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암스트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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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미국 뉴올리언스 출신의 가수, 작곡가, 재즈 음악가이다.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활동하였으며,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잘 알려진 트럼펫 연주자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가난한 흑인의 아들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중, 계부의 권총을 들고 다녔다가 체포되어 잠시 소년원에 들어갔다 나오기도 했다.[1] 소년원에서 처음으로 코넷과 트럼펫을 배웠고, 1922년에는 시카고로 가서 킹 오리버스 크리올 재즈 악단에서 코넷을 연주했다. 그후 악기를 트럼펫으로 바꾸어 점차 인기가 높아졌으며, 1925∼1928년 자신의 악단인 '핫 파이브(Hot Five)' 및 '핫 세븐(Hot Seven)'의 이름으로 취입한 그의 레코드들은 재즈 역사상 불후의 명연주로 꼽히고 있다. 1931년에는 대악단을 조직, 이듬해부터 여러 차례 유럽여행을 하여 큰 성공을 거두고 1947년에는 악단 '올스타즈'를 결성하여 죽기 전까지 활약하였다.[2]

트럼펫 연주에 있어서 혁신자로서 뿐만 아니라 기교가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그는 누구도 따르지 못하는 기록을 세우게 되는데 높은음을 연속적으로 무려 280회나 소리 냈다. 그는 주로 정격 스윙 스타일의 트럼펫 연주자로 기억되는데 이로 말미암아 노소를 막론한 전 세계인들로부터 숭배를 받았다. 어떤 비평가들은 그를 “재즈의 아인쉬타인”이라고 일컬었다.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순히 그를 트럼펫 연주를 통해서 엄청난 생명력과 스타일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친절하고 정력적인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3]

50년 가까이 현역으로 활약했던 그는 폐암과 심근경색을 앓던 중 뉴욕 퀸스 자택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7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워커힐쇼 공연

1963년 4월 8일부터 22일까지 워커힐호텔 개관 기념 축하 공연에 참가하기 위해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신문과 방송은 워커힐 개관과 함께 루이 암스트롱 일행의 공연과 동정을 크게 다루었다. 루이 암스트롱은 일행들과 함께 4월 8일 오전 6시 CPA 항공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했고 퍼시픽 홀에서 노래와 트럼펫의 연주를 선보였다.[4]

당시 15세였던 윤복희가 이 공연에서 루이 암스트롱을 만났다는 에피소드는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미8군 무대에 출연하던 윤복희는 루이 암스트롱의 모창을 해서 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공연 마지막 무대에서는 루이 암스트롱의 목말을 타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5]

루이 암스트롱의 출연료는 7명의 밴드, 여가수 줄 브라운 등 일행의 하루 2회의 2주일간 공연비, 변호사와 스텝을 포함한 14명의 개런티 6만 달러, 항공료 1만 8,266 달러, 숙식비 등을 포함하여 총 8만8,330달러를 지급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대우였고 루이 암스트롱의 쇼는 2주 동안 모두 3,863명이 관람했다.[6]

영상 자료

관련 문서

주석

  1. "루이 암스트롱", 위키백과.
  2. "루이 암스트롱", 두산백과.
  3. "루이 암스트롱", 『세계악기사전』, 한국사전연구사, 2000.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
  4. 이상연, 『공연관광 효시 워커힐쇼의 사적 변천과정 고찰』,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예술경영학과 예술경영전공 석사학위 논문, 2015, 114쪽.
  5. "루이 암스트롱 목말 타고 노래한 윤복희… 酒黨들엔 '꿈의 성지'", 문화일보, 2013.10.11.
  6. 위의 논문, 1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