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민 동국
개요
학력
- 동국대학교 사학과 재학
- 부산국제고등학교 졸업
- 다선중학교 졸업
경력
- 17/10/10~19/06/18 육군 만기 전역
- 71대 사학과 학생회 문고실장
- 동국대 박물관 근로
좋아하는 것들
- 위쳐 시리즈, 축구, 갖가지 음식
최부/표해록
- 4월 1일
四月初一日,晴,話朝,鴻臚寺主(薄)【簿]16 李翔來謂臣曰:“今日兵部將你事入奏,你可寬心,漂流事,當報禮部,浙江三司直報兵部,不報于禮部,故禮部入奏罪他,兵部亦指揮揚旺二十”云云,且曰:“汝國謝恩使,十日間必到于此,汝可留待同歸可也.”臣曰:“我奔初喪,一日作客,如過三秋,請足下圖我速還,”李翔點頭,自浙江以來不見通事之人,至此方見此人,
맑았습니다. 새벽에 홍려시(鴻爐寺)주부(主簿) 이상(李翔)이 와서 신에게, “오늘 병부에서 당신의 일을 상주(上奏)하려고 하니 마음을 놓으셔도 되겠습니다. 표류에 관한 일은 당연히 예부(禮部)에 보고해야 할 터인데, 절강(浙江) 삼사(三司)가 병부에 직보를 하고 예부에는 보고하지 않았던 까닭에 예부가 그들을 벌주도록 상주하였으며, 병부 또한 지휘 양왕(楊旺)에게 곤장 20대를 쳤습니다”라 운운하였습니다. 또, “당신 나라의 사은사(謝恩使)[1]24가 열흘 안에 반드시 이곳에 도착할 것이니, 당신은 머물러 기다렸다가 함께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나는 초상을 당하여 급히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므로 하루 동안 손 노릇 하는 것이 마치 3년을 보내는 것과 같으니, 청컨대 족하(足下)께서 내가 속히 돌아갈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십시오”라고 하자 이상은 말없이 머리를 끄덕거렸습니다. 절강에서부터 그 후로는 통사(通事)[2]를 만나 보지 못했는데, 이곳에 이르러서야 이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1st Day, Fourth Month. Fair. At dawn Li Hsiang,6 Auditor [Chu-pu] of the Court of State Ceremonial, came and said to me, “Today the Ministry of War will submit your case in a memorial; put your mind at ease. Cases of drifting ought to be reported to the Ministry of Rites, but the Three Authorities of Chekiang reported directly to the Ministry of War and did not report to the Ministry of Rites. The Ministry of Rites, therefore, has put in a memorial charging them with fault. The Ministry of War, moreover, has flogged Commander Yang Wang twenty lashes.” He also said, “An Envoy of Thanksgiving from your country is sure to arrive here within ten days. You can wait here and go back with him.” I said, “For me, going to my first mourning, one day as a traveler is like spending three autumns. Please arrange for my speedy return.” Li Hsiang nodded his head. From Chekiang I had not met an interpreter until I arrived there and met that man.
- 4월 2일
初二日,陰,會同館副使李恕來謂臣等曰:“你四十三人,不保本國差來進責人,一日一人支給,正是陳老米一升而已,無饑”云云,臣步出館門,適遇(傳)【傳】榮,相話于玉河橋邊,臣問曰:“我所經處浙江有通州,北京亦有通州;徐州府有清河縣,廣平府亦有清河縣.一海內州縣有同名者,何耶?”榮曰:“名雖偶同,所管布政司有異,實無害也."
흐렸습니다. 會同官회동관 부사(副使) 이서(李恕)가 와서 신 등에게, “당신들 43인은 본국에서 파견한 조공사절이 아니기 때문에 하루 한 사람에게 묵은 쌀 1승(升)을 지급할 뿐이고 반찬은 없습니다” 라고 운운하였습니다. 신은 걸어서 회동관 문을 나오다가 마침 부영(傅榮)을 만났습니다. 옥하교 가에서 서로 이야기하다가 신이 묻기를, “내가 지나온 곳 가운데 절강에도 통주(通州)가 있고 북경에도 통주가 있으며, 서주부(徐州府)에도 청하현(淸河縣)이 있고 광평부(廣平府)에도 청하현이 있는데, 한 해내(海內)에서 이름이 같은 주현(州縣)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명칭은 비록 우연히 같지만 관할하는 포정사(布政司)가 다르니 실제로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2nd Day. Cloudy. Li Chu, the Assistant Commissioner of the Central Post Hotel, came and said to me, “Since you forty-three men are not tribute-bearers for your own country, the daily ration a man will be only one quart of old rice. There will be no salt or other foods.” I walked out the gate of the house and happened to meet Fu Jung, and we talked at the foot of Jade River Bridge. I said, “Among the places that I have passed, there was a T’ung-chou in Chekiang, and Peking also has a T’ungchou. Hsü-chou Prefecture had a Ch’ing-ho County, and so did Kuang p’ing Prefecture. How is it that among the departments and counties of the · country there are [different] places with the same name?”. Fu Jung said, “Though it happens that their names are the same, the public offices by which they are governed are different, and really no harm is done.”
