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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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돈이(周敦頤)
주돈이(1017~1073)의 字는 茂叔, 號는 濂溪이다. 원 이름은 敦實이었지만 송나라 英宗(재위 1063~1067)의 초명인 宗實을 피휘하여 敦頤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표 저작으로 태극도설과 통서가 있다. 기타 정보는 추가하거나 다음의 링크를 참고할 것. [1]
宋史道學傅序
- 道學之名, 古無是也. 三代盛時, 天子以是道為政教, 大臣百官有司以是道為職業, 黨庠術序師弟子以是道為講習, 四方百姓日用是道而不知. 是故盈覆載之間, 無一民一物不被是道之澤, 以遂其性. 於斯時也, 道學之名, 何自而立哉?
- ‘도학’이라는 명칭은 예전에는 없었다. 삼대의 성대한 시절에 천자는 이 도를 정교로 삼았고, 대신·백관·유사는 이 도를 직분으로 삼았으며, 黨·庠·術·序의 스승과 제자는 이 도를 가르침으로 삼았고, 사방의 백성들은 날마다 이 도를 쓰면서도 알지 못했다. 이 때문에 천지간을 가득 채운 것 중에 한 사람·한 사물도 이 도의 은택을 입어 그 본성을 이루지 못한 것이 없었다. 당시에 도학이라는 명칭이 굳이 무엇을 통해 세워졌겠는가?
- 文王、周公既沒, 孔子有徳無位, 既不能使是道之用漸被斯世. 退而與其徒定禮樂, 明憲章, 刪詩、修春秋, 讃易象, 討論墳、典, 期使三五聖人之道昭明於無窮. 故曰: “夫子賢於堯舜, 逺矣.” 孔子沒, 曽子獨得其傳, 傳之子思, 以及孟子, 孟子沒而無傳. 兩漢而下, 儒者之論大道, 察焉而弗精, 語焉而弗詳, 異端邪説起而乘之, 㡬至大壞.
- 문왕과 주공이 돌아가시고서, 공자께서는 덕은 있으셨으나 지위가 없으셔서 이 도의 작용으로 하여금 이 세상을 점차 적시게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물러나 제자들과 예악을 산정하고 법도를 밝히셨으며, 『시』를 산삭하고 『춘추』를 다듬으며 『역상』을 짓고 『삼분』과 『오전』을 토론하셔서 삼황오제 성인의 도가 끝없이 밝게 빛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맹자』에서는 “공자께서는 요순보다 훨씬 훌륭하시다”[1]고 하였다. 공자께서 돌아가신 뒤, 증자만이 그 전수를 얻어 자사와 맹자에게 전해주셨고, 맹자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전해 받은 자가 없었다. 양한 이후 유자들이 위대한 도를 논함에 살피기는 했으나 정밀하지 못했고, 말하기는 했으나 상세하지 못해, 이단사설이 일어나 도에 올라타 도가 거의 크게 무너지게 되었다.
- 千有餘載, 至宋中葉, 周敦頤出於舂陵, 乃得聖賢不傳之學. 作太極圖説、通書, 推明隂陽五行之理, 命於天而性於人者, 瞭若指掌. 張載作西銘, 又極言理一分殊之旨. 然後道之大原出於天者, 灼然而無疑焉. 仁宗明道初年, 程顥及弟頤實生, 及長, 受業周氏. 已乃擴大其所聞, 表章大學、中庸二篇, 與語、孟並行, 於是上自帝王傳心之奥, 下至初學入徳之門, 融㑹貫通, 無復餘蘊.
- 천여 년 뒤 송나라 중엽에 이르러 주돈이가 용릉에서 나와 전해지지 않던 성현의 학문을 얻었다. 『태극도설』과 《통서》를 지어 음양오행의 이치를 미루어 밝히고, 하늘에서 명을 받아 사람에게 본성이 되는 것이 명료하기가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장재는 《서명》을 지었고 또 리일분수의 뜻을 지극히 말하였다. 이런 연후에 도의 큰 근원이 하늘에서 나온다는 것이 훤하여 의심할 것이 없어졌다. 인종 명도 초년에 정호와 그의 아우 정이가 실로 태어났고, 장성하자 주돈이에게 학업을 전수받았다. 이윽고 전해들은 것을 확충하여 『대학』과 『중용』 두 편을 표창하고 『논어』·『맹자』와 나란하게 하니, 이에 위로는 제왕이 전한 마음의 깊은 뜻과 아래로는 초학자들이 덕으로 들어가는 문이 합쳐지고 관통되어 더 이상 남은 뜻이 없게 되었다.
