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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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ma9719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4월 2일 (목) 16:4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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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학력

  • 서울원묵고등학교 졸업
  • 동국대학교 사학과 재학

경력

  • 2017.01.01~2017.12.31 제 72대 동국대학교 사학과 학생회 문화부장
  • 2020.01.01~ 제 75대 동국대학교 사학과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좋아하는 것

  • 역사, 밴드, 음악, 보컬, 게임

최부의 표해록

十六日,到泊于牛頭外洋,是日陰,海色赤黑中全濁,西望連宰疊嶂,撑天包海,意有人煙,駕東風而至,則見山上多有烽燧臺列時,喜復到中國地界,午後,風浪尤緊,雨下漆味,舟從風所驅,瞥然間忽漂至兩島間,傍岸而過,則望見有中船六隻列泊,程保等請於臣曰:“前至下山,不示以官人之儀,以招賊人,幾不免死,今宜從權具冠帶,以示彼船,”臣曰:“爾何以害義之事導我嗽?”保等曰:“當此之時,與死為鄰,何暇治禮義哉?姑當行權,便取生道,然後以禮治喪,不害於義,”臣拒之曰:“釋喪即吉,非孝也,以詐欺人,非信也,寧至於死,不忍處非孝非信之地,吾當順受以正,”安義來請日:“我姑着此冠帶,示若官人然,”臣曰:“非也,彼船若或如前所遇賊,猶之可也,若是好船,必驅我曹訪官府取供辭,將何辭以對?少或不直,彼必生疑,莫如守正之為愈也.”俄而所謂六船,掉圍臣船,一船有人可八九,其衣服語音,亦與下山所遇海賊一般,寫示臣等曰:“看你異類,來從那裏?”臣令程保亦寫以 答曰:“我是朝鮮國朝臣,奉 王事巡海島,奔喪過海,被風而來,不識此海何國地界?”其人答曰:“此海乃牛頭外洋,今隸大唐國台州府臨海縣界也.”程保以手指其口,其人以水桶來遺,又指北有山,曰:“此山有泉,你可取,做飯以吃,你有胡椒,可送我二三兩,”臣答曰:“本國不產胡椒,初不賣來!”其人等遂掉船稍却,圍包臣船,列立下訂,臣船亦依岸而泊,令安義、巨伊山、向理等下舟登山,通望人煙,則果是連陸處,

p.364

臣於此行所歷滄波,雖若一海,水性水色,隨處有異,濟州之海,色深青,性暴急,雖少風,濤上駕濤,激浪濡潤,無甚於此,至黑山島之西猶然,行過四畫夜,海色白,越二書夜愈白.又一畫夜還青,又二畫夜還白,又三畫夜赤而濁,又一畫夜赤黑中全濁,臣之行舟,視風從却,東西南北,萍漂無定,其間所見海色,大鑒如此,自由而還青以後,風力雖,濤不甚高,至還白以後,始有島醫,島皆岩壁,谷咸儡,上載土,有雜卉香草,翁蔚長青.水性悠弱,若不遇大風,則罕見驚波駭浪之患,臣於遇賊復漂之海,亦如濟州之海之險,則豈能復見得島津乎?大抵每歲正月,正當隆寒之極,则風怒號,巨濤震激,乘船者所忌,至二月漸得風和,濟州俗猶號為燃燈節,禁不渡海,且江南潮人,亦不於正月浮海,至四月梅雨既過,颯然清風,海舶初回,謂之舶()()風,臣之漂海,適當風波險惡之時,海天霾哇,日復尤甚,橋帆維權,或折或失,飢渴困苦,動經旬日,一日之間,溺敗之機,非一二度矣,然幸僅保性命,得泊海岸者,非特潰雨雨取汁,以沃焦鹏,舟實牢緻價駛,能壓風濤之故也.

우두(牛頭)[1] [2] [3] [4] 앞 바다에 정박하였습니다.

이 날은 흐리고 바다 빛깔은 검붉었으며 완전히 탁하였습니다.

서쪽으로 바라보니 잇닿아 겹친 산봉우리가 하늘을 버티고 바다를 둘러쌌는데 인가(人家)가 있는 듯하였습니다.

동풍을 타고 이르러, 산 위에 봉수대(峰燈臺)가 죽 늘어서 있는 것을 보니 기쁘게도 다시 중국 땅에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오후에는 풍랑이 더 세고 보슬비가 자욱하게 내리는데, 배는 바람이 모는 방향대로 나아갔습니다.

잠깐 동안에 갑자기 표류하여 두 섬 사이에 이르러 기슭을 옆으로 지나가니, 중선(中船) 6척이 죽 늘어서 정박하고 있는 것이 멀리 보였습니다.

정보 등이 신에게 청하기를,“전일 하산(下山)에 이르렀을 때엔 벼슬아치의 위의(威儀)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해적을 불러들여 거의 죽을 뻔하였습니다. 지금은 마땅히 권도(權道)를 따라 관대(冠帶)를 갖춰서 저들의 배에 보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너는 어찌 의리에 어긋나는 일로 나를 이끄는가?” 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죽음이 임박했는데, 어느 겨를에 예의를 차리겠습니까? 일단 권도를 행하여 살길을 찾은 뒤에 예로써 상사(喪事)를 치르더라도 의리에 어긋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은 이를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상복(喪服)을 벗고 길복(吉服)을 입는 것은 효(孝)가 아니고[5], 거짓으로 남을 속이는 것은 신(信)이 아니다. 차라리 죽음에 이를지언정, 효(孝)와 신(信)이 아닌 일은 차마 할 수가 없으니, 나는 마땅히 정당한 운명으로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안의가 와서 청하기를, “제가 일단 이 관대를 착용하여 관인(官人)처럼 보이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안 된다. 저 배가 혹시 전에 만났던 해적과 같다면 그래도 괜찮겠지만, 만약 좋은 사람의 배라면 반드시 우리들을 관부(官府)로 데려가 공술서를 받을 것인데, 너는 장차 무슨 말로 답변하겠는가? 조금이라도 정직하지 못하면 저들은 반드시 의심을 하게 될 것이다. 정도(正道)를 지키는 것만 못하다.”

조금 후에 앞서 말한 6척의 배가 와서 신의 배를 둘러쌌는데 한 배에 8-9인이 있었고, 그들의 의복과 말소리는 또한 하산에서 만났던 해적과 같았습니다.

글을 써서 신 등에게 보이기를,“보아하니 그대들은 다른 나라 사람 같은데 어디에서 왔소?”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정보를 시켜 또한 글을 써서 대답하기를, “나는 조선국 조신(朝臣)으로 왕명을 받아 해도(海島)를 순찰하였소. 부친상을 당하여 급히 돌아가면서 바다를 건너다가 바람을 만나 이곳에 왔소. 이 바다가 어느 나라의 땅인지 모르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이 바다가 바로 우두 앞바다로서, 지금의 대당국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에 속해 있소”라고 하였습니다. 정보가 손으로 자기 입을 가리켰습니다. 그 사람이 물통을 가져와서 주고, 또 북쪽 산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 산에 샘물이 있으니 당신들은 물을 길어 밥을 지어먹을 수 있소. 당신들에게 후추[6][7]가 있으면 우리에게 두세 냥 정도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서는 후추[8]가 산출되지 않아 애초부터 가지고 오지 않았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마침내 노를 저어 조금 물러나 신의 배를 포위하여 죽 늘어서 닻을 내리므로, 신의 배도 또한 언덕을 의지하여 정박하였습니다. 안의, 거이산, 상리 등으로 하여금 배에서 내려 산에 올라 인가를 둘러보게 했더니, 과연 이곳은 육지와 잇닿은 곳이었습니다.

신이 이번에 지나온 바닷물은 비록 동일한 바다지만 물살과 빛깔은 곳에 따라 달랐습니다.

제주도 바다는 빛깔이 짙푸르고, 파도가 사납고 급하여 비록 바람이 조금만 일어도 파도 위에 파도가 덮쳐, 휘돌며 솟구치고 물살이 빠르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었습니다.

흑산도 서쪽에 이르러서도 여전하였습니다. 나흘 밤낮을 가니 바다 빛깔이 희었고, 이틀 밤낮을 가니 더욱 희었습니다.

또 하루 밤낮을 가니 빛깔이 도로 푸르렀고, 또 이틀 밤낮을 가니 도로 희었다가, 다시 사흘 밤낮을 가니 붉으면서 탁하더니, 또 하루 밤낮을 가니 검붉으며 온통 탁하였습니다.

신의 배는 바람을 따라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서기도 하면서, 동, 서, 남, 북으로 부평초처럼 표류하여 정처가 없었으니, 그동안에 본 바다 빛깔은 대개 이와 같았습니다.

빛깔이 흰 데서부터 푸른 데로 되돌아온 이후 바람의 힘은 비록 세지만, 물결은 그다지 높지 않았습니다.

빛깔이 푸른 데서 흰 데로 다시 되돌아온 다음에야 비로소 섬이 나타났는데, 섬은 모두 층암절벽에 우뚝 솟은 바위더미로 위에는 흙을 이고 있어 잡초와 향초가 무성하게 푸르렀습니다.

물살은 느리고 약하므로 만약 큰바람만 만나지 않는다면 거센 물결로 인한 재난은 드뭅니다. 신이 해적을 만나 다시 표류하게 된 바다가 또한 제주 바다처럼 험했다면 어찌 다시 섬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무릇 매년 정월은 바로 한창 추울 때로서 매서운 바람이 거세게 불고 큰 물결이 진동하여 부딪치게 되니, 배를 타는 사람들이 꺼리는 때입니다.

2월에 가서야 점차로 바람이 잦아들지만, 제주 풍속은 오히려 연등절(燃燈__)[9]이라 하여 바다를 건너지 못하게 합니다. 또 강남의 조주(潮州)[10][11][12][13] 사람들도 정월에는 바다에 나가지 않습니다. 4월에 이르러 매우(梅雨)[14]09가 지나가고 난 뒤 시원한 청풍(淸風)이 불면 바다를 다니는 큰 배들이 돌아오니, 이를 '박초풍(舶連風)'이라 부릅니다.

신이 표류할 적은 마침 풍랑이 사나울 때로서 바다날씨는 나날이 흐려졌고, 돛과 밧줄과 노가 부러지거나 잃어버렸습니다.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고통받은 것이 열흘이었으며, 하루에도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겨우 목숨을 보전하여 해안에 배를 댈 수 있었던 것은 다만 빗물에 옷을 적셔 물을 짜내 타는 창자를 적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배가 견고하고 빨라 능히 풍랑을 이겨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건-중국: 정박 지리-중국: 바다, 바다 빛깔은 검붉었으며 완전히 탁하였습니다, 서쪽으로 바라보니 잇닿아 겹친 산봉우리, 동풍, 풍랑이 더 세고, 이곳은 육지와 잇닿은 곳, 물살과 빛깔은 곳에 따라 달랐습니다, 나흘 밤낮을 가니 바다 빛깔이 희었고, 이틀 밤낮을 가니 더욱 희었습니다. 또 하루 밤낮을 가니 빛깔이 도로 푸르렀고, 또 이틀 밤낮을 가니 도로 희었다가, 다시 사흘 밤낮을 가니 붉으면서 탁하더니, 또 하루 밤낮을 가니 검붉으며 온통 탁하였습니다, 빛깔이 푸른 데서 흰 데로 다시 되돌아온 다음에야 비로소 섬이 나타났는데, 지명-중국: 우두, 중국, 대당국 태주부 임해현(臨海縣), 기후: 이 날은 흐리고, 보슬비가 자욱하게 내리는데 풍경: 인가(人家)가 있는 듯, 산 위에 봉수대(峰燈臺)가 죽 늘어서, 섬은 모두 층암절벽에 우뚝 솟은 바위더미로 위에는 흙을 이고 있어 잡초와 향초가 무성하게 푸르렀습니다, 비유: 인가(人家)가 있는 듯 시간: 오후, 풍랑이 사나울 때 건축물: 봉수대 제도(교통): 중선(中船) 6척 기물-중국: 물통, 노, 닻 식물-중국: 후추 지명-중국: 강남의 조주 풍습-중국: 강남의 조주 사람들도 정월에는 바다에 나가지 않습니다