- 4월 3일
初三日,陰,夕雷電雨霜,李翔來曰:“我實你朝鮮通事也,前一二日,兵部及內庭有事,故不入奏你等事,今日若又不奏,則明日必入奏之”臣答曰:“天下之窮人,莫如我也,父已死,母又老,弟幼弱,家貧變,治喪所需,皆關如也,我又漂流,未報存亡,母與弟豈知我得蒙聖天子鴻恩,生到大國乎?必并治我要,悲慟極天,請足下告于禮部,使我母久留于此.”翔曰:“你之生來事,你國安宰相處良已詳回還,”臣曰:“安宰相何以知之?”曰:“浙江鎮守差指揮楊暢,將你事緣陸路書夜馳報,於三月十二日來到,安公膽寫奏本而去,你家當於四五月之交,必知你不死於海,不足憂也,但你之情理甚切,誠可憐恤,我當告于兵部、禮部,
흐렸으며 저녁에 천둥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렸습니다. 이상이 와서 말하기를, “나는 실은 당신네 조선 통사입니다. 1-2일 전에 병부와 내정(內庭)25에서 일이 있었던 까닭에 당신들에 관한 일을 상주하지 못했는데, 만약 오늘도 상주하지 못하게 된다면 내일은 반드시 상주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천하의 곤궁한 자로서 나만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또한 늙으셨으며, 아우는 어리고 약한데 집은 가난하니, 초상을 치르는 데 필요한 아무것도 없는 형편입니다. 내가 또한 표류하여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리지 못했으니, 어머니와 아우는 어찌 내가 성천자(聖天子)의 큰 은혜를 입어 살아서 대국에 이른 것을 알겠습니까? 반드시 내 초상까지 아울러 치르며 슬픔이 하늘에 닿았을 것입니다. 청컨대 족하께서는 예부에 이 사실을 알려서 내가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이 살아서 온 일은 당신 나라의 안처량 재상이 이미 자세히 알고 돌아갔습니다.”[1] “안 재상께서 어떻게 아셨습니까?” “절강진수(浙江鎭守)가 지휘 양노(楊啓)를 보내어 당신의 일을 육로로 밤낮으로 달려 보고하게 하여 3월 12일에 도착하였으므로, 안공(安公)이 주본(奏本)을 베껴 가지고 갔습니다. 당신의 집에서는 4월 말 5월 초에 반드시 당신이 바다에서 죽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니 근심할 것 없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사정이 매우 절박하여 참으로 가여워 도와줄 만하니 내가 마땅히 병부와 예부에 보고하겠습니다.”
3rd Day. Cloudy; thunder, lightning, rain, and hail in the evening. Li Hsiang came and said, “I am an interpreter for your Korea. For the past one or two days, the Ministry of War and the Palace have had things to do, and the memorial of your case, therefore, was not sent in. If it is not presented today, it will surely be tomorrow." I answered, “Of all the unfortunates in the world, none is so ill-fated as I. My father is dead, my mother is old, my younger brother is delicate, and the family is poor. Everything needed to observe mourning is wanting. I, moreover, have drifted away, and they have not been informed whether I am dead or alive. How are my mother and younger brother to know that I have received great kindness from His Majesty the Emperor and have reached China alive? They must be mourning for me also; they must have boundless grief. Please petition the Ministry of Rites not to keep me here a long time.” Li Hsiang said, “Prime Minister An Ch’-ryang of your country has learned all about your arrival here alive and has turned back for home.” I said, “How did Prime Minister An know about it?” Li Hsiang said, “The Overseer of Chekiang sent Commander Yang Lu speeding night and day by the land route to report your case. He arrived here the 12th Day, Third Month. His Excellency An copied the memorial and left. Between the end of the Fourth and the beginning of the Fifth Month, your family will know that you did not die at sea.? It is not worth grieving over. But the strain on you must be severe; truly I can sympathize with you. I shall make known your anxiety to the Ministries of War and Rites.”
