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염색의 역사

DH 교육용 위키
Lee960410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11월 11일 (수) 17:13 판

(비교) ← 이전 판 | 최신판 (비교) | 다음 판 → (비교)
이동: 둘러보기, 검색

삼국시대

고구려 “삼국사기”와 “신당서 동이전 고구려조”에 왕은 오채복(五采服)을 입었고 대신들은 자(紫), 청(靑), 강(絳), 비(緋)색의 관을 쓰고 황(黃)색 가죽신을 신었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는 한반도 중부에 위치하여 신라와 일본에 문화를 전파 그 문화는 우아하고 섬세한 세련미를 지니고 있다. 왕, 신하, 평민의 복식구분이 명확하였는데 왕은 보라색의 넓은 포를 입고 청색의 무늬를 두어 짠 바지를 입었다. 또한 복식의 계급적 구분화가 일찍이 이루어져 의복뿐만 아니라 관모, 대등으로 계급의 차이를 두었다. 신라는 대륙문화를 수입하는데 고구려, 백제보다 늦었지만 독창적 문화를 완성한 나라로서 점차 국력이 강해짐에 따라 복식도 무풍적일 뿐만 아니라 창의적 수식이 풍부했다. 또한 골품이란 신분관념을 확립하여 계급적 사회질서를 세우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삼국 모두 다양한 색상을 통하여 신분을 표현하였으며 의복에 다양한 색상을 이용한 것으로 보아 염색 기술 수준이 높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

통일신라시대 이후 복식을 그대로 수용하여 사용하였는데 중국의 당, 송, 원등의 문화를 다각도로 흡수 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고구려의 후계임을 자처하였다. 한편, 고려사에서 홍화, 자황이라는 식물성 염료의 명칭이 거론되는 것으로 보아 다양한 식물을 이용한 천연염색이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계림지에 “고려는 염색을 잘하는데 홍색과 자색이 더욱 묘하고, 자초 뿌리의 굵은 것은 모란 뿌리만큼 굵고 이것의 즙을 짜서 비단에 물들이면 매우 선명하다”고 하였다. 이를 볼 때 고려의 자초 염색술은 우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황색을 비롯하여 자색, 홍색등 착용해서는 안 되는 금제복식이 많았다. 일반인들은 염색하지 않은 백의를 입는 것이 편하였고, 그것은 관습화 되었다. 우리 민족이 백의를 입는 관습은 우리 민족성이 백의를 선호한다는 설이 있지만, 반면에 염료를 구하기 힘들며 값이 비싸고, 복색에 대한 금제복식이 그 원인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의례용과 관복을 제외한 특수한 것 이외에는 유색복을 거의 입지 않았다. 이것으로 인해 염색 기술이 크게 발달될 수 없었고, 전시대의 염색기술을 계승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 후기의 규합총서를 보면 진홍, 람, 옥색, 초록, 두록, 팥 유청, 목홍, 반물 드리는 법 등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주로 식물성에서 염료를 추출하고, 식물의 잎, 줄기, 꽃, 열매 등에서 추출하였고, 촉염제, 완염제, 발색제로 잿물, 백반, 얼음, 오미자등을 사용했으며, 불순물이 섞이지 않게 단물을 이용하였다.

근대

문양염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