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랑 망해사(望海寺)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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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gyung kang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11월 18일 (수) 17:0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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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용가 및 그에 관한 설화는 고려 승려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2권 기이편 ‘처용랑 망해사’조에 남아있다.
  • 『삼국유사』에 전하는 처용가는 노래를 만든 주인공 처용랑의 행적과 함께 그 기록을 담고 있는 설화로써 처용랑 망해사’조는 헌강왕의 개운포 행차에 이어
    처용설화가 서술되고 이어 망해사 창건설화가 수록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역사적인 사실과 설화적 상상력의 복합적 표현이다.


              <처용랑 망해사(處容郎 望海寺)>
내용
【第四十九憲康大王之代, 自京師至於海內, 比屋連墻無一草屋, 笙歌不絶道路, 風雨調於四時. 於是, 大王遊開雲浦(在鶴城西南今蔚州), 王將還駕, 晝歇於汀邊, 忽雲霧冥曀, 迷失道路. 怪問左右, 日官奏云, 此東海龍所變也, 宜行勝事以解之. 於是, 勅有司, 爲龍刱佛寺近境, 施令已出, 雲開霧散. 因名開雲浦. 東海龍喜, 乃率七子現於駕前, 讚德獻舞奏樂. 其一子隨駕入京, 輔佐王政, 名曰處容. 王以美女妻之, 欲留其意, 又賜級干職. 其妻甚美, 疫神欽慕之, 變爲人, 夜至其家, 竊與之宿. 處容自外至其家, 見寢有二人, 乃唱歌作舞而退. 歌曰,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肹隱吾下於叱古, 二肹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時, 神現形, 跪於前曰, 吾羨公之妻, 今犯之矣. 公不見怒, 感而美之, 誓今已後, 見畫公之形容, 不入其門矣. 因此, 國人門帖處容之形, 以僻邪進慶. 王旣還, 乃卜靈鷲山東麓勝地置寺, 曰望海寺, 亦名新房寺, 乃爲龍而置也. 又幸鮑石亭, 南山神現舞於御前, 左右不見, 王獨見之. 有人現舞於前, 王自作舞, 以像示之. 神之名或曰祥審, 故至今國人傳此舞, 曰御舞祥審, 或曰御舞山神. 或云, 旣神出舞 審象其貌, 命工摹刻, 以示後代, 故云象審. 或云霜髥舞, 此乃以其形稱之. 又幸於金剛嶺時, 北岳神呈舞, 名玉刀鈐. 又同禮殿宴時, 地神出舞, 名地伯級干. 語法集云, 于時, 山神獻舞, 唱歌云, 智理多都波都波等者, 盖言以智理國者, 知而多逃, 都邑將破云謂也. 乃地神·山神知國將亡, 故作舞以警之, 國人不悟, 謂爲現瑞, 耽樂滋甚, 故國終亡.
해설
제49대 헌강대왕 시대에 서울로부터 동해안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이어져 있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으며, 풍악과 노래가 길에서 끊이지 않고 기후는 사철 순조로웠다.

왕이 개운포(지금의 울주)에 나갔다가 돌아올 때 낮에 물가에서 쉬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길을 잃을 정도였다. 이를 이상히 여겨 좌우 신하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되 이것은 동해용의 조화이므로 좋은 일을 행하여 풀 것이라 하였다. 이에 왕은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하였다.

왕명이 내리자 구름이 개이고 안개가 흩어졌으므로 개운포라 이름을 지었다. 동해용이 기뻐하여 아들 일곱을 데리고 왕 앞에 나타나서 덕을 찬양하고 춤을 추며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임금의 정치를 도왔는데 그의 이름을 처용이라 하였다. 왕은 처용에게 미녀를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급간(級干)이라는 벼슬을 주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역신(疫神)이 흠모하여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의 집에 가서 몰래 같이 잤다. 처용이 집에 돌아와 자리에 두 사람이 누웠음을 보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물러나갔다. “동경 밝은 달에 밤새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다, 둘은 내 것이고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이지만 뺏겼으니 어찌 할꼬.”라 하였다. 그 때에 역신이 형체를 눈앞에 드러내어 꿇어앉아 이야기하되,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지금의 실수를 저질렀는데 공이 화내지 아니하니 감격하여 아름답다고 여기는 바이며, 오늘 이후로는 맹세코 공의 형용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였다. 이로 인하여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사악한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를 맞아들였다.

왕이 궁으로 돌아와 靈鷲山(영취산) 동쪽 기슭의 땅을 택해 절을 세우고 이름을 望海寺(망해사) 또는 新房寺(신방사)라고 하였으니 이는 용을 위하여 세운 것이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