모화: 기쁘게도 다시 중국 땅에 도착 심리(최부): 안심 인명-조선: 정보, 안의, 거이산, 상리 사회-조선: 벼슬아치의 위의(威儀) 유학-조선: 권도(權道), 제도(관복)-조선: 관대(冠帶) 리더십-조선: 너는 어찌 의리에 어긋나는 일로 나를 이끄는가?, 우리들을 관부(官府)로 데려가 공술서를 받을 것인데, 너는 장차 무슨 말로 답변하겠는가? 조금이라도 정직하지 못하면 저들은 반드시 의심을 하게 될 것이다. 정도(正道)를 지키는 것만 못하다, 유학-조선: 차라리 죽음에 이를지언정, 효(孝)와 신(信)이 아닌 일은 차마 할 수가 없으니 행정-조선: 공술서, 왕명을 받아 해도(海島)를 순찰하였소 지명-조선: 조선국 제도(관직)-조선: 조신(朝臣) 사건-조선: 부친상, 표류 식물-조선: 후추 지리-조선: 제주도 바다는 빛깔이 짙푸르고, 파도가 사납고 급하여 비록 바람이 조금만 일어도 파도 위에 파도가 덮쳐, 휘돌며 솟구치고 물살이 빠르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었습니다. 흑산도 서쪽에 이르러서도 여전하였습니다. 나흘 밤낮을 가니 바다 빛깔이 희었고, 이틀 밤낮을 가니 더욱 희었습니다. 또 하루 밤낮을 가니 빛깔이 도로 푸르렀고, 또 이틀 밤낮을 가니 도로 희었다가, 다시 사흘 밤낮을 가니 붉으면서 탁하더니, 또 하루 밤낮을 가니 검붉으며 온통 탁하였습니다. 빛깔이 흰 데서부터 푸른 데로 되돌아온 이후 바람의 힘은 비록 세지만, 물결은 그다지 높지 않았습니다, 바다가 또한 제주 바다처럼 험했다면 어찌 다시 섬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매우(梅雨), 청풍(淸風), 박초풍(舶連風) 비유-조선,중국: 배는 바람을 따라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서기도 하면서, 동, 서, 남, 북으로 부평초처럼 표류하여 정처가 없었으니 기물-조선: (강한) 배 시간: 정월, 2월, 4월, 풍랑이 사나울 때, 풍습-조선: 연등절

16th Day. Arrival and Mooring at Niu-t'ou-wai-yang. This day was cloudy. The sea was red and black and thoroughly muddy.

To the west we saw rows of peaks, range behind range, reaching up to the sky and cradling the sea. They gave an impression of people living there. When we rode in on the east wind, we saw that on top of the mountains there were many beacon towers in a line along the peaks. We were overjoyed to have reached the shores of China again. After noon, the wind and waves were exceedingly rough. Rain fell in a drizzle, and it was dark. The boat being driven by the wind, in the twinkling of an eye, we drifted between two islands. As we passed by a shore, we saw that there were six boats moored in a row. Chòng Po and others made a request of me, saying, “Previously, when we reached Hsia-shan, you did not display the signs of an official, and we attracted pirates. We barely escaped dying. Now you should follow the exception to the rule. Put on your cap and sash and show them to those boats.” I said, “How dare you suggest to me a thing harmful to morals?” Chòng Po said, “This moment we are close to death. What time is there to observe propriety and morality? For the time being, practice the exceptions so that we can survive; later observe your mourning with propriety. That is not harmful to morals.” I disagreed with him. I said, “To take off mourning clothes and put on festive ones goes against filial piety. To take advantage of men by deceit goes against sincerity. I would rather die than oppose filial piety and sincerity. I must conform to what is right.” An Ui came and made a request, saying, “For the time being, let me wear this cap and gown and appear to be an official.” I said. “No. If those boats are of the type in which we met the pirates before, something like that would be all right. If they are loyal boats, they will surely drive us on to a public office to take a deposition. What statement would you make then? If there was the slightest discrepancy, it would give rise to suspicion. It is better to observe the strictest honesty.” Suddenly the six boats rowed up and encircled my boat. There were about eight or nine men in each boat, and their clothing and speech were of the kind of the pirates we had met at Hsia-shan. They wrote and showed us a note that said, “We see you are foreigners. Where do you come from?” I ordered Chòng Po likewise to write and answer them. We said, “I am a minister of the Court of Korea. I had undertaken to tour an island in the King's service and was hurrying across the sea into mourning when I was blown here by a wind. I do not know this sea or what country this land belongs to.” The men answered, “This sea is Niu-t’ou-wai-yang. It is now part of the land of Lin-hai County, T'ai-chou Prefecture, China.”[15] Chòng Po pointed to his mouth. The men brought buckets of water and gave them to us and then pointed to the north, where there were mountains, and said, “Those mountains have springs, where you can draw water and cook a meal to eat. If you have black pepper, give us two or three ounces.”[16]

I answered, “My country does not produce black pepper. I did not start out with any." The men then rowed their boats off a little, surrounded my boat, and dropped anchor. My boat, too, drew near the shore and moored. I ordered An Ŭi, Kõisan, and Sang-ni to disembark and climb a mountain. They looked round for human settlement. This was, indeed, a place joined to the mainland. XXX26 Though the vast expanse of water through which I had passed on this voyage seemed to be a single sea, the current and color of the water differed according to the place. In the sea of Cheju, the color was deep green and the current violent and swift. Though the wind was slight, wave climbed over wave, boiling and swirling. There was nothing to equal it. It was like that as far as west of Hŭksan Island. When we had gone four days and nights, the color of the sea was white. In two more days and nights it became whiter, and in another day and night it was green again. In two more days and nights it was white again. Three days and nights after that it was red and muddy. One more day and night and it was red and black mixed with mud.

In sailing the boat we simply followed the wind, north, south, east, or west, drifting aimlessly. The colors of the sea that I saw in that time were generally as above, going from white back to green.

Though the force of the wind was strong, the waves were not very high. There were first islands from the time that the sea became white again. The islands were all precipitous, with cavernous valleys and masses of stones. On the tops lay earth, and there was a variety of plants and fragrant grasses, luxuriously green and vigorous. The current was very weak. When we did not meet high winds, we had little trouble with violent waves. If the sea in which I met the pirates and was set adrift again had been as perilous as the Cheju sea, we could never have sighted islands again. XXX XXX In general, the First Month of every year being the middle of winter, violent winds rage, and enormous seas run. That is the season that travellers avoid. With the Second Month, the winds gradually grow calmer. In Cheju it is popularly called the Festival of Lights.27 But even then it is forbidden to cross the sea. Men in the bays of Kangnam28 do not sail the sea in the First Month either. After the rainy season of the Fourth Month has passed, the winds suddenly become steady, and ocean junks begin to cross. They are called the junk-driving winds.

I drifted to sea in the season of dangerous wind and waves. The sea and sky were darkened by violent storms for days on end. The masts, sails, lines, and oars were either broken or lost. We spent ten days at a time suffering from hunger and thirst, and more than once or twice a day we came close to sinking. But fortunately we were just able to survive and moor on a seashore. That was not only because we collected rain water that had soaked us to wet our parched insides but also because the boat was truly sound and nimble and could withstand the wind and waves. XXX

1월 17일

十七日, 捨舟登陸, 是日雨, 遲明, 所謂六船擁來, 語臣等曰:“看你也是好人,隨我可行,你有奇物,送些與我:”臣答曰:“漂流已久,所賣之物,盡撒海中,若指我生路,所乘船楫,皆焦的所有.”因問人居遠近,其一人曰:“此地也,近官,你要去不妨,一人曰:“過前一里,便有人家,一人曰:“此處人家便遠,不可止此,”臣又問官路遠近,其一人曰:“台州府距此一百八十里,” 一人曰:“一百五十里,一人曰:“二百四十里,”其語端彼此有違,不可信也.

其人等相率鬧擾,爭入臣船,目前寓雖些小物,無不壤歌,謂臣等曰:“不同我去,我當作怒,安義請舍船,乘其人船,隨其所去,李植欲擊殺一人以却之,臣曰:“爾等之計皆非也,觀彼人其言不實,劫奪又甚,情偽淺深,未可知也,彼若昔者下山海賊之類,則從安義之計而從歸,則彼必掉至絕島,沈殺我等,以減其跡,彼若或漁船若防禦之船,則從李慎之計而擊殺,則彼必掩其所為,反以我為異國人來劫殺人云爾,則大國之邊境騷然,我為戚,語且不通,難以辨明,必皆為邊將所戮,爾等之計,皆自取死途也,莫若權辭以 觀其勢,”臣謂其人曰:“我浮海日多,飢渴困德之極,危命僅一線耳,請做飯療飢,然後同行.”其人等復曰:“你少留緩行”即掉舟少却,可二三里許,復環臣船而泊,以兩故皆入船倉中,無觀望者,臣謂同舟人曰:“看彼人言語動止,也甚荒唐,看此山已連陸路,必通人居,不於此時善處,則我等之命,懸其掌握,終必為海曲之鬼,”遂率陪吏等先下船,諸軍人接踵而下,冒雨穿林,逃遁奔匿,過二嶺,領皆枕海,有石如甬道,行六七里,得一里社,臣謂陪史軍人等日:“同此生死之苦,無異骨肉之親,自此相保,則可以全身而還,汝等若遇患難則同救之,得一飯則分吃之,有疾病則相扶持之,無一人亡失可也.”皆曰:“唯命.”又曰:“我國本禮義之國,雖漂奔窘遠之間,亦當示以威儀,使此地人知我國禮節如是,凡所到處,陪吏等拜跪於我,軍人等拜跪於陪史,無有過差,且或於里前,或於城中,有墓聚來觀者,必作揖禮,無

p.366 敢肆突.”皆曰:“唯命.”至其里,則里中人老少男女爭怪臣等,觀者如墙,臣與從者而辑,皆合袖鞠躬以答之,臣即告以來自朝鮮之故,有二人,其容貌該非庸人,謂臣等:“你是朝鮮國人,緣何入我國界?你若是賊人,若是進貢之人,若是被風無定之人,逐一寫來,遞送還國.”臣曰:“我本朝鮮國臣,奉王命往海島,奔父喪過海,遭風風見漂,得到海岸,舍舟緣陸,望尋人煙而來,乞諸大人,聞于官府,以活垂死之命,”即以所費印信、冠帶、文書示之,其二人覽畢,指臣前鎮撫、陪吏等以次羅跪,末端軍人等亦以次俯 伏,謂臣曰:“聞貴國禮義邦久矣,果所聞,”即叫家僮,將米漿茶酒以體偏及軍人,任其所飲,指里前佛堂,曰:“你可住此堂安歇.”臣至佛堂,解濕衣以風,未幾,其二人又做飯來饋,果皆忠厚人也,而亡其職姓名,俄而其二人來言:“你可起身,送你好處,” 臣問曰:“好處幾里?”其二人謊辭曰:“還有二里,”曰:“其地名何?”曰:“西里堂也”曰:“雨甚路濤,時又向晚,奈何?” 曰:“去處不遠,不須憂矣.”臣從其言,率從者登途而行,則里中人或帶杖劍,或擊鋅鼓,前途有聞鋅鼓之聲者,羣聚如雲,叫號虞突,夾左右擁前後而驅,次次遞送,前里如是,後里又如是,行過五十餘里,夜已央矣,

배를 버려두고 상륙하였습니다.

이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날이 샐 녘에 앞서 말한 6척의 배가 빙 둘러싸고 와서 신 등에게 말하기를, “보아하니 당신들은 좋은 사람들 같소. 우리를 따라 오시오.

당신들에게 진기(珍奇)한 물건[1][2]이 있으면 조금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바다에 표류한 지 이미 오래라, 가졌던 물건은 모두 바다에 버렸소. 만약 우리의 살길을 가르쳐 준다면 타고 온 배와 노는 모두 당신들에게 주겠소”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마을과의 거리를 물으니, 그중의 한 사람이 말하기를, “이곳은 관부(官府)에 가까우니 당신들이 갈 수도 있소”라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앞으로 1리[3]만 가면 곧 인가가 있소”라 하고, 한 사람은 “여기는 인가와 먼 곳이니,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오”라 하였습니다.

신이 또 관청과의 거리를 물으니, 그중 한 사람은 "태주부(台州府)는 이곳에서 180리나 떨어졌소”라 하고, 한 사람은 150리오.”라 하고, 한 사람은 “240리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말이 서로 어긋나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시끄럽게 떠들면서 신의 배에 다투어 들어와, 눈에 보이는 것은 비록 보잘것없는 물건일지라도 모두 빼앗았습니다.