- 4월 4일
初四日,晴,何旺引臣至其家饋誤,臣謝,旺日:“漂流遠來,情可矜憐,故饋之,不必謝也.”
맑았습니다. 하왕이 신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음식을 대접하므로 신이 감사를 표하니 하왕이 말하기를,“멀리서 표류해 와서 사정이 딱하기 때문에 대접하는 것이니, 고마워할 필요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4th Day. Fair. Ho Wang took me to his house and served me food. I thanked him and he said, “You have drifted here from far away; I can pity your condition, and that is why I have served you. There is no need to thank me.”
- 4월 5일
初五日,陰,楊旺來謂臣曰:“奏本,初三日已下禮部”云云
흐렸습니다. 양왕이 와서 신에게, “주본(奏本)은 초3일에 이미 예부로 내려갔습니다”라고 운운하였습니다.
5th Day. Cloudy. Yang Wang came and said to me, “The memorial was sent down to the Ministry of Rites on the 3rd Day.”
- 4월 6일
初六日,晴,琉球國人陳善、蔡賽等,盛辦餅誤來饋臣及從者,臣感其恩,無以報之,即减粮五升以與之,揮手却之,時琉球使正議大夫程鹏等二十五人,以進貢來寓後館,善與賽盖其從者也,禮部遣辦事吏王敏喚楊旺,臣問其何事,敏曰:“你每進的抄出來了,因此來叫.”
맑았습니다. 琉球國유구국의 진선(陳善), 채새(蔡賽) 등이 떡과 음식을 풍성하게 준비해 와서 신과 종자들에게 대접하였습니다. 신은 그 은혜에 감격했으나 보답할 것이 없어 양식 5승을 덜어 그에게 주었더니 손을 내저으며 물리쳤습니다. 이때 유구국 사신인 정의대부(正議大夫) 정붕(程鵬) 등 25인이 공물을 바치는 일로 와서 후관(後館)에 머물러 있었는데, 진선과 채새는 그의 종자였습니다. 예부가 실무를 담당하는 서리 왕민(王敏)을 보내어 양왕을 불렀습니다. 신이 무슨 일인가 물으니 왕민이 말하기를,“당신들에 관하여 올린 주본(奏本)의 초본(抄本)이 나와 이 때문에 부른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6th Day. Fair. Ryukyuans Ch'en Shan and Ts'ai Sai brought a feast of delicacies and served it to me and my staff. I was moved by their kindness but had nothing with which to repay them. I took, therefore, five quarts of rice from our rations and offered it to them, but they waved their hands and refused it. At the time, Ryukyu had sent Ch'eng P’eng,: Doctor of Canonical Law, and twenty-four men to bring tribute. They were lodged in the rear house (houkuan), and Ch'en Shan and Ts'ai Sai were of that staff. The Ministry of Rites sent Wang Min, a clerk, to summon Yang Wang. I asked what it was about, and Min said, “Your memorial has been returned; that is why I have come.”
