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익선동 한옥마을의 화려한 변화
목차
현재 익선동 한옥마을의 화려한 변화
익선동 한옥마을은 2004년부터 주상 복합 단지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었지만 주민 70퍼센트의 동의를 얻지 못해서 미루어지다가 해제되었다. 2016년말 기준으로 익선동 내 가옥은 153 채, 그 중에 119 채가 1930년전 지어진 보급형 한옥이라고 한다. 과거 도시환경정비사업구역으로 지정된 후 새로운 건축이 금지되면서 최소한의 보수만을 해왔기 때문에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다. 그러나 서울의 곳곳에 재개발이 활발하게 촉친하는 배경에서 이 동네의 변화도 피할 수 없다.
익선동 한옥마을의 본격적인 변화는 2015년부터였으며 크게 4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주택유형 분포의 변화_익선동 한옥마을이 단순한 주거지역에서 상업-거주지로 바꿔가고 있다.
예전에 골목에 숨어져있는 익선동 한옥마을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최근에 통신매체, SNS를 통해 “고즈넉한 옛날 한옥마을”로 알려지면서 젊은 사람들이 익선동을 찾기 시작했다. 2014년부터 익선동 골목에 카페-식당, 공방, 게스트하우스 등 상점들이 들어서면서 이곳의 주택유형 분포의 변화가 시작하였다. 2014년 – 2016년 2년내에 상가 수가 42건에서 101건까지 2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알려진다. [1] 옛멋이 있는 익선동 한옥마을은 이제 젊은 사람들의 장소가 되었으며 이는 전통과 현대가 서로 조합된 독특한 공간으로 변신하고 있다. “개발이 아니 개조이다”는 익선동 한옥마을의 변화에 적합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세 번째는 핫플레이스 (hot place)로 뜨는 익선동 한옥마을의 등장이다.
핫플레이스란 최근 20~30대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코스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곳을 의미한다. 최근에 대중통신방송과 SNS에서 익선동 한옥마을이 많이 알려져 있다. KB국민카드와 빅데이터 분석업체 다음소프트 분석 결과에 따라 서울의 성수동(성동구)과 여의도(영등포구), 망원동(마포구), 익선동(종로구)이 핫플레이스로 급부상한 것으로 나타났다.
네 번째는 익선동 한옥마을 원주민 이주 증가이다.
익선동 한옥마을 재개발 계획이 해체된 후 지역 경제의 침체 우려가 나오기도 했지만 오히려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다. 위에 언급한 변화가 이어져 지역 부동산 가격이 급속히 올라갔다.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됐던 10년 전에는 땅값이 3.3㎡당 3000만원까지 거래가 됐다가 그 후 7~8년간 거래가 뚝 끊겼고, 3.3㎡당 1900만원 정도에 팔려는 사람도 있었다”며 “상권이 생기면서 가격이 회복돼 최근에는 3.3㎡당 4000만원 정도 호가한다”. 익선동 성도부동산 대표 [2] 방문객으로 인해 주민들 일상 생활 침해, 부동산 변동 등의 문제로 많은 원주민들이 나가기 시작했다. 이곳을 떠난 사람들은 매년 평균 100명을 훌쩍 넘어섰다.
익선동 한옥마을의 미래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통적 가치 보존과 경제적 이익(개발) 갈등과 논쟁 가운데서 익선동 한옥마을의 미래에 대해 우려된다. 문화유산 보존은 전세계적 추세라고 하더라도 재개발 과정에서 사라지고 있는 문화유산들도 적지 않다. 보존과 개발을 함께 이룰 수 없는가, 또는 개발은 무조건 경제적 이익인건가 의문이 든다. 익선동 한옥마을은 조선시대 피맛길, 대중문화의 중심지, 한때 서울 사람의 사회적인 유흥명소인 요정 오진암 등 여러 역사적 스토리를 담고 있는 이 곳이 사라지지 않기 위해 보존할 필요가 있다. 거주구역과 상권을 따로 구분해서 낙후된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주민의 삶을 잇기 위해 적합한 대책이 없을까. 서울시와 종로구청의 계획들 중에 4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창덕궁 앞 율곡로~삼일대로~종로~서순라길 일대를 재생하는 “창덕궁 앞 역사인문재생계획”이 있는데 익선동 한옥마을의 미래는 보존지역으로 남아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10년 후에 서울 도심에 익선동 한옥마을을 볼 수 있을까…
한국 최초의 부동산 개발업자“정세권"
정세권(鄭世權, 1888년 4월 10일~1965년 9월 14일)은 일제 강점기 부동산 개발업자로 북촌과 익선동 한옥마을, 봉익동, 성북동, 혜화동, 창신동, 서대문, 왕십리, 행당동 등 경성 전역에 한옥 대단지를 건설했다.
