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도직물 굴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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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민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6월 17일 (월) 22:4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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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심도직물 터에 남아있는 굴뚝으로 1947년부터 2005년까지 국내 굴지의 직물회사로 명성이 높았던 심도직물(주)이 자리잡았던 곳으로 강화주민들이 용흥궁 설치를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현재 김상용 순절비 바로 뒤에 위치해있다. 강화군청이 설치. 강화군은 지난 2005~2008년 심도직물 터에 공원을 조성했고, 30미터에 달했던 굴뚝의 끝부분을 따로 남겨 심도직물을 기념하고 있다. '60~70년대에 직원이 1천200명 정도였고 거쳐 간 사람들 수만 해도 1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건립 배경

옛 심도직물 공장이 있던 자리에 용흥궁 공원이 조성되자, 강화 주민들과 가톨릭교구에서 심도직물을 기억하고자 세웠다. 조형물에는“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는 성경 말씀을 새겼다. 조형물 앞에 놓인 표석에는 “가톨릭 노동사목의 시작”이며 “1968년 산업화의 그늘에서 고통당하던 심도직물 등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한국 천주교회와 가톨릭 노동청년회가 그 첫 발을 내디딘 곳”이라고 써 의미를 강조했다.


심도직물 기록

'심도(沁都) 견직 공업 주식회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

경기사전에 따르면 심도직물공업사의 소재지는 강화면 궁청리 394이고, 종업원수는 230명이었다. "전 국회의원인 김재소가 출자 경영하는 업체로 현재 역직기 210대의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1천200여 명의 종업원을 고용하고 있는데 생산되는 견직물은 국내는 물론 외국으로 수출되고 있다."심도직물은 인천 노동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천민주평화인권센터에서 펴낸 '인천민주화운동사 연표'를 보면 1967년 5월 14일 강화도 심도직물 노동조합(전국섬유노동조합 직할분회)이 결성된 이후 천주교 인천교구와 함께 해고 노동자의 복직투쟁 등이 전개됐다. 천주교 인천교구 한상욱 노동사목위원회 부위원장은 "심도직물 사건은 한국 천주교가 사회참여를 시작한 출발점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또한, 로마교황청과 연계해 한국의 노동 문제를 국제 문제로 확대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1] 인용 오류: <ref> 태그를 닫는 </ref> 태그가 없습니다

심도직물 노조사건

심도직물 사건은 1967년 5월 심도직물 노동자들이 가톨릭노동청년회(가노청) 회원 중심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하면서 불거진 노사 갈등으로 1968년 2월까지 계속됐다. 당시 천주교 주교단은 1968년 2월 9일 ‘사회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제목의 공동 성명을 내놓으며 노동자들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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