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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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gyung kang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10월 20일 (화) 19:5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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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처용무’는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로써 오방처용무(五方處容舞)라고도 한다. 노래와 춤이 신라시대부터 현재까지 전승되어진 오랜 역사성으로 지니고 있으며, 더 나아가 『악학궤범』, 『조선왕실록』의 기록, 『의궤』의 복식도 및 조선시대 연회도를 통하여 처용무의 방향성, 음양오행 사상, 복식의 구성과 의미를 알아볼 수 있다.

처용무 시대적 배경

‘처용무’는 신라 때 설화인 <처용설화>에서 비롯된 듯하며 처음에는 벽사(辟邪)적 성격이 강한 춤이었으나 고려 때 들어와 불교적 색채가 짙은 궁중무로 이후 조선에는 국가와 군왕의 안녕이나 왕실의 번영을 위한 수단으로, 또는 큰 행사시에 연회의 일환으로 공연되었던 것으로 그 역할이 변경되었던 것이다. ‘처용무’의 ‘처용’의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 처용랑 망해사(望海寺) 조에“그 중 한 아들은 임금을 따라 입경하여 정사를 보좌하였다. 이름을 처용이라 하였고…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며 나갔다.”고 기록되어 ‘처용’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며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는 것에서‘처용무’의 형태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처용무 의미

1).오방 처용무

오방 처용무에 있어서 복식은 음양, 오행 등의 사상을 표면으로 드러내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처용의 오방 복식은 청·홍·황·흑·백의 순서로 음과 양의 조화, 상생과 상극의 등시성(等時性), 상대(相對), 상배(相背)의 공간성, 공간의 이동성 등을 사상적으로 표현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처용무의 구조와 동작은 음양오행에서 비롯되며 이것을 바탕으로 추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로 일자(一字)배열, 좌선회무(左旋回舞), 오방작대(五方作隊)를 들 수 있다. ‘일자배열’은 처용무에서 가장 특징적인 대형으로 처음에 청․홍․황․흑․백 다섯 처용이 일렬로 들어와 무대 중앙에 서서 춤추는 대형을 말한다. 이러한 일자배열은 청․홍․황․흑․백의 공간적 방위로 동․남․중앙․북․서 오방을 의미하며, 동은 봄, 남은 여름, 황은 게절의 중간 또는 사계, 북은 겨울, 서는 가을을 의미하므로 시간적 개념을 나타내기도 한다. 또한 ‘좌선회무’는 좌측으로 돌며 춤추는 것이다. 이는 오행의 법칙 중 상극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데 원래는 오른쪽으로 도는 상생법칙 즉 목=화, 화=토, 토=금, 금=수의 순으로 진행되는 것이 순리이며 우주법칙에 순응하고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좌선회무는 오른쪽이 아닌 왼쪽으로 도는 것으로 이 자연의 질서에 역행하고 있다. 이것은 처용무가 벽사진경(辟邪進慶)의 가면무, 즉, 악귀를 몰아내기 위하여 춘 춤임을 생각해 볼 때 이는 순행인 상생보다는 오히려 지배하고 다스리는 의미의 역행인 상극법칙을 형상화함으로써 악귀를 물리치려 함의 표현인 것이다. ‘오방작대’는 일렬상태에서 홍처용이 춤을 추며 뒤로 물러나 남쪽에 서고, 흑 처용이 춤추며 앞으로 나아가 북에 서고, 청․황․백 처용은 춤추며 제자리에 있으며 오방을 형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황 처용은 공간의 중심축이 되어 흑․청․홍․백 처용과 차례로 대무하지만 흑․청․홍․백 처용은 서로 대무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황 처용이 토(土)의 개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토의 개념은 만물을 생성하는 의미로 황 처용이 오방의 중심에 자리를 잡는 것이다. [1]

처용무 기록

『악학궤범』에서 역시 처용무의 동작 자체보다는 방향성과 이동에 대한 설명이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처용무의 구성은 의식무에 적합한 음양오행론적 의미와 목적성을 지닌다.
공간적 구성에서 처용 5인이 동서남북과 중앙에 위치하는 것은 처용과 역신의 대결을 상극으로 표현한 뒤 다시 상생의 대형으로 풀어내는 논리적인 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며, 벽사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춤의 내용을 춤의 형식 속에 구현해 놓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악학궤범』과 『조선왕실록』의 기록, 『의궤』의 복식도를 통하여 처용무의 방향성, 음양, 오행 등의 사상을 통하여 복식의 구성과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다.