경성의 개발시대
건축왕 정세권의 시대는 일제 강점 후 낡고 오래되고 불편한 전통에서 새롭고 편리하고 현대적인 근대로 급속히 변모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이주하며 도시를 점유하고, 근대식 건물과 거리가 만들어지고, 총독부는 근대적 도시 계획을 기획하며 경성을 디자인하고 있었다. 사람과 말이 다니던 거리에 자동차와 전차가 이동할 수 있게 길을 넓히고 새로운 도로를 개설했다, 전통한옥과 초가집들은 헐리고 서양식 문화주택과 일본식 주택이 들어섰다. 급속한 도시화 과정을 거치며 인구가 과밀해져 경성은 도시 문제, 주거 문제에 휩싸였다. 바야흐로 경성은 곳곳이 파헤쳐지고 헐리고 새 도로와 새 건물이 들어서는 대개발의 시대였다. 조선인 디벨로퍼들은 일본인들에게 밀려나면서 고유의 주거지역과 주거방식을 잃어버리게 된 조선사람들을 위한 한옥 대단지를 건설했다. 정세권이 주도한 한옥 대단지 건설은 기존의 토지나 택지를 쪼개 여러 채 작은 규모의 한옥을 대량 공급해 조선인의 주거지역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또 전통한옥에 근대적인 편리함과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도시한옥(개량한옥)들이 새롭게 공급되며 조선인의 주거환경을 일대 혁신했다. 1970년대까지 북촌을 비롯해 서울 곳곳에 남아 있던 대규모 도시한옥 단지들은 이 시기 경성 개발시대의 유산이다.
활동
1920년대 지금의 익선동 한옥마을(익선동 166번지) 개발을 시작으로 가회동과 삼청동 일대 북촌 한옥마을을 만들고, 봉익동⋅성북동⋅혜화동⋅창신동⋅서대문⋅왕십리⋅행당동 등 경성 전역에 한옥 대단지를 조성한 인물이다. 정세권은 ‘건축왕’이라 불리며 경성의 부동산 지도를 재편하고 도시 스케일을 바꾸었다. 정세권의 경성 개발은 토지를 매입해 대단위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하며 도시 개발과 주택 공급을 담당하는 근대적 디벨로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정세권은 조선 최초의 디벨로퍼라 할 수 있다. 정세권은 시대를 읽는 사업가의 통찰력과 기획력으로 경성 전역의 부동산 개발을 주도했다. 정세권은 전통한옥에 근대적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개량한옥을 대량 공급하며 조선인의 주거지를 확보하고 조선인의 주거문화를 일대 개선한 혁신가였다. [3]
민족운동에 투신
정세권은 자신의 회사인 건양사를 통해 커다란 땅을 매입하여 분할한 후 한옥을 지어 분양하는 방식을 취한 20세기 최초의 한국인 디베로퍼다. 하지만 정세권이라는 인물은 다벨로퍼라는 이력 외에도 다양한 모습으로 역사 속에 등장한다. 조선물산장려회와 조선어학회의 재정적 후원자, 작극적인 활동가였다. 일반 대중을 위한 경제잡지<실생활>을 발간하였고, <우리말 큰 사전> 출간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학교 설립과 기부활동 등 민족교육,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단순히 경제적 차익만을 노린 장사꾼이 아니라, 국가의 경제적 부강, 교육 진흥, 생활 개선을 고민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역사적 인물이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기거할 곳이 마땅치 않던 춘원 이광수에게 집을 빌려주고 주택을 지어줬고 춘원 이광수는 본인의 집을 지은 후 가장 큰 감사의 마음을 정세권에게 표했다. “나는 그(정세권)의 소유인 가회동 가옥을 전세로 빌어서 3,4개월 살았지만, 그가 어떠한 인물인 줄을 잘 몰랐다. 다함ㄴ 가끔 그가 토목 두루마기를 입고 의복도 모두 조선산으로 지어 입고 다니는 것과 머리를 바짝 깎고, 좀 검고 뚱뚱한 영남 사투리를 쓰고 말이 적은 사람인 것만 보았었다. (중략) 조선물산장려를 몸소 실행할 뿐더러 장산사라는 조선물산을 판매하는 상점을 탑골공원 뒤에 두고 조선산 의복과 양복을 장려하고 <<실생활>>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조선물산 장려를 선전하는 인물인 줄을 알았다. 조선식 가옥의 개량을 위하야 항상 연구하여 이익보다도 이 점에 더 힘을 쓰는 희한한 사람인 줄도 알았다. 나는 더욱 정씨의 인격을 존경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인격의 힘이 이처럼 영향이 큰가를 느꼈다. 이것도 내 집 성조에서 얻은 큰 소득 중에 하나다” [4]
