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조선왕실록

DH 교육용 위키
Migyung kang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10월 16일 (금) 19:03 판

(비교) ← 이전 판 | 최신판 (비교) | 다음 판 → (비교)
이동: 둘러보기, 검색
시기 기록
태종 14년 12.30 (기해) 제야(除夜) 전일에 구나(驅儺)하는 것은 이것은 본조(本朝)의 옛풍속이나 옛 글에 어그러짐이 있다. 금후로는 제야일(除夜日) 초혼(初昏)에 시행하여
야반(夜半)에 이르러 그치게 하는 것으로 길이 항식(恒式)을 삼고, 이어서 중외(中外)로 하여금 두루 알게 하라.”
세종 7년 12.29 (갑오) 이날 밤에 나례(儺禮)를 올리고, 방포(放炮)하고, 서운관(書雲觀)에서는 구역 의식(驅疫儀式)을 거행하였으며, 전악서(典樂署)에서는 처용무(處容舞)를 올렸다.
세종 25년 1.25 (신사) “이 뒤로 처용무(處容舞)에 기생을 그만두고 남자 재인을 쓰라.”하다.
연산군 3년 12.28 (을미) 이날 밤에 또 삼전(三殿)을 받들고 인양전(仁陽殿)에 납시어 처용무(處容舞)를 구경하는데, 명하여 여러 군(君)과 부마(駙馬)를 불러 입시하게 하였다.
그리고 창우(倡優)들에게 물건을 차등 있게 나누어 주었다.
연산군 5년 3.8 (정묘) “무릇연향(宴享)의 정재(呈才) 때에, 처용무(處容舞)를 재차 추게함이 어떠한지 정승들에게 문의하라.” 하였다.
연산군 10년 12.13 (기사) 처용무(處容舞)는 전대의 유풍(遺風)으로 지금도 마땅히 써야 할것이니, 기녀들에게 가르치고 연습시켜 한결같이 연향 때에 사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연산군 10년 12.30 (갑자) 왕이 명정전(明政殿)에 납시어 나례(儺禮)를 관람하고, 또 처용무를 관람하였다.
연산군 11년 1.1 (정해) 왕이 명정전(明政殿)에서 망궐례(望闕禮)를 행하고 왕대비전(王垈妃殿)에 표리(表裏)를 올리고, 백관(百官)의 하례(賀禮)를 받았으며, 인정전(仁政殿)에
임어(臨御)하여 회례연(會禮宴)을 베풀고, 처용무(處容舞)·무학(舞鶴) 등의 유희(遊戲)를 구경하였다.
연산군 11년 4.7 (임술) 왕이 술에 취하면 기꺼이 처용의를 입고서 처용무를 추며, 또한 스스로 노래하기도 하였다.
연산군 11년 7.21 (갑진) “처용(處容)을 풍두(豊頭)로 고쳐 부르라.”하였다.
연산군 11년 12.4 (갑인) “설[歲時]에는 풍두무(豐頭舞)를 구경하였으니, 광희(廣熙)는 쓰지 말고 흥청에서 키가 늘씬하고 자색이 있으며 호기롭고 건강한 자 30인을 가려서 속히
가르치게 하라.” 하였다.
연산군 12년 1.2 (임오) “열흘마다 풍두무 잘 추는 자를 5인씩 간택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왕이 풍두무를 잘 췄으므로, 매양 궁중에서 스스로 가면(假面)을 쓰고 희롱하고
춤추면서 좋아하였다.
중종 10년 12.22 (갑술) “정조일(正朝日)의 양재처용(禳災處容)은 하지 말라.”
중종 13년4.1 (기사) “아뢴 말이 다 옳다. 처용무(處容舞) 등은 아뢴 말과 같이 없애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옳지 못한 옛 습관이 이것뿐만 아니라 필시 많을것이니 한꺼번에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숙종 40년 9.19 (정사)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진연례(進宴禮)를 거행하였다…(중략) 처용무(處容舞)를 추고 나서 악을 거두었다.
영조 41년 10.11 (계축)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몸소 술잔을 받았다…(중략) 차례로 술잔을 드리고 나자, 음악이 그치고 문무무가 물러났으며, 처용무(處容舞)가 나아가니,
음악이 연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