- 4월 7일
初七日,洒雨,禮部吏鄭春、李從周等,資兵部所移禮部咨來示臣,其文‘據浙江三司所報’云云,其末端云:“其崔溥案,仰浙江布政司差委官指揮僉事楊旺管送,及行沿途衛所,量撥官軍,防護赴京外,開坐具本,該本部官欽奉聖旨該部知道,欽此欽遵,抄出送司案,候間續奉本部运據浙江布政司批差指揮楊旺件送前項夷人前來,查得成化六年十一月內,該浙江鎮守等官奏朝鮮國遭風夷人金盃迴等七名,本部已經奏准,量給禦寒衣服及應付脚力口粮還國去,今該前因案呈到部,看得朝鮮遭風夷人崔溥等四十三名,雖係海洋哨獲夷人,已該浙江鎮守、巡按、三司等官,會同審驗,別無姦細情由,况各夷風波飄蕩,衣粮缺乏,揆之朝廷柔遠大體,相應優恤,合無行移禮部,量給替換衣服,本部應付官崔潭站馬虞給,餘人脚力口粮,通與車輛,裝載行李,及行該府差官一員伴送,沿途軍衛,量撥軍夫防護,至遼東聽鎮巡等官另差通事人員,运朝鮮地界,令其自行回還,緣係處置遭風外夷歸國,及奉欽依該部知道事理,未敢擅便,弘治元年四月初一日,太子太保本部尚書余等具題,次日奉聖旨是,欽此欽導,擬合通行,除外,合開啟前去,煩照本部奏奉欽依內事理,欽遵施行,須至咨者:”臣孝子將米粮換酒,以饋鄭春等,春謂臣曰:“我二人來討些人情面皮,或銅錢,或土布,或諸般產物,以去用耳,意不在一醉也,臣曰:“我當漂海,四體不保,僅能得生,豈有身外之物乎?你看吾行李,若有一物,便將去之,”徐觀其意,意在臣之所穿衣,臣令李楨减糧換錢十文以贈之,李從周不受,撒之臣前,與鄭春盛怒而去,夜,臣偶謂安義、李孝枝等曰:“當在宋時,爾濟州人漂至蘇州界,其船有麻子,如蓮仁大,蘇人得而種之,後年差小,與尋常麻子一般.今爾土有所謂麻子乎?”義曰:“此,古代事也,今則尋常麻子,亦且稀貴,故凡公暖收貢,皆納葛麗199布,無用於國,有害於民,若貢以隨土所產如物,則庶可便矣.
부슬비가 내렸습니다. 예부의 서리 정춘(鄭春), 이종주(李從周) 등이 병부에서 예부로 보낸 자문(咨文)을 가지고 와서 신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글은 절강삼사(浙江三司)의 보고에 의하면 운운했는데 그 끝머리는 아래와 같습니다. “최부의 안(案)은 절강포정사(浙江布政司)가 파견한 위임관인 지휘첨사(指揮僉事) 양왕(楊旺)을 시켜 호송케 하고, 연도의 위소(衛所)에도 공문을 보내어 적절히 관군(官軍)을 차출(差出)하여 경사(京師)로 호송토록 한 것 외에 낱낱이 열거하여 제본(題本)을 갖추어 올렸습니다. 본부관(本部官)이 삼가 성지(聖旨)를 받았는데 해당 부(部)에서 알아서 하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삼가 이를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의안(議案)의 초본(抄本)을 직방청리사(職方淸理司)에 보내고 기다리는 동안 다시 본부(本部)의 명을 받고 절강포정사의 비문(批文)에 의거 파견된 지휘 양왕이 전항(前項)의 이인(夷人)을 호송하여 왔습니다. 조사해보니 성화(成化) 6년(예종1년; 1470) 11월 중에 해당 절강진수(浙江鎭守) 등 관원이 아뢰고 송치해 온 조선국의 풍랑 만난 김배회(金益廻)[1][2]32 등 7명을 본부에서 상주하여 허락을 받은 다음, 방한복을 적절히 지급해 주고, 각력(脚力)과 구량(口糧)을 제공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한 바 있었습니다. 지금 올라온 상기 의안(議案)이 본부에 도착하였는데, 살펴보니 조선의 풍랑 만난 최부 등 43명은 비록 해양에서 정찰 중 체포한 이인(夷人)이기는 하지만, 이미 해당 절강진수, 순안(巡按)과 삼사(三司) 등의 관원이 회동하여 조사해 본 결과, 특별히 간세(姦細)한 사유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물며 각 이인(夷人)이 풍파에 밀려 떠다니느라 의복과 식량이 결핍되어 있는 만큼 조정에서 먼 나라 사람을 회유(懷柔)하는 대의(大義)로 헤아려 보더라도 응당 후하게 구휼해야 하니, 마땅히 예부(禮部)에 이문(移文)을 보내어 갈아입을 옷을 적절히 지급해 주도록 해야 할 일이 아닐까 합니다. 본부에서는 응당 관인(官人) 최부에게 참마(站馬)와 늠급(廩給), 나머지 사람에게 각력(脚力)과 구량(口__)을 지급해 주며 전 구간에 걸쳐 수레를 주어 행장을 싣게 하고, 해당 부(府)37에 이첩하여 관원 한 사람을 차출하여 호송토록 하며 연도(沿途)의 군위(軍衛)에서는 군부(軍夫)를 적절히 차출해서 호송토록 하되, 요동(遼東)에 이르러서는[3] 진수(鎭守)(명대 무관직, 진수 장교에는 5등급이 있다. (조)p.185), 순안(巡按) 등 관원의 지시에 따라 별도로 통사(通事)인원을 차출하여 조선 국경까지 보내주어 그들 스스로 돌아가도록 해야하겠지만, 풍랑 만난 이인(夷人)을 귀국시키는 일이고 또 삼가 해당 부(部)에서 알아서 하라'라는 성지(聖旨)의 사리(事理)를 받들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기에 홍치(弘治) 원년 4월 1일 태자태보(太子太保) 본부상서(本部尙書) 여(余) 등이 제본(題本)을 갖추어 올렸고, 다음날 성지(聖旨)를 받았는데 옳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삼가 이를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응당 그대로 실행해야 하는 외에, 자문(咨文)을 보내오니 번거롭겠지만 본부에서 상주하여 받은 성지(聖旨)의 사리(事理)에 따라 삼가 그대로 시행하시기 바랍니다. 자문을 보냄.” 신은 효자를 시켜 쌀을 술로 바꾸어서 정춘 등에게 주도록 하자 정춘이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 두 사람이 체면을 무릅쓰고 와서 선물을 달라는 것은 동전이든 토포(土布)는 다른 여러 가지 산물(産物)이든 가져다 쓰려고 하는 것이지, 술에 한번 취해보자는 뜻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표류되어 사지도 보전치 못하다가 겨우 살게 되었으니 어찌 몸뚱이 외에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당신이 우리의 행장을 살펴보고 만약 한 가지 물건이라도 있으면 가져가시오.” 천천히 그들의 의중을 살펴보니 신이 입은 옷에 생각이 있는 듯하였습니다. 신은 이정을 시켜서 양식을 덜어 돈 10문(文)을 바꾸어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이종주는 받지 않고서 신의 앞에 내던져 버리고는 정춘과 함께 몹시 성을 내면서 가 버렸습니다. 밤에 신이 우연히 안의· 이효지 등에게 말하기를, “송(宋) 나라 때 너희 제주 사람이 표류되어 蘇州소주에 이르렀는데, 그 배에 크기가 연밥만한 삼씨가 있었다. 