참고 문헌
김경민 박재민, 『리씽킹 서울』, 2013, 20세기 최초의 디벨로퍼_서민한옥을 분양하다 김경민,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2017 윤아라미,『익선동 한옥주거지의 형성과정과 건축특성 연구 : 익선동 166번지 사례를 중심으로 = The Foundation Process and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on Hanok Residential Areas』, 2017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기획/신현준.이기웅『서울,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 2016 이에나가 유코, 『북촌 한옥마을의 서울학적 연구』 학위논문(박사), 2011.2 김란기, 『근대 한국의 토착민간자본에 의한 주거건축에 관한 연구: 일제하개량한옥건축업을 중심으로』, <건축역사연구> 1(1), 1992, p. 106~116
익선동 한옥마을 탄생과 역사.문화 가치
익선동 한옥마을이란 어떤 곳인가?
익선동 한옥마을은 서울의 중심 종로에 위치하고 있다. 5호선 종로3가역 3.4번 출구에서 나오면 건너편에 좁은 골목길이 보인다. 차가 끼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골목길이다. 이 평범한 골목길 안에 역사적인 옛 한옥마을의 존재는 흥미로운 발견이다. 10평~30평 규모인 작은 한옥이 백여 채 이상 모여 아늑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인근에 외국인이 많이 찾는 북촌 한옥마을과 달리 규모와 분위기가 크거나 세련되지 않지만 작고 소박하다. 서울시의 1930년대 이전 조성된 유일한 마을로 가장 오래된 한옥마을이기도 하다.
익선동 한옥마을 탄생
일제시기 토지 소유는 크게 변화되었다. 일본인들의 토지 매입, 국가소유지(국유지)와 공동 소유지가 증가하면서 개인 소유지가 줄어들었다. 1917년 기준으로 국가소유지는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민유지 중에 일본인 소유 토지는 35%, 한국인 개인 소유 토지는 28%밖에 안 되었다. 서울 인구가 증가하자 주택을 구하지 못한 주민들이 급증하고 주택난이 벌어졌다. 당시에 기존 주택은 대부분 초가집이라서 생활의 불편과 비위생 등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일반 서민들을 위한 저렴한 가격의 주택 제공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5] 1920년대, 한국 최초 근대 건축가인 정세권은 자신의 회사를 통해 익선동 관할 토지를 대량으로 사서 분할한 후, 평균 30평의 한옥을 지어 공급하였다. 그 당시 주택을 많이 소유한 일본인들이 일본식 주택을 건설하였고 한인 지식인과 부유층은 ‘문화주택’이라 불리는 서양식 주택을 선호하였다. 정세권은 종로통에 일본식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원치 않으며, 100% 전통적인 한옥보다는 개량형 주택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하였다. 익선동 한옥은 당시에 파격적으로 수도와 전기가 들어왔고, 편리한 생활을 위해 공간을 재배치하였으며,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게 대청마루에 유리문을 달고 건축비 절약 등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또한 주택을 분양하고나서 입주자에게 분양금을 한번에 받지 않고 월 단위로 나눠 받았다고 한다. 현재 서민용 주택 구입을 지원하기 위한 금융 정책들이 많이 있지만 그 당시에 공기업이 아닌 일반 민간 회사를 운영한 정세권이 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북촌 가회동이 깔끔하고 아름답기에 보존가치가 있다면, 익선동 한옥은 주거환경을 업그레이드하면 된다. 그리고 대지주들의 북촌 가회동이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면, 서민들을 위해 지었던 익선동 한옥마을의 가치 또한 존중받고 지켜져야 한다.