신 등에게 말하기를,“우리와 같이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화를 내고 말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안의는 배를 버려두고 그들의 배에 타고 따라 가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정은 그중 한 사람을 쳐 죽여서 그들을 물리치자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너희들의 계책은 모두 옳지 않다. 살펴보건대 저들은 그 말이 성실하지 못하고 물건을 겁탈하는 것 또한 심하니,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다. 저들이 전일의 하산의 해적과 같은 부류라면, 안의의 계책대로 저들을 따라 가는 경우 저들은 반드시 노를 저어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이르러 우리를 물에 빠뜨려 죽이고는 흔적을 없애버릴 것이다. 저들이 어선(漁船)이나 방어선(防禦船)이라면, 이정의 계책에 따라 쳐 죽이는 경우 저들은 반드시 자신들이 한 짓은 숨기고 도리어 우리 이국인(異國人)이 와서 약탈을 하고 사람을 죽였다 할 것이니, 그렇다면 대국(大國)의 변경이 시끄러워지는 결과가 된다. 우리를 도적으로 무고하는데 말도 통하지 않아 해명하기가 어렵게 되면 반드시 모두가 변장(邊將)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너희들의 계책은 모두 스스로 죽을 길을 취하는 것이니, 임시변통의 말을 하여 그 형세를 살펴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조) 길이 아니면 가지 마라. 조선선비의 정도, 학문하는 이유=격몽요결[4]

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바다에 떠다닌 지 오래고, 굶주리고 목말라 피곤함이 극도에 이르러, 위태한 목숨은 겨우 한 오라기 실과 같소. 청컨대 밥을 지어먹어 시장기를 면하고 난 후에 같이 가도록 하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시 말하기를, “당신들은 조금 머물렀다가 천천히 가도록 하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즉시 노를 저어 2-3리가량 조금 물러가더니 다시 신의 배를 둘러싸고 정박하였습니다.

비 때문에 모두 선창(船__)속에 들어갔으므로 망을 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신은 같이 배를 탄 사람에게 말하기를, “보아하니 저 사람들의 말과 거동이 매우 황당하다. 이 산을 살펴보면 육로에 잇닿아 있으니 반드시 인가에 통할 것이므로, 이때에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면 우리들의 목숨은 저들의 손에 달려 있어, 끝내는 반드시 바다 한 모퉁이의 귀신이 되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배리(陪吏) 등을 거느리고 먼저 배에서 내리고, 여러 군인들도 잇달아 내려 비를 무릅쓰고 숲 사이를 뚫고 도망해 숨어 들어갔습니다.

두 고개를 넘었는데, 고개는 모두 바다에 잇닿아 있으며 길 양쪽으로 돌담을 쌓아 놓았습니다.

6-7리를 가니 한 마을이 있었습니다.

신은 배리와 군인들에게 말하기를,“이처럼 생사의 괴로움을 함께 하니 골육과 다름이 없다. 이제부터 서로 보호한다면 몸을 온전히 하여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이 만약 재난을 당한다면 함께 구조하고 한 그릇의 밥을 얻으면 나누어 먹고, 질병이 있으면 함께 돌보아 한 사람의 목숨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우리나라는 본래 예의의 나라[5][6]이니 비록 표류하고 도망하여 급박한 가운데 놓이더라도, 또한 마땅히 위의(威儀)를 보여 이 땅의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예절이 이 같은 것임을 알도록 해야 한다. 이르는 곳마다 배리들은 나에게 엎드려 절하고 꿇어앉고, 군인들은 배리에게 엎드려 절하고 꿇어앉아 틀림이 없도록 하라. 또 마을 앞에서나 성(城) 안에서나 떼 지어 와서 구경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반드시 읍하는 예의를 차리고 감히 방자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 마을에 이르니 마을 안의 남녀노소가 다투어 신 등을 괴이하게 여겨, 구경꾼이 담처럼 둘러 서 있었습니다.

신은 종자(從者)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 읍하니 모두 소매를 모아 몸을 굽혀 답례[7]하였습니다.

신은 즉시 조선에서 온 연유를 알렸습니다.

용모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두 사람이 신 등에게 말하기를,“당신들이 조선국 사람이라면 어떤 사연으로 우리나라 국경을 넘어 들어오게 되었소? 당신들이 해적인지 진공(進貢)하는 사람인지, 혹은 바람을 만나 정처 없이 표류해 온 사람인지, 낱낱이 써 내면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게 될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본디 조선국 신하로 왕명을 받들어 해도(海島)에 갔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급히 돌아가던 중, 바다를 건너다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해안에 도착하여 배를 버려두고 육지를 따라 인가를 바라보고 찾아 왔으니, 원컨대 대인(大人)[8]들께서는 관부(官府)에 알려 다 죽어 가는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곧 가지고 온 인신(印信)·관대(冠帶)· 문서(文書)를 그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다 보고 나서, 신의 앞에 진무(鎭撫), 배리 등이 차례로 늘어 꿇어앉고, 말단 군인들도 차례로 부복한 것을 가리키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귀국이 예의의 나라임을 들은 지 오래였는데 과연 듣던 바와 같구려” 라고 하였습니다.

곧 가동(家童)[9]을 불러 미음[10]과 다주(茶酒)를 가져다 접대케 하는데, 군인들에게까지도 두루 마시게 하였습니다.

미음=米漿미장 마을 앞의 불당(佛堂)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당신들은 이 불당에 머물러 편히 쉬도록 하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불당에 이르러 젖은 옷을 벗어서 바람을 쏘였습니다.

얼마 후에 그 두 사람은 또 밥을 지어 와 접대했는데 과연 모두 충후(忠厚)한 사람이었지만 그들의 관직과 성명은 잊어버렸습니다.

조금 후에 그 두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떠나야만 하겠습니다. 당신들을 좋은 곳으로 보내 드리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곳이 몇 리나 됩니까?”

그 두 사람은 속여서 말하기를, “2리쯤 더 가면 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지명은 무엇입니까?”

“서리당(西里堂)입니다.”

“비가 많이 오고 길이 진흙길인 데다 해가 또 저물어 가는데 어찌하겠습니까?”

“가는 곳이 멀지 않으니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신은 그 말에 따라 종자(從者)들을 거느리고 길을 떠나니, 마을 사람들이 몽둥이와 칼을 집어 들고 징과 북을 치기도 하였습니다.

앞길에서 그 징과 북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서, 소란스럽게 큰 소리를 지르면서 사방에서 밀려들어 차례로 교대하며 호송하였습니다.

앞마을에서도 뒷마을에서도 다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50여 리를 지나니 밤이 벌써 깊었습니다.

사건: 상륙, 약탈, 도망 기후: 비가 내렸습니다, 비가 많이 오고, 시간: 날이 샐 녘, 해가 또 저물어, 밤이 벌써 깊었습니다 제도(교통)-중국: 6척의 배 지명-중국: 태주부(台州府),서리당(西里堂) 지리-중국: 두 고개를 넘었는데, 고개는 모두 바다에 잇닿아 있으며, 6-7리를 가니 한 마을이 있었습니다, 50여 리를 지나니 풍경-중국: 길 양쪽으로 돌담을 쌓아 놓았습니다, 길이 진흙길 사회-중국: 마을 안의 남녀노소가 다투어 신 등을 괴이하게 여겨, 구경꾼이 담처럼 둘러 서 있었습니다, 해적, 진공하는 사람, 표류해 온 사람, 비유-중국: 마을 안의 남녀노소가 다투어 신 등을 괴이하게 여겨, 구경꾼이 담처럼 둘러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서 유학-중국: 나아가 읍하니 모두 소매를 모아 몸을 굽혀 답례 풍습(음식)-중국: 미음, 다주, 밥 의전-중국 인물-중국 심리-중국: 감동(귀국이 예의의 나라임을 들은 지 오래였는데 과연 듣던 바와 같구려), 속임, 기물-중국: 몽둥이와 칼을 집어 들고 징과 북, 행정-중국: 교대하며 호송하였습니다

심리(최부): 의심 인명-조선: 안의, 이정 모화: 대국 리더십-조선: 너희들의 계책은 모두 스스로 죽을 길을 취하는 것이니, 임시변통의 말을 하여 그 형세를 살펴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 보아하니 저 사람들의 말과 거동이 매우 황당하다. 이 산을 살펴보면 육로에 잇닿아 있으니 반드시 인가에 통할 것이므로, 이때에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면 우리들의 목숨은 저들의 손에 달려 있어, 끝내는 반드시 바다 한 모퉁이의 귀신이 되고 말 것이다, 이처럼 생사의 괴로움을 함께 하니 골육과 다름이 없다. 이제부터 서로 보호한다면 몸을 온전히 하여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이 만약 재난을 당한다면 함께 구조하고 한 그릇의 밥을 얻으면 나누어 먹고, 질병이 있으면 함께 돌보아 한 사람의 목숨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본래 예의의 나라이니 비록 표류하고 도망하여 급박한 가운데 놓이더라도, 또한 마땅히 위의(威儀)를 보여 이 땅의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예절이 이 같은 것임을 알도록 해야 한다. 이르는 곳마다 배리들은 나에게 엎드려 절하고 꿇어앉고, 군인들은 배리에게 엎드려 절하고 꿇어앉아 틀림이 없도록 하라. 또 마을 앞에서나 성(城) 안에서나 떼 지어 와서 구경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반드시 읍하는 예의를 차리고 감히 방자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유학-조선: 골육, 위의(威儀), 예절, 예의, 나아가 읍하니 모두 소매를 모아 몸을 굽혀 답례, 왕명, 진무(鎭撫), 배리 등이 차례로 늘어 꿇어앉고, 말단 군인들도 차례로 부복한 것, 귀국이 예의의 나라임을 들은 지 오래였는데 과연 듣던 바와 같구려, 지명-조선: 조선 제도(관직)-조선: 신하, 진무(鎭撫), 배리, 군인 기물-조선: 인신(印信)·관대(冠帶)· 문서(文書) 지리-조선: 해도 17th Day. Leaving the Boat and Landing. This day it rained. At dawn the six boats came crowding round. They addressed us: “You are law-abiding men, we see. Come with us; if you have rare things, give us a few.” I answered, “We have drifted a long time. All the things we had have been scattered in the sea. If you show me the way to rescue, the boat and oars by which we sailed are all yours as they are.” Then I asked how far we were from the nearest settlement. One of the men said, “This place is near a public office. If you want to go there, it is no trouble.” Another man said, “If you go ahead one li there is a settlement.” Another said, “Even though a settlement is far from here, you must not stop here.” Then I asked whether the public road was far. One of the men said, “T'ai-chou Prefecture is 180 li from here.” Another said, “150 li.” Another said, “240 li.” There were contradictions among them, and they could not be trusted. The men, jostling and shoving one after the next, fought to come into my boat. Whatever their eyes fell on, though small, worthless things, they seized. They said to us, “If you do not go with us, we shall be angry.” An Ŭi asked me, “Leave the boat, get into their boat, and go where they go.” Yi Chồng wanted to attack one man and kill him, to drive them away. I said, “Neither of your plans will do. It seems to me that since what they say is untrue and since they have been robbing us greedily, it is impossible to tell how honest they are. If they are of the type of the previous ones, the Hsia-shan pirates, and we follow An Ui's plan and go with them, they will row to a remote island and drown us to cover their tracks. If they are fishing boats or defense boats and we follow Yi Chong's plan and attack and kill [a man], they will cover up what they have done and instead will make us out to be foreigners who have come to plunder and kill men. Then there will be an uproar along the coast of China and we shall be falsely accused of being pirates. Our language, moreover, is different, so that it will be hard for us to argue our case. We shall all be executed by the coast guards. By either of your plans, we should bring death upon ourselves. For the time being, it is best to refuse and see what their attitude is.” I said to the men, “We have sailed on the sea for many days. In extremities of hunger, thirst, and suffering, our lives hung by a thread. Please let us make a meal to satisfy our hunger, and after that we shall go with you.” The men replied, “Stay here a little and do not go.” They rowed their boats off a bit and about two or three li away encircled my boat again and anchored. Because of the rain they all went into the cabins of the boats. No one was looking out. I said to the men in the boat with me, “I see that the speech and actions of those men are untrustworthy. I see that this mountain joins a way to the mainland: it must lead to a settlement. If we do not make the best of this moment, our lives will lie in their grasp, and eventually we shall be ghosts in the briny deep.” I then led the secondary officials off the boat first, and the troops followed in our footsteps. We fled hiding into the rain and woods. We crossed two ridges that overlooked the sea. There were rocks like those of a walled road. When we had gone six or seven li, we reached a village. I said to the secondary officials and the troops, “You share with me this mortal suffering;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us. If we defend each other from now on, we can return home safe and sound. If, when you meet troubles you overcome them together, when you get a meal you divide it to eat, when there is sickness you support each other, we can manage without losing a single man.” They all said, “As you command.” I said, “Our country is a country of propriety and morality. Though we are in flight and distressed, we ought still to show a dignified bearing and let the people of this land know that the formality of our country is as it is. Whereever we go, the secondary officials should bow to me, and the troops should bow to the secondary officials. There should be no skipping over ranks. When, moreover, crowds come and look at us in front of villages or in walled towns, we must bow with hands folded and not venture to be too abrupt.” They all said. “As you command.” When we came to the village, the people, young and old, male and female, all marveled at us. The onlookers were like a wall. I and my staff advanced and folded our hands in greeting. They all brought their sleeves together and bowed in answer. Then I informed them about how we had come from Korea. There were two men whose appearance showed that they were not common. They said to us, “If you are Koreans, why did you enter our country? Write it all out for us, whether you are pirates, or bringers of tribute, or men displaced by a wind. We shall send you back to your country.” I said, “I am a minister of Korea. I received the King's command and went to an island. Hurrying into mourning for my father, I was crossing the sea and met a wind. I was blown adrift and came to a sea coast. I left the boat, went ashore, and, seeking human settlement, came here. I beg you gentlemen to inform the public office of this and save us from impending death.” Then I showed them the seal, cap, sash, and documents that I had. When the two men had finished looking at them, they pointed to the Security Officer and secondary officials in front of me, who were prostrated in order of rank. [The two men) said to me, “We have long heard that your country is a land of protocol and morality. This indeed proves what we have heard.” Then they summoned house servants and had rice water, tea, and wine brought to us all, including the troops. They let us drink and then pointed to a Buddhist temple in front of the village. They said, “You may stay in that temple and rest.” I went to the temple, took off my damp clothes, and aired them. Soon the two men had more food prepared, brought, and served to us. They were truly worthy men, but I have forgotten their names and positions. Suddenly, the two men came and said, “You must get up. We shall send you to a good place.” I asked, “How many li away is this good place?” They lied and said, “It is two li more.” I said, “What is the name of the place?” They said, “Hsi-li-t'ang." I said, “It is raining hard, and the road is muddy, and, too, it is toward evening. How can we go now?” They said, “The place where you are going is not far. You must not worry.” I did as they said. As I set out at the head of my staff, some of the people of the village took up staves and swords and some beat gongs and drums. I heard the sound of gongs and drums on the road ahead, [and when we advanced that far] people gathered round like clouds and shouted at us threateningly. They pressed in on our left and right, crowded before and behind us, and drove us on. They passed us on successively, each new village like the previous one. When we had gone more than fifty li, the night was already well advanced.

