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강화화문석자료
개요
조선시대에 와서는 더욱 확연해 가는데 <세종실록> 12년(1430) 2월 정유를 보면 명나라에 대한 세공품목이 적혀 있다. 다음과 같다.
“석류로는 만화석, 만화방석, 염석, 황화석, 해화석이 있으며 해동역사 교빙31에는 중종 26년 (1531년)에 공물 중 석류로 황제에게 용문염석 20매, 황화석20매, 만화방석20매, 잡채화석 20매, 이며 황후에게 황화석10매, 만화방석10매, 잡채화석 10매라 하였다.”
또한 통문관31 <사대방물> 유목에도 경종3년(1723년) 이후 오조용석 등 각양 화석이 국외로 보내지는 선물로 계속 선택되고 있었다.
<임원> 십육31 섬용31 권3 가거31구에 용수석 항에서 또 <금화경득기>의 글을 인용하여 용수석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일본 에도시대에도 우리나라 통신사가 가지고 간 대화석이 있었음을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등메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에서 중국에 가는 사신이나 일본에 통신사가 선물로 가지고 갔던 물목에 포함되었던 뛰어난 공예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1]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중국․일본 등지에 보내는 조정의 선사품 가운데 화문석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었으며 수량면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러한 막대한 양의 화문석은 장흥고(長興庫)에서 조달했는데, 중앙관청에서 제작한 것이 아니라 충청도․경상도․전라도의 각 군마다 외공장인 석장(席匠)을 1명 이상씩 두고 제작하도록 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석장이 10명 이상 있었던 곳은 용궁․풍기․영주․선산․예천․성주․안동 등으로 경상도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제작하여 공급하였다고 한다. 화문석 재료인 왕골은 『택리지』에 의하면 안동의 예안 용수초를 제일로 쳤으며, 『임원십육지』에서는 「금화경독기」를 인용하여 예안 사람들이 오채용문석(五彩龍文席)을 잘 만들어 공물로 바쳤다고 한다. 그 밖에 『규합총서』에서는 강화의 교동을 화문석의 산지로 꼽고 있다. 화문석은 원래 부드럽고 잘 꺾이지 않는 용수초로 경상도지역에서 많이 제작했다고 하지만 현재는 보성 용문석만이 그 명맥을 잇고 있으며, 화문석으로 유명한 강화에서는 재료를 왕골을 사용하고 있다. [2]
해설
박물관 내부시설 / Museum facilities
강화전쟁박물관은 1층의 제1~2전시실, 2층의 제3~4전시실 총 4가지 주제의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으며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강화의 전쟁사 관련 유물을 시대순으로 볼 수 있도록 전시하였다.
- 제1전시실 (주제관) - 복합영상을 통해 건국부터 오늘날까지 외세의 침략에 맞선 강화의 호국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주제관이며, 돌화살촉, 고리자루칼, 청동화살촉 등 선사시대부터 남북국시대까지 강화지역의 전쟁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각종 무기가 전시되어 있다.
시각자료
사진
박물관과 갑곶돈대 입구
박물관 건물
박물관 전경
영상
- 채널A 오늘의 영상_스마트리포터 동영상, 왕골 돗자리, 게시일: 2013년 3월 4일.
가상현실[3]
-추후 드론과 파노라마사진을 넣을 곳입니다.
출처
- ↑ 한국의유산 이소정 기자 http://iyoc.kr/portal/interview.asp?idx=144
- ↑ 진도문화원 http://www.jindoculture.or.kr/sub.html?table_id=data_folklore&pid=20&target=&keyword=&formtype=view&page=1&code=174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화 광성보' 사진
기여
일자 역할 이름 전공 2019년 6월 정리 및 편집 손형남 인문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