역사.문화를 품은 익선동 한옥마을
익선동 한옥마을은 조선시대 서울의 중심거리인“운종가”라 불렸던 종로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인근에 창덕궁, 북촌, 경복궁, 인사동, 종묘, 탑골공원 등 조선 500년의 문화.역사를 많이 담고 있다. 익선동 한옥마을은 조선시대 피맛길의 하나였다. 피맛길은 말그대로 말을 피하는 길이라는 뜻이다. 말을 타고 다닌 양반들을 마주할 때마다 인사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일반 백성들이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길이다. 피맛길에 따라 서민들이 좋아하는 저렴한 맛집, 술집들도 자연스럽게 들어셨다. 조선시대에 왕들이 주로 행차했던 길은 종로 외에 돈화문로이기도 하여 돈화문로에 위치한 익선동은 피맛길인 것으로 알려졌다. 낙원동과 함께 익선동은 일제강점기 이후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대중문화의 중심지였다. 일제에 의해 조선왕조의 궁궐이 해체되자, 궁밖으로 나온 궁녀들에 의해 궁중요리, 한복, 음악 등 다양한 궁중문화 지역이 형성되었다. 1970년대에는 국악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아 국악촌으로도 불렸으며 현재까지도 국악, 한복, 맛집 등 곳곳에 흔적이 남아있다. 옛 피맛길의 흔적인 전통맛집, 한복집, 국악 등 익선동 한옥마을 입구 골목이나 부근에 자리를 잡고 있다.[6]
역사를 지닌 익선동 한옥마을에는 세월이 흐르면서 사라진 것이 있다. 지금은 젊은 사람들의 데이터 코스로 유명하지만 60년 전에는 정치인, 기업인들이 많이 찾던 코스 중 하나였다. 여기에 1960년대 유명했던 ‘오진암’ 요정이 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요정은 고급 한정식 요릿집이지만 실제로 기생들이 국악공연을 하는 술자리이자 그 당시의 유흥업소였다. 오진암은 1953년 처음 영업을 시작하였는데 700평 규모로 ‘소궁궐’로 불릴 만큼 건축미가 뛰어난 요정이었다. 1950년~1970년대 한국 밀실 정치 스토리를 간직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였다. 특히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 박성철 제2부 수상이 만나 7.4 남북공동성명을 논의한 곳으로 알려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주 연회를 가졌고 외국인한테 인기가 많았던 곳이기도 하다. 한때 ‘기생 관광의 중심지’라는 사회적 지적을 받기도 했으며 부인할 수 없는 서울의 역사다. 2010년 오진암의 폐업으로 인해 건물이 철거되었으며 그 자리에 비즈니스 호텔 이비스가 들어섰다. [7]. 연합뉴스의 인터뷰에서 오진암 사업관리자인 김석웅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00년까지는 운영할 정도가 됐는데 노무헌 전 대통령 때 성매매 단속을 강화한 이후 서울 시내의 요정이 다 죽고 장사가 잘 안되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관광요정이 10개 있었는데 오진암이 1호였다…” [8]
현재 익선동 한옥마을의 화려한 변화
익선동 한옥마을은 2004년부터 주상 복합 단지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었지만 주민 70퍼센트의 동의를 얻지 못해서 미루어지다가 해제되었다. 2016년말 기준으로 익선동 내 가옥은 153 채, 그 중에 119 채가 1930년전 지어진 보급형 한옥이라고 한다. 과거 도시환경정비사업구역으로 지정된 후 새로운 건축이 금지되면서 최소한의 보수만을 해왔기 때문에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다. 그러나 서울의 곳곳에 재개발이 활발하게 촉친하는 배경에서 이 동네의 변화도 피할 수 없다.