1월 18일

十八日,遇千戶許清於路上,是日大雨,子半,臣等因為里人所驅,路經一高阜,松竹成數,遇有自稱隱儒姓王名乙源者,憐臣冒夜衝雨,艱楚被驅,止里人少住,問臣所從來,臣亦告以漂風之故,乙源爛然,即呼酒勸臣,臣曰:“我朝鮮人守親喪,不飲酒食肉茹董及甘旨之味,以終三年,蒙饋酒,感恩則已深矣,然我今當要,敢辭,乙源遂饋臣以茶,體從者以酒,因問曰:“你國亦有佛否?”答曰:“我國不崇佛法,專尚儒術,家家皆以孝悌忠信為業,乙源握臣手眷顧相別,其里人驅臣等至一大嶺,臣足如蘭,不能前進,里人擁抱臣臂,前引後推而過,又遞至二十餘里,其里中有大橋,里人皆揮偶枚亂擊臣等,肆劫奪大甚,吳山者負臣馬鞍,有一人毆擊壤去,臣等被枚前驅,顛仆哭泣,過二嶺,見遞他里,向曙,問其有大橋之里,則人曰:“仙岩里也.”自登陸以來,道傍觀者,皆揮臂指頭,作斬頭之狀以示,臣等莫知其意,行至蒲室里,雨少止,有官人率軍史而來,問臣曰:“你是何國人?怎麼到此?”臣曰:“我乃朝鮮國人,再登文科, 為國王近臣,奉事巡海島,奔喪出陸,遭風漂到于此,飢渴萬死之餘,僅續殘命,復為里人所驅,辛苦萬端之極,得遇宫人於此,是我得生之時也.”其官人即先饋臣以粥,隨以飯具,又令臣從者做飯以吃,臣間官人姓名職事,有王适者曰:“此乃海門衛千戶許清也,守塘頭寨,聞倭犯界,專為捕獲而來,汝其慎之,臣困欧路周四肢莫舉,許清謂臣曰:“我大唐法度嚴切,你別處人,不可久在此亂為攪擾良民,”令軍史等疾驅臣等,行五里許有官廨,乃唐頭塞也,過一長堤,可十餘里,雨復大作,臣跛行蹣跚,(專)(全)未動脚,中途僵仆,曰:“我之筋力竭矣,將及於死,早知若此,莫如死於海上之為便,”程保以下,亦對臣痛哭,被軍吏甚督,莫能少留,李楨、孝枝、尚理、玄山等身實者,相遞負臣以行,過二嶺,幾至三十餘里,有人居甚繁盛,前有佛宇,天將暮,雨不止,故許清欲留臣等于佛宇以經夜,其里人皆以謂不可,許清謂臣曰:“此方人皆疑你為劫財,故不許留,你雖艱步,不可不行!”令軍史驅臣等,過一大嶺,夜二更,至一川邊,

p.368 ________________

李楨等亦力盡,身且不保,不克負臣,從者等亦皆疲贏不能行,許清親執臣手以,臣之兩足梗塞,不運一步,高福大怒,指臣曰:“此漢此漢,無乃病狂嗽?汝若艱苦,宜委四肢,莫之能起可也.”臣辱其言,自以謂:我寧至死,宜死於此地,復臥不起,從者率皆顯队狼藉,許清軍吏或督或歐,而不得驅焉,良久,又有一官人領兵擁炬而至,甲胄、鎗劍、彭排之盛,嗩吶、喀曬、喇叭、鋅鼓、銳痛之聲,卒然重,拔劍使鎗,以試擊刺之狀,臣等驚駭耳目,喪魂飛魄,罔知所為,官人與許清整軍威驅臣等,可三四里,有大屋舍,以城郭,如關防然,問之則乃於賣場見桃知所,或云批驗所也,城中又有安性寺,止臣等于寺,許留宿焉,臣問其官人為誰,則有僧云:“此乃桃渚所千戶也,聞倭人犯境,領器械以備于此,因許千戶之報,率兵往驅你難以來,然未知你心真詐,明日到桃渚所,將訊汝.”

천호(千戶)114 허청(許淸)을 노상에서 만났습니다.

이 날은 큰 비가 내렸습니다.

한밤중에 신 등이 마을 사람들에게 쫓겨서 어떤 높은 언덕을 지나니 소나무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은사(隱土)를 자칭하는 성은 왕(王), 이름은 을원(乙源)이란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신이 밤에 비를 맞으며 고생스럽게 마을 사람에게 내몰려 온 것을 불쌍히 여겨, 마을 사람을 제지시켜 조금 멈추게 하고는 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습니다.

신은 풍랑에 표류된 사연을 고하였습니다.

을원은 가엾게 여기고 곧 술을 가져다 신에게 권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우리 조선 사람은 친상을 당하면 술과 고기, 훈채(董菜) 및 맛있는 음식을 들지 않고 삼년상을 마치게 됩니다. 술을 내려주시니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지만 저는 지금 상중(喪中)이므로 감히 사양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을원은 마침내 신에게는 차를 대접하고, 종자들에게는 술을 대접하고는 이어서 묻기를,“당신 나라에도 불법(佛法)이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불법은 숭상하지 않고 오로지 유술(儒術)만 숭상하므로, 집집마다 모두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을원은 신의 손을 잡고 뒤돌아보면서 작별하였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이 신 등을 몰아 큰 고개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발이 누에고치처럼 퉁퉁 부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신의 팔을 당겨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지나갔습니다.

또 여러 곳을 거쳐서 20여 리를 갔습니다.

그 마을에는 큰 다리가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모두 각진 몽둥이를 휘둘러 신 등을 마구 치면서 함부로 겁탈함이 너무 심하였습니다.

오산이란 자는 신의 말안장을 짊어지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오산을 때리고 빼앗아 갔습니다.

신 등은 몽둥이에 얻어맞으며 앞으로 내몰렸고 넘어져 소리를 내어 울고 말았습니다.

두 고개를 지나서 다른 마을로 체송(遞送)되니, 새벽녘이 되었습니다.

큰 다리가 있었던 마을의 이름을 물었더니,“선암리(仙岩里)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육지에 오른 이후 길가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두 신 등에게 팔을 휘두르고 목을 가리키며 머리를 베는 시늉을 지어 보였으나 그 의미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가다가 포봉리(蒲峯里)에 이르니 비가 조금 그쳤습니다.

관인(官人)이 군리(軍史)를 거느리고 와서 신에게 묻기를,

“너희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떻게 이곳에 도착하였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곧 조선국 사람으로 두 번 문과(文科)에 올라18 국왕(國王)의 근신(近臣)이 되었는데, 국사에 관한 명령을 받들고 해도를 순찰하던 중 친상을 당하여 육지로 나오다가 바람을 만나 표류해서 이곳에 도착하였습니다. 기갈로 사경을 헤매던 나머지 잔명(殘命)을 겨우 이어오다가 다시 마을 사람들에게 쫓기어 천신만고 끝에 관인을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살길을 찾은 듯합니다.”

그 관인은 곧 신에게 먼저 죽을 주었고, 이어 밥 지을 그릇을 주어 신의 종자들에게도 밥을 지어서 먹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관인의 성명과 직업을 물으니 왕괄(王适)이란 자가 말하기를,

“이 분은 곧 해문위9 천호(海門衛千戶) 허청(許淸)인데, 당두채(塘頭寨)를 지키다가 왜적(倭賊)이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잡기 위해 왔으니 당신들은 조심해야 하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피곤하여 길가에 드러누워 사지를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허청이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 대당(大唐)의 법도는 엄격하니, 당신들 딴 지방 사람들은 이곳에 오래 머물러 양민들을 어지럽게 해서는 안 되오!"라고 하였습니다.

군리(軍吏) 등에게 신 등을 빨리 내몰게 하였습니다. 5리가량을 가니 관해(官__)120가 있었는데 바로 당두채였습니다.

긴 제방 하나를 지나게 되었는데 길이는 10여 리쯤 되었습니다.

비가 다시 쏟아졌습니다.

신은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걷다가 전연 다리를 움직일 수 없어 중도에서 넘어지면서 말하기를, “나의 근력이 다하였으니 곧 죽겠구나. 이럴 줄 일찍 알았더라면 바다 위에서 죽는 편이 나았을 텐데”라고 하였습니다.

정보 이하가 신을 마주하고 통곡하였습니다.

그러나 군리들이 심히 독촉하므로 조금도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이정, 효지, 상리, 현산 등 몸이 튼튼한 자들이 번갈아 신을 업고 갔습니다.

두 고개를 지나서 거의 30여 리를 가니, 인가가 매우 많고 그 앞에는 불사(佛寺)가 있었습니다.

날은 저물어 가는데 비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허청은 신 등을 불사에 머물러서 하룻밤을 지내게 하려고 하였으나, 그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허청이 신에게 말하기를, “이 지방 사람들이 모두 당신들을 해적으로 의심하는 까닭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군요. 당신이 비록 걷기가 힘들더라도 가지 않을 수 없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군리를 시켜 신 등을 몰아 큰 고개 하나를 넘게 하였습니다.

밤 2경에 어느 한 냇가에 이르자 이정 등도 또한 힘이 다하여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였으니 신을 업고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종자들 또한 모두 피곤하여 걷지 못하였습니다.

허청이 몸소 신의 손을 잡아 일으켰으나, 신의 두 다리가 절룩거려 한 걸음도 옮겨 놓을 수 없었습니다.

고이복이 크게 성을 내며 신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사람아! 이 사람아! 미쳐버린 것이겠지! 당신이 그렇게 힘들다면 사지를 뻗어버리고 일어서지도 못해야 할 것 아니겠나?”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에 굴욕을 느끼고, '내가 차라리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면 마땅히 여기서 죽으리라' 하고 다시 드러누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종자들도 모두 쓰러져 여기저기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허청이 군리들을 시켜 독려하기도 하고 구타하기도 했지만 몰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한참 후에 또 한 관인이 횃불을 든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렀습니다.