- 迄宋南渡, 新安朱熹得程氏正傳, 其學加親切焉. 大抵以格物、致知為先, 明善、誠身為要. 凡詩、書、六藝之文, 與夫孔、孟之遺言, 顚錯於秦火, 支離於漢儒, 幽沉於魏、晉、六朝者, 至是皆煥然而大明, 秩然而各得其所. 此宋儒之學, 所以度越諸子, 而上接孟氏者歟! 其於世代之汚隆, 氣化之榮悴, 有所闗係也甚大. 道學盛於宋, 宋弗究於用, 甚至有厲禁焉. 後之時君世主, 欲復天徳王道之治, 必來此取法矣.
- 송나라가 南渡하고서, 신안 주희가 이정의 正傳을 얻어 그의 학문이 더욱 절근하였다. 대저 격물·치지를 우선으로 삼고, 明善·誠身을 핵심으로 삼았다. 시·서·육예의 문식과 공자·맹자가 남긴 말이 진나라의 焚書 때 엎어지고 漢儒에 의해 지리해졌으며 위진남북조 시대에 아득해졌으나, 이 때 모두 환하게 크게 밝혀져, 질서정연하게 각각 제자리를 얻었다. 이것이 宋儒의 학문이 여러 학자를 건너뛰고 위로 맹자에 닿는 까닭일 것이다! 宋儒의 학문이 시대의 부침과 기후의 榮悴에 관계된 것이 매우 크다. 도학은 송대에 성대했으나 송나라는 활용하는 데 미치지 못했고 심지어는 엄히 금하기도 하였다. 후대의 군주가 天徳·王道의 다스림을 회복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여기에 와서 본보기를 취해야 할 것이다.[2]
- 邵雍髙明英悟, 程氏實推重之, 舊史列之隱逸, 未當, 今置張載後. 張栻之學, 亦出程氏, 既見朱熹, 相與博約, 又大進焉. 其他程、朱門人, 考其源委[3], 各以類從, 作道學傳.
- 소옹은 고명하고 영특해 이정이 실로 존중하였는데, 옛 사료에서는 《은일》에 배치하였으나 합당하지 않으니 여기서는 장재의 뒤에 두겠다. 장식의 학문 역시 이정에게서 나왔는데, 주희를 만나 서로 博文約禮한 데다가 또 크게 진전되었다. 그 외 이정과 주희의 문인들은 그들의 源委를 고찰하여 각각 부류에 따라 모아 《도학전》을 지었다.
宋史周敦頤傳
- 周敦頤,字茂叔,道州營道人。元名敦實,避英宗舊諱改焉。以舅龍圖閣學士鄭向任,為分寧主簿。有獄久不決,敦頤至,一訊立辨。邑人驚曰:「老吏不如也。」部使者薦之,調南安軍司理參軍。有囚法不當死,轉運使王逵欲深治之。逵,酷悍吏也,眾莫敢爭,敦頤獨與之辨,不聽,乃委手版歸,將棄官去,曰:「如此尚可仕乎!殺人以媚人,吾不為也。」逵悟,囚得免。
- 주돈이(周敦頤)는 자가 무숙(茂叔)이고 도주(道州) 영도현(營道) 사람이다. 원래 이름은 돈실(敦實)이었는데 송나라 영종의 옛 이름을 피휘하여 고쳤다. 외삼촌인 용도각학사 정향(鄭向)의 추천으로 분녕의 주부로 임용되었다.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송사가 있었는데 주돈이가 오자 단번에 조사하여 판결을 내렸다. 마을 사람들이 놀라면서 “노련한 관리도 [주돈이만] 못하구나.”라고 말했다. 부사가 그를 천거하였고 남안군사리참군(南安軍司理參軍)으로 임명되었다. 죄수 중에서 법으로 볼 때 죽여선 안 되는 사람이 있었는데 전운사(轉運使) 왕규(王逵)는 그를 심하게 치죄하였다. 왕규는 독하고 사나운 관리인지라 무리 중에서 아무도 감히 다투려고 하지 않았는데 주돈이만이 홀로 그와 논변하였다. 그러나 왕규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곧 수판(手版)을 버리고 돌아가 관직을 버리고 떠나려고 하면서 “이러한 상황에서 관리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을 죽여서 남에게 아첨하는 짓을 난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왕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고, 죄수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 移郴之桂陽令,治績尤著。郡守李初平賢之,語之曰:「吾欲讀書,何如?」敦頤曰:「公老無及矣,請為公言之。」二年果有得。徙知南昌,南昌人皆曰:「是能辨分寧獄者,吾屬得所訴矣。」富家大姓、黠吏惡少,惴惴焉不獨以得罪於令為憂,而又以污穢善政為恥。曆合州判官,事不經手,吏不敢決。雖下之,民不肯從。部使者趙抃惑於譖口,臨之甚威,敦頤處之超然。通判虔州,抃守虔,熟視其所為,乃大悟,執其手曰:「吾幾失君矣,今而後乃知周茂叔也。」
