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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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12 이지형 (토론) 사용자의 2014년 6월 17일 (화) 17:23 판
요약
- 향촌사회에 생활근거를 둔 사족(士族)과 백성이 주체가 되어 면·동·이를 기본단위로 설립한 초중등 단계의 사설교육기관.
내용
- 논자에 따라서는 고구려시대의 경당(扃堂)과 같은 학교제도를 서당교육의 출발로 이해하기도 한다. 고구려에서는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太學)을 세워 관학교육(官學敎育)의 출발로 삼는 한편, 민간교육기관으로서 경당을 두었다. 중국의 사료(史料)인 ≪신당서 新唐書≫와 ≪구당서 舊唐書≫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구려 사람들은 책을 사랑하여 벼슬아치 집에서 평민의 집에 이르기까지 저자거리에 큰 집을 지어 이를 경당이라 부르고, 혼인하기 전의 자제들이 여기에서 밤낮으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경당에서는 문무겸비의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이는 신라의 화랑도와 마찬가지로 교육기관인 동시에 청소년들의 결사조직체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지닌 맹점은 경당의 사회적인 역할이 과연 어느 정도로 서당의 사회적 역할과 일치하였는가를 명확히 해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앞으로 경당에 대한 정밀한 성격규명이 있은 다음이라야 서당과의 상호 동질성과 이질성이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신라에서도 설총(薛聰)이 경서(經書)를 이두로 풀어서 제생(諸生:여러 학생)을 가르쳤다고 하였으니, 그가 가르친 곳이 사숙일 가능성이 짙고, 이 또한 서당교육의 연원의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는 경관(經館)과 서사(書社)라는 서당 형태의 교육기관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 서당의 사회적 의미가 증대한 것은 16세기 사림파의 등장과 시기를 같이 하는 것으로, 중종대 사림파의 향약보급운동과도 일련의 연관성을 지닌다. 16세기 서당 설립의 주도 세력은 대부분 당시 향촌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던 명문사족 출신인 대토지 소유자였다. 예를 들면, 안동의 의성 김씨(義城金氏) 가문, 고평(高坪)의 청주 정씨(淸州鄭氏) 가문, 의성의 함양 박씨(咸陽朴氏) 가문 등이 그 전형적인 사례들이다. 당시 서당 설립의 주도 세력의 신분은 입사(入仕:벼슬한 뒤에 처음으로 그 벼슬자리에 나감) 이전의 생원·진사들이 주류였고, 설립의 명분은 대체로 반상(班常:양반과 상사람) 구별을 비롯한 유학적 질서율을 향촌사회에 정착시키려고 하는 데서 찾고 있다. 서당의 교육내용은 고급 성리서(性理書)를 위주로 하거나 과거응시를 목적으로 하는, 이른바 고제적 서당(高弟的書堂)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한편 서당의 설립은 관(官)의 지원을 최대한 배제하고, 경내 백성들의 공동체적 일체감 속에서 민간자산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양란 후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사족들은 약화된 재지기반을 강화하는 방안으로 서당을 중심으로 관권 및 외부 사림과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 오늘날 서당은 크게 세가지 유형으로 나뉘는데, 대부분은 서당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초보적인 수준부터 중·고급 수준까지 한자 능력 습득을 목적으로 하는 사설학원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이 곳에서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예와 예절교육을 담당하기도 하며, 방학을 이용한 특별강좌를 운영하기도 한다. 두 번째로는 전통적인 서당 교육방법을 고수하며, 한자로 된 고전을 능숙하게 해독해낼 수 있는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서당이 극소수 존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인터넷의 빠른 보급과 확산에 힘입어 사이버 서당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로 기존의 서당이나 한학연수원에서 운영하는 것으로서, 한자인구의 저변 확대라는 점에서 향후 역할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