갑옷, 창검, 방패의 위세와 쇄납(瑣吶)(태평소의 일종)122[1], 발라(__)123, 나팔, 징, 북, 총통(銃痛)의 소리와 함께 갑자기 겹겹 둘러싸더니, 칼을 빼고 창을 써서 치고 찌르는 동작을 해 보였습니다.

신 등은 눈과 귀가 몹시 놀라 넋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관인은 허청과 함께 군사의 위용(威容)을 정돈하고 나서 신 등을 몰았습니다.

3-4리쯤 가니, 큰 옥사(屋舍)가 있고, 성곽이 빙 둘러서 관방(關防)124과 같기에 물었더니,

곧 두독장(杜瀆場)125으로 현재 도지소(桃知所) 도조서126 라고도 하고 비험소(批驗所)라고도 하였습니다.

성안에 안성사(安性寺)란 절도 있었는데, 신 등을 절에 머물러 유숙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은 그 관인이 누구인가 물으니,

어떤 중이 말하기를,“이 분은 곧 도저소천호(桃者所千戶)요. 왜인이 국경을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기를 가지고서 여기에서 대비하고 있었는데, 허천호(許千戶)의 보고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당신들을 몰고 온 것이오.

그러나 아직 당신 마음이 진실된지 거짓인지를 알지 못하므로 내일 도저소에 이르면 당신들을 심문할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사건: 쫓김(마을 사람들이 신의 팔을 당겨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지나갔습니다, 각진 몽둥이를 휘둘러, 때리고 빼앗아 갔습니다, 몽둥이에 얻어맞으며 앞으로 내몰렸고 넘어져 소리를 내어 울고 말았습니다, 신 등에게 팔을 휘두르고 목을 가리키며 머리를 베는 시늉, 마을 사람들에게 쫓기어, 군리를 시켜 신 등을 몰아, 큰 고개 하나를 넘게 하였습니다, 구타하기도 했지만, 한 관인이 횃불을 든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렀습니다, 신 등을 몰았습니다) 제도(관직): 천호, 관인(官人), 군리(軍史), 도저소천호(桃者所千戶) 인명: 허청, 성은 왕(王), 이름은 을원(乙源)이란 사람, 왕괄(王适) 기후: 큰 비, 비가 조금 그쳤습니다 시간: 한밤중, 새벽녘, 날은 저물어 가는데, 밤 2시 식물: 어떤 높은 언덕을 지나니 소나무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지리: 어떤 높은 언덕을 지나니 소나무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여러 곳을 거쳐서 20여 리를 갔습니다, 두 고개를 지나서 다른 마을로, 두 고개를 지나서 거의 30여 리를 가니, 큰 고개 하나를 넘게 하였습니다, 냇가, 3-4리쯤 가니 풍경: 어떤 높은 언덕을 지나니 소나무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심리: 동정(을원은 가엾게 여기고 곧 술을 가져다 신에게 권하였습니다, 허청이 몸소 신의 손을 잡아 일으켰으나) 의전: 술을 가져다 신에게 권하였습니다, 신에게는 차를 대접하고, 종자들에게는 술을 대접하고는, 신에게 먼저 죽을 주었고 풍습(음식)-중국: 술, 차 토목: 큰 다리, 긴 제방 하나를 지나게 되었는데 길이는 10여 리쯤 되었습니다 행정: 체송(遞送), 대당의 법도는 엄격하니, 지명: 선암리, 포봉리(蒲峯里), 해문위, 대당(大唐), 두독장(杜瀆場)=도지소(桃知所)=도조서=비험소(批驗所) 기물: 밥지을 그릇, 갑옷, 창검, 방패, 쇄납(瑣吶), 발라, 나팔, 징, 북, 총통(銃痛) 건축물: 당두채(塘頭寨) 사회: 왜적, 사람들이 모두 당신들을 해적으로 의심하는 까닭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군요, 왜인이 국경을 침범했다는 소식 제도(관직): 군리 기후: 비가 다시 쏟아졌습니다, 비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풍경: 인가가 매우 많고 불교: 불사, 안성사

사건-조선: 친상을 당하여, 표류 사회-조선: 우리 조선 사람은 친상을 당하면 술과 고기, 훈채(董菜) 및 맛있는 음식을 들지 않고 삼년상을 마치게 됩니다. 술을 내려주시니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지만 저는 지금 상중(喪中)이므로 감히 사양하겠습니다, 풍습(음식)-조선: 우리 조선 사람은 친상을 당하면 술과 고기, 훈채(董菜) 및 맛있는 음식을 들지 않고 삼년상을 마치게 됩니다. 술을 내려주시니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지만 저는 지금 상중(喪中)이므로 감히 사양하겠습니다 유학-조선:우리 조선 사람은 친상을 당하면 술과 고기, 훈채(董菜) 및 맛있는 음식을 들지 않고 삼년상을 마치게 됩니다. 술을 내려주시니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지만 저는 지금 상중(喪中)이므로 감히 사양하겠습니다 사회-조선: 우리나라는 불법은 숭상하지 않고 오로지 유술(儒術)만 숭상하므로, 집집마다 모두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번갈아 신을 업고 갔습니다, 유학-조선:우리나라는 불법은 숭상하지 않고 오로지 유술(儒術)만 숭상하므로, 집집마다 모두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국사에 관한 명령을 받들고 비유-조선: 발이 누에고치처럼 퉁퉁 부어, 인명-조선: 오산, 정보, 이정, 효지, 상리, 현산 기물-조선: 말안장 제도(시험)-조선: 두 번 문과(文科)에 올라, 행정-조선: 해도를 순찰하던 중 제도(관직)-조선:국왕(國王)의 근신(近臣)이 되었는데, 심리(최부): 좌절, 허탈(바다 위에서 죽는 편이 나았을 텐데), 굴욕, 놀람(몹시 놀라 넋을 잃고) 심리(고이복): 분노, 놀람(몹시 놀라 넋을 잃고)

18th Day. An Encounter with Chiliarch Hsü Ch’ing on the Road. This day it rained hard.

By midnight, then, as we were driven on by villagers, the road passed over a high hill, where pines and bamboo grew thickly. We met a man, named Wang I-yüan, who described himself as a recluse scholar. He pitied us for braving the night and the rain and being driven on painfully. He stopped the villagers briefly and asked me what had happened, and I informed him, too, of the circumstances of our being blown adrift by the wind. I-yüan grieved for me; he called for wine and urged it on me. I said, “When we Koreans observe mourning for parents, we do not drink wine or eat meat, garlic, oniony plants, or sweet things for fully three years. I am deeply grateful for your kindness in offering me wine, but I am in mourning now, and I venture to decline.” l-yuan then served me tea and my staff wine. He asked, “Does your country have the Buddha, too?” I answered, “My country does not revere the Buddhist law, it honors only the Confucian system. All its families make filial piety, fraternal duty, loyalty, and sincerity their concern.” I-yüan took my hands and looked at me compassionately, and we parted. The villagers drove us on, and we came to a large mountain range. My feet were swollen like cocoons, and I could not go forward. The villagers seized my arms, pulled me from in front, pushed me from behind, and over we went. We were passed on for over twenty li [and came to another village, where] there was a big bridge. The villagers, who struck us indiscriminately with crooked sticks, were recklessly cruel and plundered greedily. O San was carrying my horse saddle, but a man beat him off, seized it, and took it away. Beaten forward with sticks, we fell down and wept. We crossed two ranges and were turned over to another village. It was approaching dawn. When I asked what the vilļage with the big bridge had been, a man said, “Hsien-yen Village.” Ever since we had landed, all the onlookers by the road had sawed their arms across their throats, making gestures at us as if to cut off their heads, and we did not know what they meant. We reached P’u-fêng Village. The rain let up a little. An official came with military officers and asked me, “What is your nationality? How did you come here?” I said, “I am a Korean. I have placed in the examinations twice and am a minister close to the King of the country. I had been given the state duty of touring an island, but hurrying into mourning, I put out from land, encountered a wind, and drifted here. Through hunger and thirst enough for dying many times, I have barely clung to life. I have been repeatedly driven on by villagers. In this extremity of suffering, I am fortunate enough to meet an official here, making it the moment of my rescue.” The official first served me congee and then solid food. He also ordered my staff to prepare food and eat. When I asked the official's name and position, one Wang Kua said, “He is Hsü Ch’ing, Chiliarch [Ch’ien-hu] of Hai-men Garrison [Wei].29 He defends T’ang-t’ou Stockade; having heard that Japanese were raiding the coast, he came specifically to take them prisoner. Take care.” I lay down exhausted at the side of the road; my four limbs would not move. Hsü Ch’ing said to me, “The laws of China are strict. You strangers may not stay here long upsetting the law-abiding people.” He ordered military officers to drive us on quickly. When we had gone about five li, there was a public office, which was T’ang-t’ou Stockade. We passed a long embankment, somewhat over ten li long. Rain fell heavily again.

I hobbled along, crippled, moving my legs hardly at all. I fell in the road and said, “My strength is gone, I am going to die. If I had known earlier that it was to be like this, it would have been easier to die at sea.” Chòng Po and those below him wept bitterly for me again. We were urged on by the military officers and could not delay a moment. Yi Chong, Hyo-ji, Sang-ni and Hyon San, men with sound bodies, took turns carrying me along.

We crossed two ranges, and when we had gone almost thirty li, there were many houses, in front of which was a Buddhist temple. Since it was about to get dark and the rain did not stop, Hsü Ch’ing wanted to put us up in the temple. All the villagers felt that could not be permitted. Hsü Ch’ing said to me, “All the people here suspect that you are bandits and, therefore, will not let you be put up. Though it is hard for you to walk, we have no choice but to go on.” He ordered the military officers to drive us on.

We crossed a large range and in the second watch of the night came to the bank of a river. Yi Chong and the others had also exhausted their strength and could not take care of themselves, nor could they carry me. My whole staff, too, were weary and wasted and could not go on. Hsü Ch’ing himself took my hands and raised me. Both my feet were swollen and lame, and I could not move them a step. Ko I-hok was enraged. He pointed at me and said, “These Chinese! They must be mad! If you are really at the end of your strength, you had better just drop and not get up.” I agreed with what he said. I would rather die, I felt, and it was just as well to die here, so I lay down again and did not get up. Most of the rest fell down helter-skelter. Hsü Ch’ing ordered the officers to urge some of us on and strike at others, but they could not make us move. After some time, another official came with soldiers carrying torches. They were impressive with their armor and helmets, their spears, swords, and shields. Their gongs, drums, and firearms30 made a tumult. Without warning they surrounded us, drawing their swords and handling their spears in motions as if to practice attacking and cutting. The shock to our eyes and ears terrified us, and we did not know what to do.

The official and Hsü Ch'ing drew their forces up in formation and drove us on. In about three or four li, there was a big house, surrounded by a wall like a fortified pass. I asked about it. It was Yü-tu-ch’ang, the present T'ao-chih Chiliad;31 some said it was P’i-yen Chiliad.32 Inside the wall was An-hsing Temple. They stopped us at the temple and let us stay there for the night. When I asked who the official was, a priest said, “He is the Chiliarch of T’aochu Chiliad. He heard that Japanese were raiding the borders and had weapons brought here and set up. Then, receiving Chiliarch Hsü’s report, he led soldiers out to drive you on and bring you here. But he does not know yet whether you are honest or dishonest. Tomorrow you will reach T’ao-chu Chiliad, and he will question you.”