익선동 한옥마을의 본격적인 변화는 2015년부터였으며 크게 4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주택유형 분포의 변화_익선동 한옥마을이 단순한 주거지역에서 상업-거주지로 바꿔가고 있다.
예전에 골목에 숨어져있는 익선동 한옥마을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최근에 통신매체, SNS를 통해 “고즈넉한 옛날 한옥마을”로 알려지면서 젊은 사람들이 익선동을 찾기 시작했다. 2014년부터 익선동 골목에 카페-식당, 공방, 게스트하우스 등 상점들이 들어서면서 이곳의 주택유형 분포의 변화가 시작하였다. 2014년 – 2016년 2년내에 상가 수가 42건에서 101건까지 2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알려진다. [9] 옛멋이 있는 익선동 한옥마을은 이제 젊은 사람들의 장소가 되었으며 이는 전통과 현대가 서로 조합된 독특한 공간으로 변신하고 있다. “개발이 아니 개조이다”는 익선동 한옥마을의 변화에 적합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세 번째는 핫플레이스 (hot place)로 뜨는 익선동 한옥마을의 등장이다.
핫플레이스란 최근 20~30대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코스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곳을 의미한다. 최근에 대중통신방송과 SNS에서 익선동 한옥마을이 많이 알려져 있다. KB국민카드와 빅데이터 분석업체 다음소프트 분석 결과에 따라 서울의 성수동(성동구)과 여의도(영등포구), 망원동(마포구), 익선동(종로구)이 핫플레이스로 급부상한 것으로 나타났다.
네 번째는 익선동 한옥마을 원주민 이주 증가이다.
익선동 한옥마을 재개발 계획이 해체된 후 지역 경제의 침체 우려가 나오기도 했지만 오히려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다. 위에 언급한 변화가 이어져 지역 부동산 가격이 급속히 올라갔다.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됐던 10년 전에는 땅값이 3.3㎡당 3000만원까지 거래가 됐다가 그 후 7~8년간 거래가 뚝 끊겼고, 3.3㎡당 1900만원 정도에 팔려는 사람도 있었다”며 “상권이 생기면서 가격이 회복돼 최근에는 3.3㎡당 4000만원 정도 호가한다”. 익선동 성도부동산 대표 [10] 방문객으로 인해 주민들 일상 생활 침해, 부동산 변동 등의 문제로 많은 원주민들이 나가기 시작했다. 이곳을 떠난 사람들은 매년 평균 100명을 훌쩍 넘어섰다.
익선동 한옥마을의 미래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통적 가치 보존과 경제적 이익(개발) 갈등과 논쟁 가운데서 익선동 한옥마을의 미래에 대해 우려된다. 문화유산 보존은 전세계적 추세라고 하더라도 재개발 과정에서 사라지고 있는 문화유산들도 적지 않다. 보존과 개발을 함께 이룰 수 없는가, 또는 개발은 무조건 경제적 이익인건가 의문이 든다. 익선동 한옥마을은 조선시대 피맛길, 대중문화의 중심지, 한때 서울 사람의 사회적인 유흥명소인 요정 오진암 등 여러 역사적 스토리를 담고 있는 이 곳이 사라지지 않기 위해 보존할 필요가 있다. 거주구역과 상권을 따로 구분해서 낙후된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주민의 삶을 잇기 위해 적합한 대책이 없을까. 서울시와 종로구청의 계획들 중에 4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창덕궁 앞 율곡로~삼일대로~종로~서순라길 일대를 재생하는 “창덕궁 앞 역사인문재생계획”이 있는데 익선동 한옥마을의 미래는 보존지역으로 남아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10년 후에 서울 도심에 익선동 한옥마을을 볼 수 있을까…
사진자료
- 익선동 한옥마을 원출저: KBS2 '다큐멘터리 3일JPG
서울 도심 숨어져있는 익선동 한옥마을, [11]
- 피맛길 (짙은 선이 익선동 166번지의 피맛길) 출저 서울역사박물관.jpg
피맛길 (짙은 선이 익선동 166번지의 피맛길), 출저 서울역사박물관
- 소박한 거주공간 주민집들.jpg
소박한 거주공간_ 주민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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