- 침군(郴郡) 계양(桂陽)의 현령으로 자리를 옮기자 치적이 더욱 현저해졌다. 침군의 군수 이초평(李初平)은 그가 현명하다고 생각해서 “나는 독서를 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며 물었다. 주돈이는 “공은 나이가 많아 시간이 급박하니 공을 위하여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고 말했다. 이년 뒤에 과연 소득이 있었다. 자리를 옮겨서 남창의 지현이 되었는데, 남창의 사람들은 모두 “이는 분녕의 옥사를 능히 판결한 사람이니 우리들이 하소연할 곳을 얻었다.”고 말했다. 부자들과 지방의 유력자들과 교활한 관리들과 악행을 저지르는 젊은이들은 모두 두려워하며 현령으로부터 죄를 얻는 건 아닐까 두려워하였을 뿐 아니라 선정을 더럽히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 합주(合州)의 판관을 역임할 때, 일이 그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관리들이 감히 처결하지 못하였고, 비록 명령을 내리더라도 백성들은 청종하려고 하지 않았다. 부사 조변(趙抃)이 참소하는 말에 현혹되어 [주돈이를] 대하는 태도가 매우 위엄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돈이는 초연히 대처하였다. 건주(虔州) 통판을 맡았을 때에는 조변이 건주의 현령이 되어 면밀하게 그의 행실을 보고선 곧 크게 깨닫더니 그의 손을 잡으며 “나는 그대를 거의 잃어버렸지만. 지금 이후로 주무숙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 熙寧初,知郴州。用抃及呂公著薦,為廣東轉運判官,提點刑獄,以洗冤澤物為己任。行部不憚勞苦,雖瘴癘險遠,亦緩視徐按。以疾求知南康軍,因家廬山蓮花峰下。前有溪,合于溢江,取營道所居濂溪以名之。抃再鎮蜀,將奏用之,未及而卒,年五十七。
- 희령(熙寧, 1068년~1077) 초년에 침주(郴州)의 지주가 되었다. 조변과 여공저(呂公著)로부터 천거를 받아 광동(廣東)의 전운판관(東轉運判官)이 되자 죄를 지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억울하게 죄를 지은 사람들의 누명을 벗겨주며,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부(部)를 순행하였지만 노고(勞苦)를 꺼려하지 않아서 비록 풍토병과 창병이 일고 길이 험하고 멀더라도 시찰하고 위무하였다. 나중에 주돈이는 병으로 지남강군(知南康軍)으로 자리를 옮기길 구하였고, 이로 인해 여산의 연화봉(蓮花峯) 아래에 집을 지었다. 앞에 시내가 있었는데 분강(湓江)으로 합하였고, 영도(營道)에 머물렀던 염계(溓溪)를 취하여 이름으로 삼았다. 조변이 재차 촉(蜀)에 진수하였을 때 장차 [주돈이를] 등용하라 상주하려고 하였지만 그 일이 이루기도 전에 주돈이는 죽고 말았으니 당시의 나이가 57세였다.
- 黃庭堅稱其「人品甚高,胸懷灑落,如光風霽月。廉于取名而銳於求志,薄於徼福而厚於得民,菲於奉身而燕及煢嫠,陋於希世而尚友千古。」
- 황정견(黃庭堅)은 “인품이 매우 높고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은 시원하여 마치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다. 명성을 취하는 것을 뒷전으로 하였으나 뜻을 구하는 것에는 왕성하였고, 복을 구함에는 박하였지만 백성의 마음을 얻는 데에는 두터웠으며, 몸을 받듦에는 둔하였지만 즐거워함이 과부와 홀아비를 보살피는 일에 주의를 기울였고, 세상에 영합함을 누추하게 여겼지만 위로는 천고(千古)와 벗하였다.”고 그를 칭송하였다.