1월 19일

十九日,到桃渚所,是日大雨,兩千戶並馬驅臣等,冒雨以行,臣令程保告許清曰:“我等漂海,浮沈飢渴,臨死復甦,僅保餘喘,得到貴境,得遇官人,得飽昨朝之飯,以為得再生之地,乃於霖溪之雨,寧療之途,颠坑仆谷,撥石衝泥,體凍脚微,心焦力盡,昨夕不得食,今早又不得食,又驅出冒大雨而行,我其殆將半途而斃矣.”許清復曰:“昨因你走不到官司,自取飲,今若便到,則官自供給,速去速去”臣運步不得,仆路喂,四體委地不收,孝子、程保、金重、莫金、萬山、巨伊山等,環坐痛哭,適有牽牛而過者,程保 告諸千戶曰:“請解衣買此牛,以騎我員,”許清曰:“我亦豈不憐你難受此苦乎?緣拘國法,未得護汝耳,”李楨、孝枝、尚理等,又相代負臣過一嶺,可二十餘里,至一城,乃海門衛之桃渚所,行將近城七八里間,軍卒帶甲束乾號桶彭排夾道填街,至其城,則城有重門,門有鐵局,城上列建警成之樓,城中市店聯絡,人物繁富,引臣等至一公館許留焉,臣之形容枯,冠服塗泥,觀者絕倒,有姓名王碧者寫謂臣曰:“昨日已報上司,倭船十四隻,犯邊劫人,你果是倭乎?”臣曰:“我非倭,乃朝鮮國文士也.”又有姓名盧夫容者,自种措大,謂臣曰:“車同軌,書同文,獨你語音,不同中國,何也?”臣答曰: “千里不同風,百里不同俗,足下怪聽我言,我亦怪聽足下之言,習俗然也,然同得天所賦之性,則我之性,亦堯舜孔顏之性,豈嫌於語音之有異哉?”其人撫掌,曰:“你奔喪,可行朱文公《家禮》乎?”臣答曰:“我國人守喪,皆一遊《家禮》,我當從之,但為風所逆,今不得哭于柩前,所以痛哭.”其人又 問曰:“你作詩否?”臣答曰:“詩詞乃輕薄子嘲弄風月之資,非學道篤實君子所為也,我以格致誠正為學,不用意學夫詩詞也,若或有人先倡,不得不和耳.”又有一人寫臣掌上日:“看你也不是(反)(59人,只以言語不同,實同肯吃,誠可憐也,我告你一言,你其記之,善自處,慎勿輕與人言,自古倭賊____我邊境,故國家設備倭都指揮、備倭把總官以備之,若獲倭則皆先斬後聞,今你初繫舟處,轄獅子寒之地,守塞官汝為倭,欲獻截圖功,故先報云:“倭船十四隻,犯邊劫人,將領兵往捕汝汝之時,你輩先自捨,投入人多之里,故不得逞其謀矣,明日把總官來訊你輩,你其詳辨之,少有違

p.370 誤,事在不測云云,問其姓名,則曰:“我所以言之者,愛汝也,危之也.”掉頭而去,臣聞其言,毛髮豎立,即語程保等,保等曰:“路人指我等為斬伐之狀者,皆惑此謀故耳”日夕,千戶等官員七八人,置一大享,環立卓邊,引程保於前,問曰:“你一起一十四隻船,實否?”保對曰:“否,但一隻而已.”揮程保以出,又引臣問曰:“你眾所駕原船幾隻?”臣曰:“只一隻耳.”問曰:“我邊上瞭見倭船一十四隻,同泊處海洋,我因寺案官之報,已報于上司大人,你船十三隻,置之何地?”臣曰:“我之到海岸時,有貴人等乘船六隻,同泊一海,若要究六船人,則我之船數可知矣.”問曰:“你倭人,登劫此處,何也?”臣曰:“我乃朝鮮人也,與倭語音有異,衣冠殊制,以此可辨.”問日:“倭之神於為盜者,或有變服,似若朝鮮人者,安知你非其倭乎?”臣曰:“觀我行止舉動,證我印牌、冠帶、文書,則可辨情傷,”千戶等即令臣拿印信等物來以質之,因問曰:“你無乃以倭劫朝鮮人,得此物乎?”臣曰:“若少有 疑我之心,姑令送我北京,與朝鮮通事員一話,情實立見.”問曰:“你姓何名 誰?何州縣人?何職官?因何事幹到我邊境?開寫情狀,母敢謊虛,我其申報上司:”臣曰:“姓崔名溥,住朝鮮國全羅道羅州城中,再登文科,签仕朝著者有年,去丁未秋九月,奉國王命往濟州等處海島,今閏正月初三日,父喪,顛倒還家,遭風漂海,得到于此,”曰:“你父名何?職何?死在何地?”臣曰:“父名澤,格進士試,以養親不仕,閔孝服僅四載,又死于羅州.”供畢後,館臣于別館,以供臣及從者,我國人為公為私往來濟州,或遭風無去處者,不可枚悉,終能生還者,十百僅一二,是豈盡沈於海波乎?其漂入島夷若暹羅、占城之國者,無復望還,雖或漂至中國之界,亦為邊人所誤,以倭賊,折敵受賞,則誰能辨其情乎?如臣等者,若不先自下陸,若無印牌之信,__復免於禍哉? 我國家若依中朝制,凡百官給號牌、錫牌,篆書職姓名以異之,奉使臣無大小給節鉞,以王命,抑又沿海住人,雖以私商過海者,皆給號牌,書某國某州縣某姓名某形某年甲以別之,又置通事一員於濟州,凡奉使臣及三邑守合往還,常川帶行,以圖後慮, 然後庶可免於患,

도저소[1][2][3][4][5][6][7][8][9][10]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큰비가 내렸습니다.

천호(千戶) 두 사람이 말을 나란히 타고 신 등을 몰아 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났습니다.

신은 정보를 시켜 허청에게 알리기를,

“우리들은 바다에 표류하여, 풍랑과 기갈로 죽을 뻔했다가 다시 살아나 겨우 잔명을 보전하여 귀국의 땅에 도착하게 되어 관인을 만나 어제 아침에 밥을 배부르게 먹고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맛비와 진흙길에서 구덩이에 엎어지고 골짜기에 넘어지며 돌에 긁히고 진흙에 빠져, 몸은 얼고 발은 이지러졌으며 가슴이 타고 힘은 다 빠졌습니다. 어제 저녁에도 밥을 먹지 못했고, 오늘 아침에도 밥을 먹지 못했는데, 또 몰아내어 큰비를 무릅쓰고 떠나게 하니 우리는 아마 도중에 죽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허청이 대답하기를, “어제는 당신들이 관사(官司)[11]에 도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굶주림을 자초한 것이오. 이제 관사에 도착하는 대로 바로 관에서 지급할 것이니 빨리 빨리 갑시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걸음을 옮기려고 해도 되지 않아서 길모퉁이에 넘어져서 땅바닥에 사지를 뻗어버렸습니다.

효자, 정보, 김중, 막금, 만산, 거이산 등이 빙 둘러앉아서 통곡하였습니다.

때마침 소를 끌고 지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정보가 천호에게 고하기를, "이 소를 타는 값으로 옷을 벗어줄 테니 우리 관원을 태우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허청이 말하기를, “난들 어찌 당신들이 이런 고통을 받는 것을 불쌍히 여기지 않겠는가? 나라의 법에 걸리기 때문에 당신들을 감싸줄 수 없을 뿐일세”라고 하였습니다.

이정, 효지, 상리 등이 또 번갈아 신을 업고 고개를 하나 넘어 20여 리쯤 지나 한 성(城)에 이르니, 바로 해문위(海門衛)의 도저소였습니다.

성에 이르기 7-8리 앞에서부터 갑옷을 입고 창칼과 총통이나 방패를 든 군졸들이 길거리 양 옆을 꽉 메웠습니다.

그 성에 이르니, 성에는 겹문이 있고 문에는 쇠빗장이 있었으며, 성 위에는 경수루(警成樓)가 죽 늘어 있고 성안에는 상점이 서로 잇닿아 사람들과 물건이 많고 풍부하였는데, 신 등을 이끌어 한 공관(公館)128에 이르러 유숙케 하였습니다.

신의 얼굴은 바싹 마르고 관(冠)과 옷에 진흙이 묻어 구경꾼들이 몹시 웃어댔습니다.

왕벽(王碧)이란 자가 글을 써서 신에게 보이기를,“어제 이미 상사(上司)에게 왜선(倭船) 14척이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했다고 보고했는데, 당신은 정말 왜인이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왜인이 아니라 곧 조선국 문사(文士)요.”

또 노부용(虛夫容)이란 자가 자칭 가난한 선비라고 하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수레는 바퀴가 같고 글은 문자(文字)가 같은데129, 유독 당신들의 말소리가 중국과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천리에 풍속이 같지 않고, 백리에 습속이 같지 않은 것이오.130 족하(足下)는 내 말을 괴이하게 듣고, 나 또한 족하의 말을 괴이하게 듣는 것은 습속이 그러하기 때문이오. 그러나 하늘이 준 성품을 같이 얻었으니 나의 성품 또한 요(堯)132 · 순(舜)133 · 공자(孔子)134 · 안회(顔回)135의 성품인데, 어찌 말소리가 다름을 의심하겠소?”

그 사람은 손뼉을 치며 말하기를, “당신은 분상(奔喪)을 할 때 주문공(朱文公)의 《가례》를 따르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을 당했을 땐 모두 한결같이 《가례》를 따르오. 나도 마땅히 이를 따라야하는데 다만 역풍을 만나 지금까지 널 앞에 울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통곡하는 것이오.”

“당신은 시를 지을 줄 아오?”

“시사(詩詞)는 곧 경박한 사람이 풍월(風月)을 농하는 것으로 도학(道學)을 배운 돈독한 군자가 할 짓은 아니오. 나는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12]을 공부하였지 시사를 배우는 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소. 먼저 시를 지어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화답(和答) 정도는 하지 않을 수 없을 뿐이오.”[13] -->사림파는 경학 우선, 사장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또 한 사람이 손바닥 위에 글을 썼는데,

“보아하니 당신은 나쁜 사람은 아닌데, 다만 언어가 달라 실제 장님이나 벙어리와 마찬가지이니 참으로 불쌍하오.

(조) 여기서 나쁜 사람을 호인이라고 함: 사람의 얼굴에 물고기의 몸을 가진 사람

내가 당신에게 한마디 할테니 당신은 이를 기억하였다가, 처신을 잘 하고 부디 다른 사람과 경솔하게 얘기를 나누지 않도록 하시오.

예로부터 왜적이 여러 번 우리의 변경을 침탈하였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비왜도지휘(備倭都指揮)138 와 비왜파총관(備倭把摠官)을 두어 왜적을 방비하게 했소.

만약 왜적을 잡는다면 모두 먼저 목을 베고 나중에 보고하게 되어 있소. 이번에 당신이 처음 배를 맨 곳은 사자채(獅子寨)의 관할지인데, 수채관(守寨官)140은 당신을 왜적이라 무고하여 목을 베어 바쳐 공을 세우려 했소.

그러므로 먼저 왜선 14척이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하였다고 보고했던 것이오.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당신을 잡아 목 베려는 참에 당신들이 먼저 배를 버리고 사람이 많은 마을로 들어갔던 까닭에 그들은 계략을 펴지 못했던 것이오.

내일은 파총관이 와서 당신들을 심문할 것이니 당신은 자세히 해명하시오. 조금이라도 어긋나거나 틀리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라는 등의 말이었습니다.

신이 그의 성명을 물으니,“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당신을 아끼고 위태롭게 여겼기 때문이오”라고 하고는 머리를 흔들며 갔습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하여 바로 정보 등에게 얘기했습니다.

정보 등이 말하기를,“길가 사람들이 우리를 가리키면서 목 베는 시늉을 했던 것은 모두 이 계략에 현혹되었기 때문이었군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날 저녁 천호 등 관원 7-8인이 큰 탁자 하나를 놓고 탁자 가에 죽 둘러서 더니, 정보를 앞에 끌어내어 심문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함께 온 배가 14척이라고 하니 사실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정보가,“아닙니다. 한 척뿐입니다”라 대답하자 손을 휘둘러서 정보를 내보내었습니다.

또 신을 끌어내어 심문하기를, "너희들이 타고 온 원래의 선박이 몇 척이나 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한 척뿐입니다.”

“우리의 변경에서 왜선 14척이 어제 그 곳 바다에 함께 정박한 것을 분명히 보았고, 내가 수채관(守寨官)의 보고에 따라 이미 상급 관청의 영감님께 보고를 올렸다. 너희 배 13척은 어디에 두었는가?”

“우리가 해안에 도착할 때 귀국 사람들이 탄 배 6척이 한 바다에 같이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6척의 배에 탄 사람을 조사한다면 우리 배의 수효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왜인으로 이곳에 상륙하여 약탈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나는 곧 조선 사람으로서 왜인과는 언어도 다르고 의관도 다르니, 이것으로 가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왜인으로서 도적질에 교묘한 놈은 혹 변장을 해서 조선 사람처럼 가장하는 자가 있으니 네가 그 왜인이 아닌지 어찌 알겠는가?”

“나의 행동거지를 살펴보고, 나의 인신(印信), 마패, 관대(冠帶), 문서를 조사한다면 진위를 가릴 수 있을 것입니다.”

