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외주동(外州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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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숙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5월 20일 (월) 01:4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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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외주동(外州洞406)) 幽谷橫斜是外州깊은 골짝 비스듬히 외주(外州) 마을 있는데, 門前南出一貂頭문 앞에 남쪽으로 초피산이 솟아 있네. 宋金兩姓連書屋송씨·김씨의 글방이 나란히 있으니, 各採紅蓮玉漵秋각 집안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네. ○ 외주동(外州洞) 남쪽으로는 초피산(貂皮山)의 한 봉우리를 바라 볼 수가 있는데 붓처럼 생겨서 매우 보기가 좋다. 그 거주하는 이는 여산 송씨 송기호(宋基皓)407)와 김해 김씨가 있는데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그 친척과 자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406) 내가면 외포1리 외주동으로 박골, 바꼴이라고도 한다. 407) 송기호(1865년 출생) 본관은 여산(礪山). 1885년 식년시 생원(生員) 3등 157위로 합격하였다.

178. 항주(項州408)) 項州洞口問星田항주동 입구에서 별밭을 방문하니, 牟麥春光上下連보리가 봄볕 속에 위아래로 연이었네. 申老閑眠桑樹下신씨노인 뽕나무 아래 한가로이 졸다가도, 時呼穉子讀靑篇어린아이 공부하라고 때맞추어 소리치네. ○ 항주(項州)에는 성전(星田)이 있다. 어떤 이는 별이 떨어진 곳이라고도 한다. 평산 신씨(平山申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179. 낙인동(樂仁洞409)) 國賜峯前王訪村국사봉 앞쪽에 왕방촌이 있는데, 世居全氏向陽門전씨들이 양지쪽에 대대로 살고 있네. 丹花仙籍黃金印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관직 올라가니, 觀海眞工自有源관해공의 참된 공부 스스로 근원이 있었네. ○ 낙인동(樂仁洞)은 항주에서 갈라진 동네이다. 성주 전씨 전신(全信)410)은 고려조의 병부상서로서 공왕(恭王)을 수행하여 이곳에 들어와 살았다. 우리 태종이 공을 방문하였는데 왕방리(王訪里)에서 물어보았기 때문에 그 마을 이름을 왕방리라고 하였다. 권농사(勸農使)를 제수하였고 큰 산 하나를 하사하였기 때문에 그 산을 이름하여 국사봉(國賜峯)이라고 한다. 그 후손은 무과에 급제하여 연일·초계·경주의 영장(營將)과 백령 첨사를 역임하였으며 영사원종일등공신(寧社原從一等功臣)에 등록되었다. 성품이 매우 강직해서 청백리로 이름을 날렸는데 일찍이 강화부 중군(中軍) 때에 공용 면포 한 필을 마상(馬裳)으로 하도록 하였는데 체임될 때를 미쳐 그 마상을 중군청에 도로 갖다 주었다. 그 아들 전기업(全起業)은 정축년(1637) 난리 에 순절하였으니 일이 충렬사 주(註)에 보인다. 그 후손 관해공(觀海公) 전재봉(全在鳳)411)은 일찍이 문과에 합격하여 대간의 청직을 거 쳐서 제주 목사로 나갔다. 물러나서는 그 친척과 자손들이 이곳에 많이 살고 있다. 408) 양도면 인산2리 항주동으로 황골이라고 한다. 황골 동남쪽에 별밭[星田] 마을이 있다. 409) 양도면 인산1리 왕방 마을이다. 410) 전신(생몰년 미상)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호는 사와(謝臥) 411) 전재봉(1834년 출생)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1861년 식년시 병과(丙科) 24 위로 합격하였다.


180. 흥천동(興川洞412)) 岐巖山下是興川기암산 아래에 흥천 마을 있는데, 短竹疎松繞宅邊작은 대와 성근 소나무가 집 주위에 둘러있네. 大冶爐頭金躍否커다란 쇠가마에 쇳물을 끓이니, 犂商鼎賈若紛然쟁기장수 솥장수가 분주히 다녀가네. ○ 이 동네에는 주철(鑄鐵)의 분점(盆店)이 있는데 호미 장사와 솥장사가 많이 모여 왕래한다. ○ 산 이름은 기암(岐岩)이라고 한다. 412) 양도면 삼흥2리 흥천 마을이다. 고려시대에 흥천사가 있었다고 전한다.