소주 사람이 이를 얻어서 심었더니 몇 년 후에는 점점 작아져서 보통 삼씨와 같아졌다. 지금 너희 지방에 이른바 삼씨가 있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안의가 말하기를, 그것은 옛날 일입니다. 지금은 보통 삼씨도 희귀한 까닭에 무릇 공천(公賤)의 공포(貢布)를 거둘 적엔 모두 갈추포(葛덟布)를 바치게 되니, 나라에는 소용이 없고 백성에게는 해만 있습니다. 만약 공물을 지방에서 생산되는 물품에 따라서 해산물 같은 것으로 정한다면 편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7th Day. Showers. Cheng Ch’un and Li Ts’ung-chou, sub-officials [li] of the Ministry of Rites, came with a statement that the Ministry of War had sent to the Ministry of Rites and showed me the text: “According to a report of the Three Authorities of Chekiang ..."9 At the end it said: “In the case of that Ch’oe Pu, we instructed the Chekiang Administration Commissioner to send Assistant Commander Yang Wang on special commission to take charge of the escort and instructed the garrisons and transfer stations on the way to allot officials and troops to guard [the party] on the journey outside the capital, and to hold hearings and prepare reports. "The officials of this Ministry received His Majesty's instructions: 'Let the proper ministry take note. Respect this.' Between the time that we respectfully copied that out and the time that we sent the authorities' decision, this Ministry continuously sent on whatever it received. “According to the endorsement of the Chekiang Administration Commissioner, he has sent Commander Yang Wang to escort forward the aforementioned barbarian. Research has shown that in the Eleventh Month, Ch’eng-hua 6, the said Chekiang Grand Defender and other officials memorialized, [asking] to send forward Kim Maeng-hoe* and six other barbarians of Korea who had encountered winds. The Ministry memorialized and received permission to issue clothing against the cold and appropriate porters and rations and send them back to their country. Now, in the matter stated above, which has been sent to the Ministry, it is our view that though Ch'oe Pu and the forty-two other barbarians from Korea who encountered winds fall into the class of barbarians arrested by maritime patrols, the said Chekiang Grand Defender, Regional Inspector, and Three Authorities have met and judged that they are not spies, especially since the winds and waves have battered them all and they lacked clothes and food. Considering the general policy of the Court of bringing peace to distant areas, it is proper that they be treated with consideration. It is fitting that the matter not be transferred to the Ministry of Rites and that we allot a change of clothing to them. This Ministry will provide post horses and official rations to the official Ch’oe Pu and porters and rations to the other men. They will go with carriages, into which they will load their baggage, passing through the proper prefectures. We shall send one official to escort them to the Korean border and let them return home themselves. Since the case is one of managing the return to their country of foreign barbarians who have encountered winds, and since we have received the notation, ‘Let the proper ministry take note,' we have not ventured to arrange matters on our own initiative alone. “1st Day, Fourth Month, Hung-chih 1. Prepared by Yü, Senior Guardian of the Heir-Apparent and Minister [of War), and others. “On