- 博學行力,著《太極圖》,明天理之根源,究萬物之終始。其說曰:
- 널리 배우고 힘써 실천하였는데, 《태극도》를 지어 천리의 근원을 밝히고 만물의 시작과 끝을 궁구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 無極而太極。太極動而生陽,動極而靜,靜而生陰,靜極複動,一動一靜,互為其根,分陰分陽,兩儀立焉。陽變陰合,而生水、火、木、金、土,五氣順布,四時行焉。五行一陰陽也,陰陽一太極也。太極本無極也。五行之生也,各一其性。無極之真,二五之精,妙合而凝,乾道成男,坤道成女。二氣交感,化生萬物,萬物生生,而變化無窮焉。惟人也得其秀而最靈,形既生矣,神發知矣,五性感動而善惡分,萬事出矣。聖人定之以中正仁義而主靜,立人極焉。故聖人與天地合其德,日月合其明,四時合其序,鬼神合其吉凶。君子修之吉,小人悖之凶。故曰:「立天之道,曰陰與陽。立地之道,曰柔與剛。立人之道,曰仁與義。」又曰:「原始反終,故知死生之說。」大哉《易》也,斯其至矣。
-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다. 태극이 움직여서 양(陽)이 생기고 움직임이 극한에 달하여 고요해지는데 고요해지면 음(陰)이 생긴다. 그리고 고요함이 극한에 다다르면 다시 움직인다.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해져서 서로 각각의 근거가 되니, 음으로 나뉘고 양으로 나뉘어 양의(兩儀)가 세워진다. 음양이 변화하거나 결합해서 수(水)·화(火)·목(木)·금(金)·토(土)라는 오행이 생겨난다. 다섯 종류의 기(五氣)는 순서에 따라 펴져서 춘(春)·하(夏)·추(秋)·동(冬)이라는 사시(四時)가 운행된다.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고,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다.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오행의 생성에 각각 본성을 동일하게 갖고 있다. 무극의 신실함과 음양·오행의 순정함은 신묘하게 결합해서 응결된다. ‘건(乾)의 도리는 남자를 이루고, 곤(坤)의 도리는 여자를 이룬다.’고 하니 음양이라는 두 기가 교감하여 만물을 화생시킨다. 만물이 발생하는 과정을 반복하니 변화는 끝이 없다. 오직 사람만이 빼어난 것을 얻어서 가장 영명하다. 형체가 이미 생겨나면 정신이 지각을 발현시키니 [인(仁)·의(義)·예(禮)·지(知)·신(信)이라는] 다섯 가지 본성(五性)이 외물에 감응해 움직이다 선악(善惡)이 나뉘고 온갖 사태들이 출현한다. 성인은 중(中)·정(正)·인(仁)·의(義)로써 이를 안정시키되 정(靜)을 위주로 사람의 표준을 세우셨다. 그러므로 성인은 천지와 그 덕이 합치되고, 일월과 그 밝음이 합치되고, 사시와 그 순서가 합치되며, 귀신과 그 길흉이 합치된다. 군자는 수양하니 길하며, 소인은 어긋나니 흉하다. 그러므로 ‘천도(天道)를 세우며 음(陰)과 양(陽)을 말하였고, 지도(地道)를 세우며 유(柔)와 강(剛)을 말하였고, 인도(人道)를 세우며 인(仁)과 의(義)를 말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시작을 궁구하고 끝으로 돌아가니 그러므로 죽음과 삶의 설을 알겠다.’고 한 것이다. 위대하다 역(易)이여! 이렇게도 지극하도다.”
- 無極而太極。太極動而生陽,動極而靜,靜而生陰,靜極複動,一動一靜,互為其根,分陰分陽,兩儀立焉。陽變陰合,而生水、火、木、金、土,五氣順布,四時行焉。五行一陰陽也,陰陽一太極也。太極本無極也。五行之生也,各一其性。無極之真,二五之精,妙合而凝,乾道成男,坤道成女。二氣交感,化生萬物,萬物生生,而變化無窮焉。惟人也得其秀而最靈,形既生矣,神發知矣,五性感動而善惡分,萬事出矣。聖人定之以中正仁義而主靜,立人極焉。故聖人與天地合其德,日月合其明,四時合其序,鬼神合其吉凶。君子修之吉,小人悖之凶。故曰:「立天之道,曰陰與陽。立地之道,曰柔與剛。立人之道,曰仁與義。」又曰:「原始反終,故知死生之說。」大哉《易》也,斯其至矣。
- 又著《通書》四十篇,發明太極之蘊。序者謂「其言約而道大,文質而義精,得孔、孟之本源,大有功于學者也。」
- 또한 《통서》 40편을 저술하여 태극의 품은 뜻을 드러내서 밝혔다. 서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말은 간략하지만 [담고 있는] 도는 크고, 형식과 내용이 갖추어져있고(文質) 의미가 정밀하여 공자와 맹자의 본원(本源)을 얻었으니 배우는 자들에게 큰 공이 있다.”