181. 산문동(山門洞413)) 山門洞倚碧山松산문동은 푸른 소나무 숲에 의지하고 있는데, 漸覺泉聲瀉兩峯양 봉우리 솟아나는 샘물소리 차츰 들리네. 灌入稻畦能免旱논에 물을 댈 수 있어 가뭄 걱정 면하니, 年年相賀太平容해마다 태평한 모습 서로서로 치하하네. ○ 땅의 형세가 산이 높고 골이 깊어서 샘물이 마르는 일이 없고, 가뭄이 들지 않는다. 413) 양도면 삼흥2리 산문 마을로 흥천 동남쪽에 있다. 이 산문동 부분이 원본에는 106면 ʻ정두동ʼ 뒤에 실려 있으나, <고창서 발문본>의 순서에 따라 이곳으로 옮겼다. 산문동은 흥천동과 인접하여 있다.


182. 존강동(存江洞414)) 存江洞口久停鞭존강동 입구에서 오래토록 머물다가, 因坐南宮舊榻筵남궁씨 옛 터전에 잠시나마 앉아보네. 溪柳庭花分植處시내버들과 정원화초 나누어 심은 곳에, 淸風明月尙依然맑은 바람 밝은 달은 아직도 의연하다. ○ 구춘당(九春堂)의 후손으로 주사를 지낸 남궁혁(南宮金赫)은 이곳에 살았다. 그 아들 남궁경(南宮氵敬)은 나와 매우 친했는데, 지금은 고인이 되었다. 그 자손이 여기에 살고 있다. 414) 양도면 삼흥1리 존강 마을로, 존개이·종개이라고 한다.

183. 건평동(乾坪洞415)) 名是乾坪卽水坪이름은 건평이지만 물 많은 수평인가, 滿堰春波灌稻粳뚝에 가득 봄물 차니 논에 물을 대기 좋다. 且畊且讀諸君子밭 갈면서 책 읽은 이 모두가 군자이니, 聊得斯中一味淸그러한 가운데서 맑은 기운을 얻는구나. ○ 평해 황씨(平海黃氏), 함열 남궁씨(咸悅南宮氏), 강진 안씨(康津安氏), 파평 윤씨(坡平尹氏)가 모두 이곳에 살고 있다. 415) 양도면 건평리이다.

184. 장지포(長池浦416)) 長池春水漲東西장지포 봄물은 동서로 넘쳐나고, 井浦乾坪築兩堤정포와 건평에는 두 둑을 쌓았구나. 欹笠何翁投釣餌삿갓을 쓴 어떤 노인 낚시 바늘 던져놓고, 白鳩飛去影高低나는 백구는 그림자가 높았다가 낮아지네. ○ 제방은 유수 서필원(徐必遠)417)이 쌓은 것인데 물이 항상 얕지 않아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의지하여 생업을 이루어나갔다. 동서에 있는 두 제방은 항상 낚시꾼들이 있어서 취미를 얻고 있을 뿐이다.

416) 양도면 건평리 노고산 북쪽에 있는 갯고랑이다. 417) 서필원(1614∼1671) 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재이(載邇), 호는 육곡(六谷).

185. 진강산 귀운(鎭江山歸雲) 鎭江山色碧如屛진강산 산색은 푸른 병풍을 친 듯 하고, 片片歸雲錦繡形흐르는 조각구름 비단에 수놓은 듯하다. 首智遺墟何處是수지현 옛터는 어디쯤에 있을까, 造翁筆下影丹靑조물주의 붓끝 아래 단청이 그려졌네. ○ 산릉을 두르고 있는 산은 벌려져 있고 굽어 있어서 그 아래에 의지하여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으니 옛날에 진강현(鎭江縣)이 그 아래에 있었다. ○ 고구려의 수지현(首智縣)418)의 터는 진강 남쪽에 있었다. 그 서쪽 5리에 해녕향(海寧鄕)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능곡(陵谷)은 옮겨져서 찾을 수가 없다. ○ 돌아가는 구름[歸雲] 역시 강화부부 10경(景)의 하나이다. 418) 원문에는 수지손(首智孫)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따라 ʻ孫ʼ을 ʻ縣ʼ으로 고쳤다.