the following day an edict was received by this Ministry, saying 'Respect this; carry it out.' In addition to setting the correct procedure, it is proper that we should refer the matter to your Ministry. Hence this communication.” I order Hyo-ja to barter some rations of rice for wine and offered it to Cheng Ch'un and the other. Cheng Ch’un said to me, “The two of us hoped to receive some gratuity, some cash or cloth or any kind of goods that we can take away to use. We do not intend to get drunk.” I said, “When I was drifting across the sea, my own limbs were not safe. I was barely able to survive; how can I have anything but what is on me? Look at my baggage. If there is a single thing there, feel free to take it away.” When I considered their motives carefully, [I found] that they wanted the clothes I was wearing. I ordered Yi Chong to reduce the rations, exchange some for ten cash, and give them that. Li Ts’ung would not take it; he scattered it in front of me and left with Cheng Ch’un, very angry. At night I happened to be talking with An Ŭi and Yi Hyo-ji: “In the Sung period a man from your Cheju drifted to the shores of Su-chou. In his boat were hemp seeds as big as lotus pods. A man of Su-chou got them and planted them, but in later years they grew small, like ordinary hemp seeds.10 Do you have such hemp seeds in your land now?” An Ủi said, “That is a thing of the past. Now even ordinary hemp seeds are rare. That is why, when both nobles and commoners assemble tribute, they give coarse, arrowroot cloth, which is useless to the country and harmful to the people. If the tribute were governed by what is produced in the land, such as things from the sea, everyone would be benefitted.”
- 4월 8일
初八日,陰,國子監生員楊汝霖、王演、陳道等,戴黑頭巾,穿青團領,來曰:“你國學徒亦服此乎?臣曰:“幼學雖在窮村僻巷者,皆服之,”又曰:“你國亦有專經否?”臣曰:“我 國科學, 取精通經書者, 故學徒精研四 書五經,其專治一經者,不得齒儒者之列.”
흐렸습니다. 국자감생(國子監生) 양여림(楊汝霖)·왕연(王演)·진도(陳道) 등이 흑두건(黑頭巾)을 쓰고 청금3단령(靑__團領)[1]을 입고 와서 말하기를, “당신 나라의 학도(學徒)들도 이 옷을 입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학동(學童)들은 비록 궁벽한 마을에 있다 해도 모두 이 옷을 입습니다.” “당신 나라에서도 경서(經書)만을 전공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나라의 과거는 경서에 정통한 사람을 뽑기 때문에 학도들이 사서(四書)·오경(五經)을 열심히 연구합니다. 한 가지 경서만 전공한 사람은 유자(儒者)의 반열에 낄 수 없습니다.”
8th Day. Cloudy. Yang Ju-lin, Wang Yen, and Ch'en Tao, students of the National University, wearing black hats and blue collars round their throats, came and said, “Do the students in your country also wear these?” I said, “All young students, even though they are in remote villages or secluded lanes, wear them.” They said, “In your country is there also “specialization in Classics’?”. I said, “In the examinations in my country, those versed in the Classics and Books are passed. The students, therefore, study the Four Books and Five Classics thoroughly. Those who have mastered only one Classic do not attain the rank of full-fledged Confucian scholars.”
- 4월 9일
初九日,在玉河館,是日晴,有張元·張凱兄弟家住館前對門,共來墨話.
玉河館옥하관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장원(張元), 장개(張凱) 형제의 집이 옥하관 앞에 문을 마주해 있었는데, 함께 왔기에 맞아들여서 환담하였습니다.
9th Day. At Jade River House. This day was fair. There were two brothers, Chang Yüan and Chang K’ai, whose house was opposite the guest house. They both came and chat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