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강화화문석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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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rondesig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6월 25일 (화) 03:41 판
개요
해설
세종실록
<세종실록> 12년(1430) 2월 정유를 보면 명나라에 대한 세공품목이 적혀 있다. 다음과 같다.
“석류로는 만화석, 만화방석, 염석, 황화석, 해화석이 있으며 해동역사 교빙31에는 중종 26년 (1531년)에 공물 중 석류로 황제에게 용문염석 20매, 황화석20매, 만화방석20매, 잡채화석 20매, 이며 황후에게 황화석10매, 만화방석10매, 잡채화석 10매라 하였다.” [1]
세종실록 제29권 7년 8월 22일 각 도에서 장흥고로 납부하는 돗자리가 5,148장인데 현재 634장이 있다. 1년 동안 필요한 돗자리가 2,215에 불과하니 경기도에서 바치는 480장은 없애기를 청한다.
임원경제지
<임원> 십육31 섬용31 권3 가거31구에 용수석 항에서 또 <금화경득기>의 글을 인용하여 용수석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일본 에도시대에도 우리나라 통신사가 가지고 간 대화석이 있었음을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임원십육지』에서는 「금화경독기」를 인용하여 예안 사람들이 오채용문석(五彩龍文席)을 잘 만들어 공물로 바쳤다고 한다. 그 밖에 『규합총서』에서는 강화의 교동을 화문석의 산지로 꼽고 있다. 화문석은 원래 부드럽고 잘 꺾이지 않는 용수초로 경상도지역에서 많이 제작했다고 하지만 현재는 보성 용문석만이 그 명맥을 잇고 있으며, 화문석으로 유명한 강화에서는 재료를 왕골을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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