186. 목장(牧場) 三百年前設牧場삼백년 이전에 목장이 설치되어, 古稱此地馬多良좋은 말이 많은 곳으로 오래 전부터 불려왔네. 盖聞伐代驄云者듣건대 벌대총이라 불린 말은, 內廐嘶風獨異常궁궐 마구간에서 울부짖는 모습도 예사롭지 않았다네.


○ 옛날에 목장이 있었는데 인조 기축년(1649)에 유수 조계원(趙啓遠)419)이 장계를 올려서 목장을 파하고 농사를 짓게 하자고 하였 으며, 기해년(1719)에는 유수 심택현(沈宅賢)420)이 태복을 지낼 때에 “목장에는 훌륭한 말의 종자들이 있으니 다시 목장을 설치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길상산(吉祥山)이 이곳이다. 세속에 전하기를 “효종이 심양에서 돌아올 때 청나라 황제가 말 한 마리를 돌려주면서 ʻ이것은 너희 나라 진강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가 나라로 돌아갈 때 이 말과 함께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ʼ라고 하였다. 효종은 그 말을 사랑하여 돌아와서는 장차 강을 건너고자 하니 말이 먼저 날아서 건너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비로소 그것이 신령스러운 종자임을 알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일설에는 “효종이 심양에서 돌아올 때 이 목장에서 팔준마를 얻었다.”라고 하기도 한다. 일설에는 “효종이 말 한 마리를 길러서 내구에 두었는데 벌대총(伐大驄)이라고 이름하 였다. 이것은 진강의 종자들이 다른 말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이름을 지은 데에는 특별한 뜻이 있기 때문에 가장 사랑하고 길렀다고 한다. 419) 조계원(1592∼1670)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자장(子長), 호는 약천(藥泉). 420) 심택현(1674∼1736)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여규(汝揆).

상도면(上道面421)) 187. 하일동(霞逸洞) 霞峴西南谷谷幽 하현의 서남쪽은 골짝마다 그윽한데, 山中宰相古今留 재상이 예로부터 이 산중에 머물고 있네. 二公宅址三公墓 두 정승의 집터422)와 세 정승의 무덤423) 있어, 云是江州第一區이곳을 강화도의 ʻ제일구(第一區)ʼ이라고 부른다네. ○ 상도면(上道面)은 강화부 관아 남쪽 35리에 있다. 도촌(陶村) 정유성(鄭維城)424)은 연일 정씨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인 데, 선원면(仙源面) 연동(烟洞) 부분의 주(註)에 보인다. 현종 때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며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묘는 하일리 (霞逸里)의 서쪽 산기슭에 있다. ○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425)는 도촌의 손자이다. 집터가 여기에 있는데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여러 번 조정에서 불렀지만 나아가 지 않았다. 고향에 은거하면서 도학을 온전히 갖추었으며 오조를 거쳐 국태로(國太老)의 학자라고 하였다. 또 하곡(霞谷) 선생이라고 불 리었으며,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의 명을 받들어 지위가 숭록대부 우찬성 겸 성균좨주(崇祿大夫 右贊成 兼 成均祭酒)에까지 올랐고, 죽어서는 문강(文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거처하는 초가집은 비바람을 막지 못하여서 유수 민진원(閔鎭遠)426)이 평소에 선생을 공경하였 기 때문에 집을 지어주었다. 묘는 하현(霞峴)의 동쪽 기슭에 있다. 지금 그 손자인 참판(參判)을 지낸 정원하(鄭元夏)427)가 와서 살고 있다. ○ 영의정을 지낸 간재(艮齋) 최규서(崔奎瑞)428)는 해주 최씨인데 이 집이 진강산 서쪽에 있었다. 집이 매우 허름하여 경상(卿相)의 집 같지가 않았으며 거실에 편액하기를 수운헌(睡雲軒)이라고 하였다. 9언4구의 시가 전해진다. “구름이 산에 있을 때에는 말렸다가 펴지고 펴졌다가 다시 말리고(雲在峀 捲復舒 舒復捲), 사람이 난간에 있을 때에는 잠자다가 깨고 깼다가 다시 잠드네(人在欄 睡復醒 醒復睡). 말리면 잠드는 것은 사람이 산에 있고 구름이 난간에 있을 때이고 (捲則睡 人在峀 雲在欄), 펴지면 깨는 것은 사람이 난간에 있고 구름 이 산에 있을 때라네(舒則醒 人在欄 雲在峀).” 당시 심은 자단(紫檀)나무와 측백나무가 여전히 살아있다. ○ 안동권씨 권개(權愷)429)는 강정(康定) 권철(權轍)430)의 아들이다. 관직은 호조좌랑을 지냈고, 묘는 하곡에 있다.