- 掾南安時,程珦通判軍事,視其氣貌非常人,與語,知其為學知道,因與為友,使二子顥、頤往受業焉。敦頤每令尋孔、顏樂處,所樂何事,二程之學源流乎此矣。故顥之言曰:「自再見周茂叔後,吟風弄月以歸,有'吾與點也'之意。」侯師聖學于程頤,未悟,訪敦頤,敦頤曰:「吾老矣,說不可不詳。」留對榻夜談,越三日乃還。頤驚異之,曰:「非從周茂叔來耶?」其善開發人類此。
- 안정에 머무르고 있을 때에 통판군사(通判軍事) 정향(程珦)이 풍모가 비상한 사람임을 보고는 그와 함께 이야기를 했더니 과연 그의 학문 됨됨이와 도(道)를 알고 있음을 알고는 그와 교유를 맺어 두 아들 정호(程顥)와 정이(程頤)로 하여금 가서 수업하도록 하였다. 주돈이는 매번 공자와 안회가 즐거워하는 것, 즉 그들이 즐기던 바가 무슨 일이었는지를 살피도록 하였으니, 이정의 학문이 이로부터 연원하였다. 그래서 정호는 이렇게 말했다. “다시 주무숙을 본 후로부터 음풍농월(吟風弄月) 중에 ‘나는 증점과 함께하겠노라.’라고 말씀하신 공자의 뜻이 있게 되었다.” 후사성(侯師聖)이 정이로부터 학문을 하였지만 깨닫지 못하고 주돈이를 방문하였다. 주돈이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늙어서 말을 상세하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그와 책상을 마주하며 밤새도록 머물며 담론하다 3일이 지나 되돌아갔더니 정이가 남달라진 것을 탄복하며 이렇게 말했다. “주무숙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가!” 그는 사람들을 이렇게 잘 개발시켜주었다.
- 嘉定十三年,賜諡曰元公,淳祐元年,封汝南伯,從祀孔子廟庭。 二子壽、燾,燾官至寶文閣待制。
- 가정(嘉定) 13년(1220년)에 시호를 하사하여 ‘원공(元公)’이라 하였고, 순우(淳祐) 원년(1241년)에 여남백(汝南伯)에 봉하고 공자의 묘정에 종사(從祀)하게 하였다. 두 아들은 주수(周壽)와 주도(周燾)이다. 주도는 관직이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에 이르렀다.
記濂溪傅 - 宋 朱熹
- 戊申六月, 在玉山邂逅洪景盧内翰, 借得所脩國史, 中有濓溪、程、張等傳, 盡載太極圖説. 蓋濓溪於是始得立傳, 作史者於此為有功矣.
- 무신년(1188) 6월, 옥산에서 홍경로를 만나 그가 편수한 國史를 빌려보았는데, 안에 주렴계·장횡거·이정 선생의 傳이 있었고, 《태극도설》을 모두 기재했었다. 주렴계가 이에 비로소 傳이 쓰였으니, 國史를 편수한 자가 이에 공이 있다 하겠다.
- 然此説本語首句, 但云: “無極而太極.” 今傳所載, 乃云: “自無極而為太極.” 不知其何所据而増此自、為二字也. 夫以本文之意, 親切渾全明白如此, 而淺見之士猶或妄有譏議. 若増此字, 其為前賢之累, 啓後學之疑, 益以甚矣! 謂當請而改之, 而或者以為不可. 昔蘇子容特以為父辨謗之故, 請刪國史所記“草頭木脚”之語, 而神祖猶俯從之. 况此乃百世道術淵源之所繫耶! 正當援此為例, 則無不可改之理矣.
- 그런데 이 《태극도설》은 첫 머리에 본래 그저 “無極而太極”이라고만 했는데, 지금 주렴계의 傳의 기록은 “自無極而為太極.”라고 되어있다. 무슨 근거로 이 “自”자와 “為”자를 추가했는지 모르겠다. 본래 문장의 뜻이 친절·온전·명백한 것이 이와 같은데도 식견 좁은 선비가 오히려 혹 주제넘게 제 생각을 담았다. 만약 이 두 글자를 더하면 이전 현인들에게 누가 되고 후학들의 의심을 사는 것이 더욱 심할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청하여 고치라’고 했는데 혹자가 안 된다고 하였다. 예전에 蘇頌이 그저 자기 아버지가 입은 비방 때문에 國史에 기록된 “草頭木脚”이라는 말을 산삭해줄 것을 청하였는데, 신종 황제께서 오히려 따라주셨다. 하물며 이 일이 바로 백세 도술의 연원이 달린 것임에 있어서랴! 응당 이 일을 전례로 삼는다면, 國史를 고칠 수 없는 이치는 없을 것이다.
주정수수설(周程授受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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