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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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10월 20일 (화) 20:3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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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대례복
(王妃의 大禮服)
김아람 컬렉션
대표명칭 왕비의 대례복
한자표기 王妃의 大禮服
이칭별칭 적의
분류 혼례복
착용신분 왕비
착용성별 여성


인조와 계비인 장렬왕후의 혼례

장렬왕후는 1638년 12월 3일 인조[1]와 혼례를 치르고, 인조의 계비가 되는데, 이 혼례시기는 1592년 임진왜란, 1598년 정유재란인 왜와의 전쟁을 치르고, 또 몇 년 후인 1637년 1월에 끝난 병자호란의 전란 후에 치러진 왕실의 첫 혼례의례였다.

장렬왕후 혼례 당시의 상황


장렬왕후와 인조의 혼례 당시 넉넉하지 못한 왕실제정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이 의궤와 등록에서 보인다.
의궤는 (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2], 등록은 (장렬왕비가례계제사등록틀:IBSN979-11-5866-25-8)[1]에 기록되어있으며, (인조실록)의 기록으로도 혼례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하는 여러 내용들이 보인다.

장렬왕후 혼례 기록

1.

  1. 1.장렬왕후와 인조의 혼례기록인 (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의 기록에는 1638년 10월 3일 삼간택 시행을 위해 예조에서 올린 계사에 대한 내용을 시작으로 가례도감설치, 별궁장소 결정, 혼례의 정사와 부사 임명, 왕비 최종 간택, 그리고 6례에 대해서 기록되어있으며, 12월 3일 친영과 동뢰연으로 왕실의 대혼을 마무리하는 기록이 보인다.
    1. 1.왕과 왕비의 혼례절차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혼례절차는 세종실록오례의와 국조오례의의 「가례(嘉禮)」‘납비의(納妃儀)’에서 규정된다. 절차는 크게 사전의식, 본의식, 사후의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사전의식은 간택(揀擇)과 택일(擇日)이고, 본의식은 납채(納采), 납징(納徵), 고기(告期), 책비(冊妃), 명사봉영(命使奉迎) 또는 친영(親迎) , 동뢰(同牢)의 육례(六禮)[3]이다. 명사봉영은 왕이 친영을 하지 않고 신하를 대신 보내 왕비를 맞아오는 것으로 중종 이전에 시행하였고, 중종부터는 왕이 친영을 시행하였다.
사후의식은 왕비조왕대비(王妃朝王大妃), 왕비수백관하(王妃受百官賀), 전하회백관(殿下會百官), 왕비수내외명부조회(王妃受內外命婦朝會) 世宗實錄 「五禮」 ‘納妃儀’: “王妃朝王大妃, 王妃受百官賀, 殿下會百官, 王妃受外命婦朝會”가 있다. 왕비가 대비에게 알현하는 예인 왕비조왕대비 절차는 세종실록오례의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국조오례의에는 누락되어 있다.


  1. 2.장렬왕후와 인조의 또 다른 혼례기록인 (장렬왕비가례계제사등록)의 기록에는 의궤의 기록에서 보이지 않는 장렬왕후의 삼간택 시행 내용이 기록되어있으며, 전란후의 왕실제정을 알 수 있는 혼례의례의 복식을 감할것을 논의하는 기록과 여러 기물들을 줄여야한다는 내용 또한 포함되어있다.
  1. 인조는 정비(正妃)인 인열왕후(1594~1635)의 국상(國喪)을 1635년에 치렀다. 국상을 치른 그 이듬해인 1636년 12월에는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1637년에 1월까지 계속되다가 그달 30일 마무리되었다. 인조와 계비의 국혼은 전란이 어느 정도 복구될 즈음 대신들이 인조에게 계비를 들일 것을 주청한다.

2.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2017)|IBSN=979=11=5866=25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