421) 원본에는 ʻ상도면ʼ이 빠져있으나, 구창서발문본에 따라 삽입하였다. 상도면은 오늘의 양도면에 편입되었다. 422) 정제두와 최규서의 집터를 말한다. 423) 정유성, 정제두, 권개의 무덤을 말한다. 424) 정유성(1596∼1664)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덕기(德基), 호는 도촌(陶村). 425) 정제두(1649∼1736)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

426) 민진원(1664~1736)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세심(洗心). 1705년, 1710년 두 차례 강화유수를 지냈다. 427) 정원하(1855년 출생)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성조(聖肇). 아버지는 연안도호부사 기석(箕錫)이며, 어머니는 풍산홍씨이다. 428) 최규서(1650~1735)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문숙(文叔), 호는 간재(艮齋)·소릉(少陵)·파릉(巴陵). 429) 권개(1530~1568) 강화부사였던 권적의 손자이며 영의정을 지낸 권철의 아들이고, 임진왜란 때 명장 권율의 형이다. 의금부도사·호조좌랑 등을 역 임하였다. 430) 권적(1503~1578)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유(景由), 호는 쌍취헌(雙翠軒). 아버지는 강화부사 적(勣),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며, 율(慄)의 아버지이다.

188. 하촌(霞村*) 霞村卜築幾人基하촌에 집을 짓고 누구 누구 터 잡았나, 南望貂皮一筆奇남쪽의 초피산은 붓끝처럼 기이하다. 閔朴許同三逕月민씨와 박씨가 함께 세 달 지내고서, 桂蓮掛榜又時時과거 시험 함께 보고 함께 급제 하였다네. ○ 남쪽으로는 붓의 형상을 하고 있는 초피산(貂皮山)이 있는데, 여흥 민씨 장령 민응세(閔膺世)의 후손이 많이 살고 있다. 밀양 박씨 진사 박승위(朴承偉)가 이 옹일촌(雍逸村)431)에 살고 있다. 현석공(玄石公)의 손자로서 진사 박선수(朴善壽)도 이곳에 살고 있다.

431) 양도면 하일리 옹일 마을이다. 하일의 남서쪽에 있다.

189. 묵와선생(黙窩先生*) 春風來拜黙窩翁봄바람 쐬면서 묵와선생께 절을 하네, 世世家聲學業崇학업 숭상 가문 명성 대대로 이어온 때문. 識得箇中淸意味사물의 밝은 의미 훤히 알고 있었지만, 時人浮說摠如聾세상의 경박한 말은 귀를 막고 안 들었네. ○ 묵와(黙窩) 민재승(閔載昇)은 문학으로써 가업을 계승하였으며 그 마음은 부드럽고 스스로를 깨끗이 하였다.