1).악학궤범

2).의궤

3).조선왕실록

시기 기록
태종 14년 12.30 (기해) 제야(除夜) 전일에 구나(驅儺)하는 것은 이것은 본조(本朝)의 옛풍속이나 옛 글에 어그러짐이 있다. 금후로는 제야일(除夜日) 초혼(初昏)에 시행하여
야반(夜半)에 이르러 그치게 하는 것으로 길이 항식(恒式)을 삼고, 이어서 중외(中外)로 하여금 두루 알게 하라.”
세종 7년 12.29 (갑오) 이날 밤에 나례(儺禮)를 올리고, 방포(放炮)하고, 서운관(書雲觀)에서는 구역 의식(驅疫儀式)을 거행하였으며, 전악서(典樂署)에서는 처용무(處容舞)를 올렸다.
세종 25년 1.25 (신사) “이 뒤로 처용무(處容舞)에 기생을 그만두고 남자 재인을 쓰라.”하다.
연산군 3년 12.28 (을미) 이날 밤에 또 삼전(三殿)을 받들고 인양전(仁陽殿)에 납시어 처용무(處容舞)를 구경하는데, 명하여 여러 군(君)과 부마(駙馬)를 불러 입시하게 하였다.
그리고 창우(倡優)들에게 물건을 차등 있게 나누어 주었다.
연산군 5년 3.8 (정묘) “무릇연향(宴享)의 정재(呈才) 때에, 처용무(處容舞)를 재차 추게함이 어떠한지 정승들에게 문의하라.” 하였다.
연산군 10년 12.13 (기사) 처용무(處容舞)는 전대의 유풍(遺風)으로 지금도 마땅히 써야 할것이니, 기녀들에게 가르치고 연습시켜 한결같이 연향 때에 사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연산군 10년 12.30 (갑자) 왕이 명정전(明政殿)에 납시어 나례(儺禮)를 관람하고, 또 처용무를 관람하였다.
연산군 11년 1.1 (정해) 왕이 명정전(明政殿)에서 망궐례(望闕禮)를 행하고 왕대비전(王垈妃殿)에 표리(表裏)를 올리고, 백관(百官)의 하례(賀禮)를 받았으며, 인정전(仁政殿)에
임어(臨御)하여 회례연(會禮宴)을 베풀고, 처용무(處容舞)·무학(舞鶴) 등의 유희(遊戲)를 구경하였다.
연산군 11년 4.7 (임술) 왕이 술에 취하면 기꺼이 처용의를 입고서 처용무를 추며, 또한 스스로 노래하기도 하였다.
연산군 11년 7.21 (갑진) “처용(處容)을 풍두(豊頭)로 고쳐 부르라.”하였다.
연산군 11년 12.4 (갑인) “설[歲時]에는 풍두무(豐頭舞)를 구경하였으니, 광희(廣熙)는 쓰지 말고 흥청에서 키가 늘씬하고 자색이 있으며 호기롭고 건강한 자 30인을 가려서 속히
가르치게 하라.” 하였다.
연산군 12년 1.2 (임오) “열흘마다 풍두무 잘 추는 자를 5인씩 간택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왕이 풍두무를 잘 췄으므로, 매양 궁중에서 스스로 가면(假面)을 쓰고 희롱하고
춤추면서 좋아하였다.
중종 10년 12.22 (갑술) “정조일(正朝日)의 양재처용(禳災處容)은 하지 말라.”
중종 13년4.1 (기사) “아뢴 말이 다 옳다. 처용무(處容舞) 등은 아뢴 말과 같이 없애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옳지 못한 옛 습관이 이것뿐만 아니라 필시 많을것이니 한꺼번에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숙종 40년 9.19 (정사)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진연례(進宴禮)를 거행하였다…(중략) 처용무(處容舞)를 추고 나서 악을 거두었다.
영조 41년 10.11 (계축)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몸소 술잔을 받았다…(중략) 차례로 술잔을 드리고 나자, 음악이 그치고 문무무가 물러났으며, 처용무(處容舞)가 나아가니,
음악이 연주되었다.

4).연회도


<참고문헌>

  1. 이현정(1994) 궁중무용에 나타난 음행오행사상에 관한연구, p.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