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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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한글학회가 엮은 종합적인 대규모 국어사전
내용
제작과정
-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가 발족된 것이 시작이다.[1]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사전 편찬 작업이 중단되었다.
-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압수됐던 사전 원고가 해방 후인 1945년 9월 8일 경성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발견되었다.[2]
- 조선어학회는 1947년 《조선말 큰사전》 1권을, 1949년 2권을 간행했다. 종이 등의 물자를 록펠러 재단으로부터 원조를 받았다. 조선어학회가 한글 학회로 이름을 바꾸면서 1950년 간행한 3권부터는 《큰 사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 1950년 한국 전쟁으로 한글 학회 회관 건물이 전소되는 등 피해를 입어 사전 간행이 중단되었다. 또한 1953년 한글 간소화 파동이 일어났는데,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그의 정책에 반대하는 한글 학회를 견제하기 위해 록펠러 재단의 원조를 막았다. 1955년 이승만이 이를 철회하면서 한글 학회는 다시 물자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 1957년에 4·5·6권을 간행하면서 《큰 사전》이 완간되었다.
- 어휘 수집은 조선어사전편찬회에서 만든 약간의 어휘 카드, 약 7만 어휘를 간략히 주석한 이상춘(李常春)의 기증원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조선어사전≫(1920), 게일(Gale,J.S.)의 ≪한영자전≫(1897) 및 당시의 간행물에 의존하였으며, 사투리는 ≪한글≫ 독자와 방학 동안 귀향하는 학생들에 의하여 수집되었다. [2]
관련인물
- 이 사전의 편찬을 위하여 조선어사전편찬회는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를 두고 신명균(申明均)·이극로(李克魯)·이윤재(李允宰)·이중화(李重華)·최현배(崔鉉培) 등 5명을 집행위원으로 선정하였으며 이극로·이윤재·한징(韓澄)·이용기·김선기(金善琪) 등 5명을 편찬원으로 선정하였다.
- 1936년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선어학회에 통합된 뒤, 전임 집필위원으로 이극로·이윤재·정인승(鄭寅承)·한징·이중화 등 5명이 선임되고, 권승욱·권덕규(權悳奎)·정태진(丁泰鎭) 등 3명이 증원되었다.
- 1945년 9월 8일 정인승·이극로·김병제(金炳濟)·이중화·정태진·이강로(李江魯)·신영철 등 7명이 편찬원으로 참가하였고, 1956년 4월부터는 정인승·권승욱·유제한(柳濟漢)·이강로·김민수(金敏洙) 등 5명이 집필을 하고, 한종수·이승화·정재도 등 3명이 교정을 맡았다.
특징
- 정서법은 순우리말과 한자말의 경우 조선어학회 제정 <개정한 한글맞춤법통일안>(1949)을, 외래어나 외국 고유명사 등은 조선어학회 제정 <외래어표기법통일안>(1940)을, 이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이두집성≫(1937)을 따랐다. 한편, 표준어와 비표준어의 가림은 조선어학회의 <사정한 조선어표준말>(1936)을 따르고 있다.
- 이 사전이 그 뒤의 국어사전들과 다른 특징은 표제어의 배열을 겹닿소리글자의 어휘들을 “가, 갸, 거, 겨, …… 까, 꺄, 꺼, 껴, ……”의 차례가 아니라 “가, 까, 거, 꺼, ……”의 차례로 하였다는 점이다.
- 이외에 이 사전의 특징으로는, 첫째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일반어 뿐만 아니라 전문어·제도어·고유명사·옛말·이두 등까지 포괄한 종합적 사전이라는 점, 둘째 비표준어와 버려야 할 말에 ◐표를 하고, 특수한 음소변동의 부분에 한글로 발음을 표시한 규범적 사전이라는 점, 셋째 주석만이 아니라 용례 및 관계어들을 들어 문맥과 어휘구조를 명기하려고 한 최초의 구조적 사전이라는 점 등이다.
멀티미디어
이미지
동영상
▲관련영화 <말모이,2019> 소개영상(이채영 제작,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