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령장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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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10월 22일 (목) 12:5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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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 백산서원본 하연부인 초상



정의

번령(翻領)은 단령(團領)의 깃을 밖으로 젖혀 입는 호복(胡服)의 한 양식이다. 무주 백산서원본 초상화에서 하연부인 성주이씨(星州李氏, 1380~1465)가 입고 있는 겉옷은 번령장삼으로, 젖혀진 깃으로 인해 안감이 드러나 보인다. 이러한 양식의 번령장삼은 조선전기에 외명부, 여기(女妓), 반가 부인 등이 착용하였다.

내용

외명부 예복

태조 이성계(李成桂)와 신의왕후(神懿王后) 사이에서 태어난 경신공주(慶愼公主, ~1426)의 초상화<갤러리 참조>에서 하연부인(1380~1465)의 번령장삼과 유사한 형태의 옷을 볼 수 있다. 경신공주는 겉깃이 젖혀진 흑색의 번령장삼을 입고 있다. 조선초기에는 높은 신분의 외명부들이 번령장삼을 예복으로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 관복

성종 24년(1493) 편찬된 『樂學軌範』 권9 「女妓服飾」에는 번령장삼과 형태가 비슷한 흑장삼(黑長衫) 도설이 실려있다. 도설에 따르면, '장삼은 흑라(黑羅) 혹는 사(紗)로 만들고 소매는 걷어올린다.(長衫, 以黑羅或紗爲之, 捲袖.)'라고 하였다. 조선전기에는 번령장삼이 여기(女妓)의 관복으로 착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중국 황제의 옷과 색이 같다는 이유로 여기의 황색 장삼을 조색(皀色)으로 바꾸도록 한 일이 있었고,[1] 태종대에는 정재(呈才) 때 창기(倡伎) 들이 임금 앞에서 홍색을 입었으므로, 흑색을 쓰라고 명한 적이 있었으며,[2] 세종대에는 내연(內宴)에서 창기(娼妓)들이 회색 장삼을 입었다는 이유로 벌을 내리기도 하였다.[3] 그러나 점차 여기 관복의 색상에 대한 금제(禁制)도 조금씩 변해간 것으로 보인다. <기영회도(耆英會圖)>에서 흑색이 아닌 황색 번령장삼을 입고 춤을 추는 여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반가 부인 염습의

안동 정상동 일선문씨 묘, 대전 유성구 용인이씨 묘에서 16세기 번령장삼이 출토되었다. 신의경(申義慶, 1557~1648)『喪禮備要』에 '여상(女喪)에는 원삼(圓衫)이나 몽두의(蒙頭衣), 장오자(長襖子)를 쓴다.(女喪, 則圓衫或蒙頭衣·長襖子.)'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근거로 반가 부인의 묘에서 출토된 번령장삼을 몽두의로 보는 견해가 있다.[4]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외명부 번령장삼 A는 B를 착용하였다 A ekc:wears B
여기 번령장삼 A는 B를 착용하였다 A ekc:wears B
반가 부인 번령장삼 A는 B를 착용하였다 A ekc:wears B
『악학궤범』 번령장삼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번령장삼 염습 A는 B에서 사용되었다 A ekc:isUsedIn B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世宗實錄』 109권, 세종 27년 8월 6일 정미 5번째기사 1445년 명 정통(正統) 10년.
  2. 『太宗實錄』 34권, 태종 17년 7월 7일 경신 3번째기사 1417년 명 영락(永樂) 15년.
  3. 『世宗實錄』 111권, 세종 28년 1월 3일 신미 2번째기사 1446년 명 정통(正統) 11년.
  4. 이은주, 「조선전기 여성용 장삼의 형태와 용도에 관한 시론」, 『국학연구』 제 38호, 한국국학진흥원, 2019, 213쪽.
  5. 김소현,『조선왕실 여인들의 복식』, 민속원, 2017, 307쪽.
  6. 국립국악원, 『樂學軌範』, 호사문고 소장본, 2011, 445쪽.
  7. "<기영회도(耆英會圖> ", 국립중앙박물관.
  8. 대전시립박물관 소장.
  9. 대전시립박물관 소장.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