190. 능내동(陵內洞432)) 陵內村中草結廬능내촌 가운데에 풀을 엮어 집을 짓고, 金申坐讀古人書김씨와 신씨가 고전을 읽고 있네. 蔭郎庠士何歸速음직 낭관 지낸 그대는 어찌 빨리 돌아가셨나, 尤是情雲鎖舊居정다운 구름만 옛집을 에워싸고 있구나. ○ 강릉 김씨 수창(睡窓)의 후손인 진사 김연의(金演儀)433)와 고령 신씨 죽당(竹堂)의 후손인 교관 신홍구(申鴻求)는 나와 친지로서의 정이 있는 사이이다. 모두 세상 사양하고 추탄(追歎)하였다. 그 아우와 조카는 모두 이곳에 살고 있다.

432) 양도면 능내리이다. 433) 김연의(1856년 출생) 본관은 강릉(江陵). 1891년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 110위로 합격했다.


191. 가릉(嘉陵434)) 一片鎭江碧幾層진강산 한쪽 편에 겹겹의 푸른 기운 감돌고, 白雲多處是嘉陵흰 구름 많은 곳에 가릉이 있다네. 年年杜宇東風淚해마다 두견새는 동풍에 눈물짓고, 每向開花百感增개경을 향할 때마다 만감이 더한다네. ○ 고려 원종(元宗)의 비 순경태후(順敬太后)435)의 능(陵)이다. ○ 개화(開化)는 송도의 옛 이름이다. 434) 양도면 능내리에 있는 고려 24대 원종의 비 순경태후 무덤으로 사적 370호로 지정되어 있다. 435) 순경태후(?∼1236) 고려 원종의 비. 성은 김씨(金氏). 본관은 경주(慶州). 아버지는 약선(若先)이다.


192. 조산동(造山洞436)) 造洞來尋李石翁조산동에 이르러 이석 옹을 찾아가니, 梅蘭菊竹屋西東매란국죽 사군자가 집 주위에 둘러있네. 四時長得春風氣사계절 내내토록 봄기운을 얻었는가, 倚案淸談老亦雄책상 기대어 하시는 말씀 늙었지만 힘이 있네. ○ 여흥 이씨로서 소릉(少陵)의 후손인 이성구(李星九)는 호가 석치(石痴)인데 이곳에 살면서 화초를 가꾸며 스스로를 즐기고 있다. 436) 양도면 조산리이다.

193. 장하동(場下洞437)) 古木春深荷麓村하록촌의 고목에도 봄기운이 완연한데, 權公舊第逈開門권 선생 옛집엔 저 멀리 문 열렸네. 追思四十年前事사십 년 전의 일을 돌이켜 생각하면, 牖我書中自有源내가 쓰는 글솜씨의 연원이 여기 있네. ○ 안동 권씨 환성재(喚惺齋) 권갑만(權甲萬)은 미수(尾叟)의 문인이다. 은거하면서 벼슬하지 않았다. 6세손인 하은공(荷隱公) 권호(權灝)는 문장과 효로써 세상에 드러났는데 내가 일찍이 수학한 적이 있다. 그의 손자인 주사를 지낸 권병두(權炳斗)와 여러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다.

437) 현재의 양도면 도장2리 장아래마을이다. 진강목장의 아래에 있는 마을에서 유래하였다.

194. 청주한씨(淸州韓氏) 鎭江山下列韓門진강산 아래에 한씨 가문 모여 사니, 認是槐亭裕後昆이들은 모두가 삼괴정의 후손이네. 入室眞工司馬老입실 공부 바르게 하여 진사로 늙어 가니, 至今光彩動文垣지금까지 문장으로 빛을 발하고 있구나. ○ 청주 한씨로서 삼괴정 한경린의 후손인 한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그 중에 한형석(韓亨錫)438)은 고종 을유년(1885)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일찍이 문학으로 이름을 떨쳤다.