천호 등이 즉시 신에게 인신 등의 물건을 가져오게 하고는 대조한 뒤, 이어서 묻기를,“네가 왜인으로서 조선 사람에게서 이 물건을 빼앗은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나를 의심하는 마음이 있으면, 우선 나를 북경(北京)으로 보내서 조선 통사원(通事員)[14]과 한번 이야기를 시켜보면, 실상이 즉시 드러날 것입니다.”

“너는 성은 뭐고, 이름은 뭐며, 어느 주현(州縣) 사람이고, 무슨 관직이며, 무슨 일로 인하여 우리 변경에 도착했는가? 그 정상(情狀)을 쓰되 거짓이 없어야 할 것이다. 내가 상사(上司)에게 보고하겠다.”

“저는 성은 최, 이름은 부로[15], 조선국 전라도 나주(羅州) 성내에 거주하였습니다. 두 번 문과[16]에 올라 조정의 반열에 올라 처음으로 벼슬한 지 몇 해가 되었습니다[17]. 지난 정미년 9월에 국왕의 명령을 받들고 제주 등지의 해도에 갔다가 금년 윤 정월 3일에 부친상을 당하여,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다가 바람을 만나 표류해 이곳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네 부친의 이름은 뭐고, 관직은 뭐며, 어느 곳에서 죽었는가?”

“아버지 이름은 택(澤)인데,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어버이를 봉양키 위하여 벼슬하지 않으셨습니다. 상복을 벗은 지 겨우 4년 만에 나주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공초(供招)를 마친 뒤 신을 별관(別館)에 숙박하게 하고, 신과 종자에게 음식을 제공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공무로든 사무로든 제주도에 왕래하다가 바람을 만나서 행방불명된 자가 일일이 셀 수도 없지만 마침내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열 명, 백 명 가운데 겨우 1-2명에 불과합니다.

이들이 어찌 모두 바다에 빠진 것이겠습니까? 그중에 표류해서 도이(島夷)들이 사는 섬라(羅__), 점성(占城)국과 같은 나라로 들어간 사람은 다시 돌아오기를 바랄 수도 없었고, 혹시 표류해서 중국 땅에 이르게 된 사람도 국경지대 사람들이 잘못 왜적으로 무고하고 목을 베어 상을 받는다고 해도 누가 그 실정을 가려낼 수 있겠습니까?

신 등과 같은 사람도 만약 먼저 스스로 육지에 내려오지 않았거나, 인신과 마패와 같은 신표(信標)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다시 화를 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의 제도에 의거하여 모든 백관(____)들에게 호패(號牌)와 석패(錫牌)를 주어 관직과 성명을 전자(篆字)[18]로 써서 평민과 다름을 드러나게 하고, 봉명사신(奉命使臣)에게는 대소를 논할 것 없이 절월(節鍼)을 주어 왕명을 높이도록 하고, 또 연해 지방에 기주하는 사람은 비록 사상(私商)으로 바다를 건너는 사람이라도 모두 호패를 주어서, 어느 나라, 어느 주현, 성명 아무개, 어떤 형상(形狀), 나이 얼마를 써서 구별되도록 하며, 또 통사(通事) 1명을 제주에 두어서 모든 봉명사신과 3읍 수령이 왕래할 적엔 항시 데리고 다녀 뒷날의 근심을 고려해야만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명: 도저소, 해문위, 사자채, 북경(北京) 기후: 큰비가 내렸습니다 제도(관직): 천호(千戶), 비왜도지휘(備倭都指揮), 비왜파총관(備倭把摠官), 수채관, 파총관, 조선 통사원(通事員) 제도(교통): 말을 나란히 타고, 인명: 허청, 왕벽, 노부용 행정: 관에서 지급할 것, 나라의 법에 걸리기 때문에, 왜적을 잡는다면 모두 먼저 목을 베고 나중에 보고하게 되어 있소, 동물: 소 심리: 동정 지리: 고개를 하나 넘어 20여 리쯤 지나, 성에 이르기 7-8리 앞 기물: 갑옷, 창, 칼, 총통, 방패 건축물: 성에는 겹문이 있고 문에는 쇠빗장이 있었으며, 경수루(警成樓) 사회: 상점이 서로 잇닿아 사람들과 물건이 많고 풍부하였는데, 관(冠)과 옷에 진흙이 묻어 구경꾼들이 몹시 웃어댔습니다, 왜선(倭船) 14척이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했다, 왜적이라 무고하여 목을 베어 바쳐 공을 세우려 했소, 언어: 문자(文字)가 같은데, 유독 당신들의 말소리가 중국과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이오? 언어가 달라 실제 장님이나 벙어리와 마찬가지 유학: 당신은 분상(奔喪)을 할 때 주문공(朱文公)의 《가례》를 따르오? 시: 당신은 시를 지을 줄 아오? 비유: 언어가 달라 실제 장님이나 벙어리와 마찬가지, 시간: 저녁 기물: 큰 탁자 하나 의전: 신과 종자에게 음식을 제공하였습니다

지명-조선: 조선국, 전라도 나주(羅州) 인명-조선: 효자, 정보, 김중, 막금, 만산, 거이산, 이정, 효지, 상리, 최부, 최택(澤) 심리-조선: 기진맥진, 좌절, 간절(이 소를 타는 값으로 옷을 벗어줄 테니 우리 관원을 태우기를 청합니다), 공포(머리털이 곤두서는 듯) 비유-조선: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 유학-조선: 이정, 효지, 상리 등이 또 번갈아 신을 업고, 나의 성품 또한 요(堯), 순(舜), 공자(孔子), 안회(顔回)의 성품,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을 당했을 땐 모두 한결같이 《가례》를 따르오, 도학(道學)을 배운 돈독한 군자,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지난 정미년 9월에 국왕의 명령을 받들고, 경세제민(모든 백관(____)들에게 호패(號牌)와 석패(錫牌)를 주어 관직과 성명을 전자(篆字)로 써서 평민과 다름을 드러나게 하고, 봉명사신(奉命使臣)에게는 대소를 논할 것 없이 절월(節鍼)을 주어 왕명을 높이도록 하고, 또 연해 지방에 기주하는 사람은 비록 사상(私商)으로 바다를 건너는 사람이라도 모두 호패를 주어서, 어느 나라, 어느 주현, 성명 아무개, 어떤 형상(形狀), 나이 얼마를 써서 구별되도록 하며, 또 통사(通事) 1명을 제주에 두어서 모든 봉명사신과 3읍 수령이 왕래할 적엔 항시 데리고 다녀 뒷날의 근심을 고려해야만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천-조선: 하늘이 준 성품 모화-조선: 나의 성품 또한 요(堯), 순(舜), 공자(孔子), 안회(顔回)의 성품 사회-조선: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을 당했을 땐 모두 한결같이 《가례》를 따르오 풍습-조선: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을 당했을 땐 모두 한결같이 《가례》를 따르오 시-조선: 시사(詩詞)는 곧 경박한 사람이 풍월(風月)을 농하는 것으로 도학(道學)을 배운 돈독한 군자가 할 짓은 아니오. 화답(和答) 정도는 하지 않을 수 없을 뿐, 기물-조선: 인신(印信), 마패, 관대(冠帶), 문서, 호패, 석패, 절월 심리(최부): 당당함(나의 행동거지를 살펴보고), 제도(관직)-조선: 두번 문과에 올라, 통사, 봉명사신, 3읍 수령 제도(시험)-조선: 진사시 행정-조선: 제주 등지의 해도에 갔다가 사건-조선: 금년 윤 정월 3일에 부친상, 표류 19th Day. Arrival at T’ao-chu Chiliad. This day there was heavy rain.

The two Chiliarchs, riding abreast, drove us on, into the face of the rain. I ordered Chong Po to say to Hsü Ch’ing, “Hungry and thirsty, we drifted at sea, staring at death and regaining life. Barely staving off our dying gasps, we reached your border, met an official, and, yesterday morning, ate a full meal. We thought we had got to a place of rescue, where now, in continuous rain and muddy roads we stumble and fall in gullies and strike rocks and mud. Our bodies are frozen, our legs have sores, our hearts are anxious, and our strength is exhausted. Last night we did not eat, nor did we eat this morning, yet we are driven on, into the rain. We shall probably die on the way.” Hsü Ch’ing replied, “Yesterday you brought hunger on yourselves by not walking far enough to reach the authorities. Now, if you get there in good order, the authorities themselves will supply you. Hurry, hurry!" I took a step, failed, and lay down at the side of the road. My whole body had collapsed and would not rally. Hyo-ja, Chòng Po, Kim Chung, Makkům, Mansan, and Kõisan sat round me and wept bitterly. Just then, a man leading an ox happened to pass by. Chồng spoke to the Chiliarch: “Please let us take off our clothes and buy this ox to carry our chief.” Hsü Ch’ing said, “How can I, too, help but pity you all for the suffering you are undergoing? But since I am bound by the laws of the country, I cannot take your part.” Yi Chong, Hyo-ji, and Sang-ni again took turns carrying me. We crossed one range and in somewhat more than twenty li came to a wall, which was T’aochu Chiliad of Hai-men Garrison. As we approached the wall, for seven or eight li there were troops wearing armor and holding lances. Fire weapons and bold shields filled the roads. When we arrived at the wall, it had a double gate, and the gates had iron knockers. Watch towers were built along the top of the wall, and within it markets and shops were continuous and the people prosperous. We were led to a public guest house and allowed to stay there. My appearance was emaciated, my hat and gown muddy. The onlookers doubled up with laughter. One Wang Pi wrote a statement to me: “Yesterday it was reported to the authorities that fourteen Japanese boats had violated the border and attacked people. Are you really Japanese?” I said, “I am not Japanese, I am a Korean gentleman.” There was also a Lu Fu-yung who called himself a scholar. He said to me, "Why, when your carriages have the same axle-width and your books the same writing as those of China, is your speech not the same?” I answered, “The same wind does not blow over a thousand li, the same customs do not obtain over a hundred. If you wonder at the sound of my words, I wonder at the sound of yours. It is a matter of custom. But if we share the nature given by Heaven, my nature, too, is the nature of Yao, Shun, K’ung, and Yen.33 How can one object to a difference in speech?” The man applauded and said, “When you go into mourning, do you observe the [rules of] Chu Wen Kung's Chia li?” I answered, “In observing mourning, every one of my countrymen respects the Chia li. I should have followed it, but being driven off by winds, I have not yet been able to weep before the coffin. For that I grieve bitterly.” The man then asked, “Do you write poetry?” I answered, “Poetry is something by which the frivolous moan about the wind and moon and not a thing indulged in by sincere men devoted to the Way. I take as my study the investigation of things, extension of knowledge, and pursuit of truth. I do not pay much attention to poetry, but if someone addresses a poem to me, I am bound to respond with one of my own; that is all.” Another man wrote on my palm: “I see that you are not an evil man. But simply because your speech is not the same, you are really like someone blind and deaf. I truly pity you, and I shall tell you something; remember it. Be very careful of yourself. Do not talk freely to people. From olden times, Japanese bandits have repeatedly raided our borders. The state, therefore, has set up Anti-Japanese Commissioners and Anti-Japanese Commanders34 to cope with them. If they seize Japanese, they behead them all first and report it later. “Now the place where you first tied your boat was in the area of Shih-tzu Stockade. The Stockade Commander falsely accused you of being Japanese. He wanted your heads for the reward, and in his first report, therefore, he said, 'Fourteen Japanese boats have violated the border and attacked people.' As he was about to lead soldiers out to take you and behead you, your group left the boat and ran into a village, where many people were. He could not, therefore, perpetrate his scheme. Tomorrow, the Commander will come and question your group. Explain things to him minutely. If there is the slightest discrepancy or error, there is no telling what might happen.” When I asked his name, he said, “I have told you this because I like you. I have risked danger.”35 He turned and left. When I heard what he said, my hair stood up on end; so I said to Chòng Po and others, “When the people on the road pointed at us and made gestures as if to cut off their heads, it was because all of them were deluded by this plot.” In the evening, seven or eight officials, including the Chiliarch, had a large table put in place and stood round it. They had Chong Po brought before them and asked, “Is it true that your group had fourteen boats ?” Chong Po replied, “No. We had only one boat.” They motioned Chòng Po out, had me brought in, and asked, “How many boats did you start out in?”' I said, “Only one.” They said, “Fourteen Japanese boats were sighted from above our coast. They were anchored together at sea yesterday. Because of the Stockade Commander's report, therefore, we have already reported the fact to our superiors. Where did you put the other thirteen boats?” I said, “When I arrived at the coast, men of your country were sailing there in six boats. We moored together. If you question the men of those six boats, you will know how many boats we had.” They said, “Why have you Japanese come here to raid?” I said, “I am a Korean. My speech is different from Japanese, my hat and gown are of different style. By those things you can tell us apart.” They said, “Some of the Japanese who are clever at banditry change their clothes and pose as Koreans. How do we know that you are not a Japanese like that?” I said, “If you observe my conduct and examine my seal, permit, cap, sash, and documents, you can tell the true from the false.” The Chiliarch and others then ordered me to bring my seal and other things and present them as evidence. They asked, “Are you not perhaps Japanese who robbed Koreans and got these things?” I said, “If you doubt me in the slightest, order me sent to Peking. A word with a Korean interpreter, and the truth will be apparent.” They asked, “What is your name? What are your department and county? What is your official position? On what business did you come to our border? Explain the facts in writing and dare not lie. We shall report this to our superiors.”

