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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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fs정다운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6월 25일 (화) 22:1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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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제작의도

6월은 호국 보훈의 달로 6.25 전쟁이 일어난 달이기도 하다. 6.25 전쟁은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 비극적인 전쟁이다. 특히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러한 민간인의 피해가 단순히 전쟁 중 양측의 전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측 병력에서 일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례도 꽤 많다. 이 문서에서는 6.25 전쟁 당시 우리측 병력에 의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민간인 학살사건들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노드 리스트

CLASS NODE
인물 이승만, 노무현,
사건 6.25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
장소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상남도 거창군
국가 대한민국, 미국
사상 빨갱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청야, 웰컴 투 동막골, 작은 연못

주요 노드

CLASS NODE
인물 이승만, 노무현,
사건 6.25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
사상 빨갱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노드들간 관련

보도연맹 학살사건

사건

6.25 전쟁

인물

사상

영화

사건 내용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의 연맹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즉 빨갱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고 이승만은 그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육군은 이들을 잡아들여 구금한 후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식으로 확인된 군경에 의해 처형당한 민간인 피해자만 4934명이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 사과하였다.

보도연맹 학살 당시 장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

6.25 전쟁

사상

사건 내용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피난 중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

거창 양민 학살사건

사건

6.25 전쟁

사상

사건 내용

거창 양민 학살사건6.25 전쟁 중인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국군 11사단 9연대 군인들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빨갱이) 토벌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은 모조리 적국 국민 취급, 더 나아가 제거 대상으로 여겨 그 지역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거창만 기준으로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으로 총 719명이었다.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

사건

6.25 전쟁

인물

사건 내용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이승만은 북한이 서울에 접근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면서 라디오로 서울 시민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서울을 지키라는 방송을 하며 본인 역시도 서울에 있는 척 하였다. 이를 믿은 시민들은 북한군이 코 앞에 진격해서야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며 80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