195. 평해황씨(平海黃氏) 欲問荷軒正悄然하헌 댁을 방문하려니 정녕 숙연하여지네, 穉蘭小屋兩三椽어린 난초 있는 작은 집에 서까래 두세 개 뿐. 眞源覺得淸如許참된 근원 청백함을 깨달아 얻었나니, 薇月藝風度六年미월(薇月) 예풍(藝風)과 함께 6년 세월을 보냈었네. ○ 하헌(荷軒)은 평해 황씨 황장(黃火章)공이다. 충신공(忠臣公)의 7세손이며 무안공(務安公)의 고손이다. 일찍이 문학으로 이름을 떨친 분인데 내가 일찍이 그의 문하에서 6년 동안 수학하였다. 지금은 어린 손자들이 이곳에서 살고 있다. 438) 한형석(1866년 출생) 본관은 청주(淸州). 1885년 식년시 생원(生員) 3등 189위로 합격했다.

196. 석릉(碩陵439)) 碩陵知在鎭江巒석릉이 진강산에 자리함을 아노니, 獨閉空林月影寒빈숲에 홀로 문 닫고 있자니 달그림자 차갑구나. 猗我聖朝封築謹아, 우리나라 조정에서 봉분을 수축하고, 年年奉審地方官해마다 지방 관리가 받들어 살핀다네. ○ 고려 희종440)의 능(陵)이다. 강화부의 4기의 왕릉은 유수 조복양(趙復陽)441)이 찾아내어 봉분을 개축하였다. 10년 마다 예조에 낭관을 파견하여 살피도록 하였으며 지금 지방의 관원들이 해마다 순찰하여 살피고 있다. ○ 고려 태조의 현릉(顯陵)은 왕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 참봉을 두었으며 매년 봄가을로 여러 능을 두루 살폈다. 439) 양도면 길정리에 있는 고려 희종의 무덤으로 사적 제369호로 지정되어 있다. 440) 희종(1181∼1237) 고려의 제21대 왕. 재위 1204∼1211. 이름은 영(韺), 초명은 덕(悳). 자는 불피(不陂). 441) 조복양(1609∼1671)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중초(仲初), 호는 송곡(松谷).강화유수로는 1664년 1월에 부임하여 1665년 2월에 이임하였다.

197. 장두동(場頭洞442)) 場頭洞在野中間장두동은 들판의 가운데에 있는데, 低麓如籬四面環낮은 기슭 울타리처럼 사면을 둘렀네. 列屋東南誰是主동남쪽에 늘어선 집은 주인이 누구일까, 安居樂業摠閑閑안씨들이 생업을 즐기며 사니 모든 것이 한가롭네. ○ 순흥 안씨(順興安氏)가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442) 양도면 도장1리 장두동이다.


198. 추포정(秋浦亭443)) 秋浦亭墟摠緲然추포정 옛터는 아련하기만 하니, 一坪水色一空烟온 들에는 물빛이요 온 하늘에는 연기일세. 堤頭香木人猶指제방위의 향나무를 사람들이 가리키며, 曾繫黃公釣月船일찍이 황공이 낚시배를 묶었었다네. ○ 판서 추포(秋浦) 황신(黃愼)444)의 집터는 상도리(上道里) 추포정(秋浦亭)에 있었다. 정자 터에는 향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지금은 매우 무성하다. 세속에 전하기를 가릉언(嘉陵堰)과 선두언(船頭堰) 두 제방이 아직 쌓여지기 전에 황공은 이곳에서 배를 묶었다고 한다.


443) 양도면 도장리에 있다. 444) 황신(1562∼1617)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사숙(思叔), 호는 추포(秋浦).

199. 가릉포(嘉陵浦445)) 嘉陵春水晩來生가릉벌의 봄물이 늦게야 고여서, 荷鍤紛紛灌稻坪가래질 바삐하여 논에다 물을 대네. 靜聽老農桑下語늙은 농부 뽕나무 밑에서 하는 말 조용히 들어 보니, 風調雨順際昇平풍우가 순조로워야 태평세월 맞을 텐데. ○ 가릉포(嘉陵浦)는 상도(上道), 오동(五洞)의 사이에 있다. 저장 되어있는 물이 항상 부족할까 염려되었으며, 반드시 비가 순조롭게 와야만 풍년을 기약할 수 있다고 한다. 445) 양도면 능내리의 개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