I said, “My name is Ch'oe Pu. I live in the capital of Naju, Cholla Province, Korea. I placed twice on the examination lists, and I have served notably at Court for some years. In the Ninth Month of last year I received the King's command to go to Cheju and other islands, but on the 3rd Day of this Intercalary First Month I was setting out to mourn for my father. Returning home in confusion, I met a wind and was blown to sea, and I happened to come here."

They said, “What was your father's name? What was his position? Where did he die?” I said, “My father's name was T'aek. He passed the Chinsa examination36 but in order to care for his parents did not take an appointment. He had laid aside his mourning clothes scarcely four years when he, too, died in Naju.”

When the deposition was finished, they lodged me in the guest house annex and gave me and my staff food. The people of our country go on official and private business to and from Cheju, and those who meet winds and get lost are beyond counting. Those who finally return home alive are barely one or two in a hundred; is it likely that all of them drown at sea? Those who drift to the island barbarian countries like Siam and Champa have no further hope of returning. Even if they drift to the borders of China, they are still wrongly accused by the people on the coast of being Japanese pirates. If their ears are cut off for the reward, who can tell the truth? How could people like us, if we had not landed beforehand by ourselves or did not have such signs as seals and permits, have escaped disaster?

Let our state follow the system of the Chinese Court and issue to all officials number tablets and pewter tablets with their names and positions thereon in seal characters to identify them. When any official, great or small, is sent anywhere, tallies and halberds should be provided to honor the King's command. Let even people living by the sea, though they cross the sea in private trade, be issued number tablets, inscribed such-and-such country, such-and-such department and district, such-and-such name, such-and-such appearance, and such-and-such date, to identify them. A consul should also be put at Cheju, and all commissioned ministers and magistrates of the three cities should always, coming or going, carry [their tablets] with them to provide for what may happen. If all that is done, then and only then will everyone be able to avoid tragedy.

1월 20일

二十日, 在桃诸所, 是日午陰乍晴, 臣問桃诸所千戶姓名,則乃陳華也,華與一官人來看臣,指臣笠,曰:“此何帽子?”臣曰:“此喪笠也,國俗皆慮墓三年,不幸如我漂流,或不得已有遠行者,則不敢仰見天日,以堅泣血之心, 所以有此深笠也,”及至飯時,許清引臣同桌,座有一人以筋畫卓上曰:“你吃猪肉否?”臣曰:“我國人守喪三年,不食魚肉蘸董”其人以別器盛素,以饋臣. 許清又見臣之衣服沾濕未乾,謂臣曰:“今日有陽, 可脫衣以晒之.” 臣答日:“我衣皆濕,脫此則無可穿者,不能晒也.” 許清引臣坐諸面陽之地,以令晒乾, 有一官人來問曰:“你國 王稱皇帝否?”臣答曰:“天無二日,安有一天之下有二皇帝乎?我 王心誠事大而已,”又問曰:“你國官人果皆星帶乎?”曰:“一二品着金,三四品着銀,五六六品以下,皆着烏角而無厘帶,”又問日:“你國有金銀否?”曰:“金銀非本國所產,”曰:“然則何以有金銀帶?”曰:“皆來貿上國,所以貴也.”臣問其官人為何人,其人即出公文以示,則乃把總官先差此官人,給牌星馳前去桃诸所,護住臣等,按臨重解,毋得違恨者,姓名即薛景,又有一人來,曰:“我寧波府定海衛人,因此處都司公差到此.”

p.372 臣即問曰:“寧波府有下山否?”曰:“有之.” 臣因言前日到泊下山逢海賊復漂之故,其人曰:“我當持此文字,告知府往問之,臣問其姓名,則王海也,又有外人羣聚而至,爭持紙筆以問,不可勝對,有官人密書以示曰:“此處人輕薄,休與開講.”


도저소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흐렸다 개었다 하였습니다.

신이 도저소 천호의 성명을 물으니 진화(陳華)라고 하였습니다.

진화는 한 관인과 함께 신을 보러 와서 신의 갓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이것은 무슨 모자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상립(喪笠)[1] 43입니다. 우리나라 풍속에는 모두 3년 동안 여묘(廬墓) 44를사는데, 불행히 나처럼 바다에 표류하거나, 부득이 멀리 여행하게 된 사람은 감히 하늘과 해를 우러러 보면서는 비통한 마음을 견지할 수 없기 때문에 깊은 상립[2]을 쓰는 것입니다.”

밥 먹을 때가 되자, 허청(許淸)은 신을 인도하여 식탁을 같이 하였습니다.

좌중의 어떤 사람이 탁자 위에 젓가락으로 글씨를 쓰며 묻기를,

“당신은 돼지고기를 먹습니까?”[3][4][5][6][7]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부모상을 입으면 3년 동안은 어육(魚肉), 젓갈, 훈채[8]를 먹지 않습니다.”그 사람은 다른 그릇에 채소 반찬을 담아서 신을 접대하였습니다.

허청은 또 신의 의복이 젖어 마르지 않은 것을 보고 신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햇볕이 있으니 옷을 벗어서 햇볕에 쪼이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옷이 모두 젖었으니 이 옷을 벗으면 입을 것이 없으므로 햇볕에 쪼일 수 없습니다.” 허청은 신을 이끌어 햇볕이 드는 곳에 앉히고 옷을 말리게 하였습니다.

한 관인이 와서 묻기를, “당신 나라의 왕도 황제라 일컫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는데, 어찌 한 하늘 아래에 두 황제[9]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왕은 성심껏 대국을 섬기고 있을 뿐입니다.”

“그대 나라의 관인들은 모두 서대(犀帶)를 맵니까?”

“1품·2품은 금대(金帶), 3품·4품은 은대(銀帶), 5품·6품 이하는 모두 오각대(烏角帶)를 매지만 서대는 없습니다.[10] 145

“당신 나라에는 금은이 있습니까?”[11]

“금은은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습니다.” [12]

“그렇다면 어떻게 금대, 은대가 있습니까?”

“모두 상국(上國)에 와서 매입하므로 귀한 것입니다.”

신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물었더니, 그 사람은 곧 공문(公文)을 내어 보였는데, 바로 파총관이 먼저 이 관인에게 패문(牌文)을 주어 도저소에 빨리 달려가 신 등을 잡아두고 조시하여 압송하는 데 차질이 없도록 한 자이니 성명은 설민(薛旻)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나는 영파부[13] 정해위(定海衛)148의 사람인데, 이곳 도사(都司)149가 파견하여 이곳에 온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곧 묻기를, “영파부에 하산(下山)이란 곳이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있습니다.”

신은 이어서 전일 하산에 정박했다가 해적을 만나 다시 표류하게 된 사정을 말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이 글을 가지고 가서 지부(知府)150에게 알려, 가서 조사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의 성명을 물었더니 왕해(王海)라고 하였습니다. 또 바깥사람들이 떼지어 와서 앞을 다투어 종이와 붓을 가지고 물으니 일일이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관인이 가만히 써 보이기를, “이곳 사람들은 경박하니, 쓸데없는 얘기는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기후: 흐렸다 개었다 지명: 도저소, 영파부 정해위(定海衛), 영파부 하산(下山) 인명: 진화(陳華), 설민(薛旻), 왕해(王海) 제도(관직): 천호, 파총관, 도사(都司), 지부 시간: 밥 먹을 때 기물: 식탁 풍습(음식): 돼지고기 의전: 다른 그릇에 채소 반찬을 담아서 신을 접대하였습니다. 심리: 동정(허청은 신을 이끌어 햇볕이 드는 곳에 앉히고 옷을 말리게 하였습니다.) 언어(어원): 당신 나라의 왕도 황제라 일컫습니까? 기물: 서대(犀帶), 금은, 종이, 붓 행정: 공문(公文), 패문(牌文), 내가 이 글을 가지고 가서 지부(知府)에게 알려, 가서 조사하게 할 것입니다 사회: 해적, 이곳 사람들은 경박하니 풍습(의복)-조선: 상립(喪笠) 유학-조선: 여묘(廬墓) 경천-조선: 하늘과 해를 우러러 풍습(음식)-조선: 우리나라 사람은 부모상을 입으면 3년 동안은 어육(魚肉), 젓갈, 훈채를 먹지 않습니다. 풍습-조선: 우리나라 사람은 부모상을 입으면 3년 동안은 어육(魚肉), 젓갈, 훈채를 먹지 않습니다. 모화: 어찌 한 하늘 아래에 두 황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왕은 성심껏 대국을 섬기고 있을 뿐입니다, 모두 상국(上國)에 와서 매입하므로 귀한 것입니다 기물-조선: 1품·2품은 금대(金帶), 3품·4품은 은대(銀帶), 5품·6품 이하는 모두 오각대(烏角帶)를 매지만, 금은은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습니다. 경제-조선: 모두 상국(上國)에 와서 매입하므로, 사건-조선: 표류

20th Day. At T’ao-chu Chiliad. This day was alternately cloudy and fair.

I asked the name of the Chiliarch of T'ao-chu Chiliad; it was Ch'ên Hua. Ch'ên Hua came with an official to see me. He pointed to my bamboo hat and said, “What kind of hat is that?” I said, “This is a mourning hat. It is a national custom for everyone to dwell in a hut by the grave for three years. If, unfortunately, one should be cast adrift like me or must travel far, in order to maintain the mood of grief, one dare not look up at the sun and sky. That is why we have these deep hats.” At meal time, Hsü Ch’ing led me to his table. A man seated there wrote with his chopstick on the table, “Do you eat pork?” I said, “The people of my country observe mourning for three years and do not eat fish, meat, preserved meat, oniony plants, or garlic.” The man took separate plates, loaded them with vegetable courses, and served them to me. Hsü Ch’ing then saw that my clothing was not yet dry. He said to me, “It is sunny today; you might take off your clothes and dry them.” I answered, “All my clothes are damp. If I take these off, there is nothing I can wear. I cannot dry them.” Hsü Ch’ing led me to a sunny place and seated me so that I might dry out. An official came and asked, “Is the King of your country called Emperor?” I answered, “In Heaven there are not two suns; how under the same Heaven can there be two Emperors? My King's one purpose is to serve your country devotedly.” Then he asked, “Do all the officials of your country really wear rhinoceros [horn] girdles?” I said, “The first and second ranks wear gold, the third and fourth silver, the fifth and sixth and all those below black horn, but there are no rhinoceros [horn] girdles. 37 He asked, “Are there gold and silver in your country?” I said, “Gold and silver are not products of my country.”'38 He said, “But then, how are there gold and silver girdles?” I said, “They all come in trade from your country. That is why they are prized.” When I asked the official who he was, he took out a public document and showed it to me. It [showed that] the Commander had previously dispatched this official with a permit, sending him on to T’ao-chu Chiliad posthaste. He was to place us under guard, question us, and bring us back without fail. This, then, was that Hsieh Min. Another man came and said, “I am from Ting-hai Garrison, Ning-po Prefecture. I was sent here by the Regional Military Commission [Tu-chih-hui shih-ssu] of that place.” I then asked, “Is there a Hsia-shan in Ning-po Prefecture?” He said, “There is.” I told him about our previous arrival and mooring at Hsia-shan, meeting pirates, and being set adrift again. The man said, “I shall take this paper and inform the Prefect so that he will make inquiries.” I asked his name, which was Wang Hai.

Other outsiders came in crowds and eagerly took paper and brush and asked questions. I could not keep up with them in my answers. An official secretly wrote and showed me a note that said, “The people here are a bad lot. Do not talk with them.”

1월 21일

1월 22일

1월 23일

3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