞染)
- 교힐은 실이나 끈으로 직물을 부분적으로 묶은 다음 염액에 담가 부분적으로 염색이 되지 않도록 하여 문양을 나타내는 방법으로 지금의 홀치기염이다.[8]
주석
- ↑ 이종남,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천연염색』, 현암사, 2018, 44-48쪽.
- ↑ 이종남,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천연염색』, 현암사, 2018, 49-54쪽.
- ↑ 이종남,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천연염색』, 현암사, 2018, 55-75쪽.
- ↑ 이종남,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천연염색』, 현암사, 2018, 76-81쪽.
- ↑ 이종남,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천연염색』, 현암사, 2018, 82-94쪽.
- ↑ 이종남,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천연염색』, 현암사, 2018, 95-101쪽.
- ↑ 이종남,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천연염색』, 현암사, 2018, 102-116쪽.
- ↑ 이종남,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천연염색』, 현암사, 2018, 117쪽.
참고문헌
- 이종남,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천연염색』, 현암사,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