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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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jy9707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4월 14일 (일) 14:2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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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대한불교조계종 직영사찰로서, 우리 나라 3대 관음영지(觀音靈地) 중의 한 곳이다. 이 절의 창건에는 다음과 같은 연기설화(緣起說話)가 전한다. 635년(선덕여왕 4) 4월, 삼산면에 살던 한 어부가 바다 속에 그물을 던졌더니 인형 비슷한 돌덩이 22개가 함께 올라왔다. 실망한 어부는 돌덩이들을 즉시 바다로 던져 버리고 다시 그물을 쳤지만 역시 건져 올린 것은 돌덩이였으므로 다시 바다에 던졌다. 그날 밤, 어부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귀중한 것을 바다에 두 번씩이나 던졌다고 책망하면서, 내일 다시 돌덩이를 건지거든 명산에 잘 봉안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다음날 22개의 돌덩이를 건져 올린 어부는 노승이 일러준 대로 낙가산으로 이들을 옮겼는데, 현재의 석굴 부근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돌이 무거워져서 더 이상은 나아갈 수 없었으므로 “바로 이곳이 영장(靈場)이구나.” 하고는 굴 안에 단(壇)을 모아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신라시대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고려 초기에 금강산 보덕굴(普德窟)에서 관음진신(觀音眞身)을 친견한 회정(懷正)이 이곳에 와서 불상을 살펴보니, 가운데 좌상은 석가모니불, 좌보처는 미륵보살, 우보처는 제화갈라보살이었고, 나머지는 18나한상과 송자관음이었다. 회정은 이 22존 중 삼존불과 18나한은 굴 속에 모시고 송자관음은 따로 관음전을 지어서 봉안한 다음 이 절을 낙가산 보문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절의 역사는 사찰의 격에 비하여 자세히 전하지 않으며, 조선시대 후기부터의 역사만이 전해지고 있다. 1812년(순조 12)에는 이 절의 승려들이 홍봉장(洪鳳章)의 도움을 받아 중건하였고, 1867년(고종 4)에는 경산(京山)이 석굴 안에 처마를 이어 나한전을 건조하였으며, 1893년(고종 30)에는 명성왕후의 전교로 요사와 객실을 중건하였다. 1911년 일제가 30본·말사를 제정하면서 전등사 말사가 되었다. 1918년에 대원(大圓)이 관음전을 중수하였고, 1932년에는 주지 배선주(裵善周)가 객실 7칸을 새로 지었으며, 1935년에는 나한전을 중창하였다. 그 뒤 관음전을 중건하고 대범종을 조성하였으며, 1976년 범종각과 요사를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관음전·대방(大房)·종각·석실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석실 굴 안에는 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석굴 입구에는 세 개의 홍예문을 설치하였고, 동굴 안에는 반원형 좌대를 마련하고 탱주(撐柱)를 설치하였으며, 탱주 사이에 21개 소의 감실이 있어 석불을 안치하였다. 이 밖에 이 절에는 마애석불좌상과 천인대(千人臺)가 있다. 마애석불좌상은 1928년에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승려인 이화응(李華應)이 보문사 주지 배선주와 함께 조각한 것으로, 높이 9.2m, 폭 3.3m이다. 석불좌상의 상부에는 거대한 눈썹바위가 있고, 좌측에는 비명(碑銘)이 있으며, 불상 앞에는 소규모의 석등이 있다. 이 석불과 석굴에서 기도를 하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하여 찾는 여인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다. 또 천인대는 길이 40m, 폭 5m의 큰 바위이다. 이 절의 창건 당시 서역(西域)의 고승이 이 천인대에 불상을 모시고 날아왔다는 전설이 있다. 그 뒤 이 바위는 법회 때 설법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는데, 이 바위 위에 1,000명이 앉을 수 있다고 하여 천인대라고 명명하였다. 1994년 10월 대한불교조계종 직영 사찰이 되었다.[1]

영문개관

In 1618 in the 10th year of the Gwanghaegun of the Joseon Dynasty, it was renovated and installed Gwangseongbo in 1656. it’s Dondae was bulit in 1679. Dondae of Odu, Hwado, Gwangseong and Odujeong artillery unit was belonged to it. It was rebuilt as a complete stone fortress in 1745 and the gate was also installed. Gwangseongbo was the fiercest battle of the time. On April 24, 1871, when U.S. Rogers led a fleet of 1,230 troops to invade upon demand for commerce, after the landing force occupied Chojijin and Deokjinjin, they deploy hand-to-hand fight in Gwangseongbo. After this battle, Anhaeru, Gwangseongdon, Son Dolmok, Youngudon, and the tomb of General Eo Jae yeon who died in the war were all repaired and contructed on the site of the site purificatiion. Gwangseongbo is currently designated as Historic Site. [2]

어재연

어재연(魚在淵, Eo Jae yeon) 조선후기 공충도병마절도사, 회령부사, 병조판서지삼군부사 등을 역임한 장수.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성우(性于). 어용인(魚用仁)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 무과에 급제, 공충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866년 프랑스 로즈(Roze,P.G.)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였을 때(병인양요) 병사를 이끌고 광성진(廣城鎭)을 수비하였다. 이어 회령부사가 되어 북쪽 변경지방의 비적을 토벌, 치안을 확보하였다. 또한 이 때 장시(場市)를 개설하는 등 변경 무역을 활성화하였다. 1871년 미국 아시아함대의 강화도 내침으로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6월 1일 손돌목[孫乭項]포격사건이 발생해, 한미간에 최초의 군사충돌이 일어났다. 이를 보고하자 진무중군(鎭撫中軍)에 임명되어 광성보(廣城堡)로 급파되어 6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광성보에 부임, 미군과 대치하였다. 6월 10일 미군은 강화도상륙작전을 전개, 초지진(草芝鎭)을 점거하였다. 6월 11일 덕진진(德津鎭)을 함락한 미군은, 마지막으로 광성보공략에 나섰다. 이 때 광성보에 수자기(帥字旗)를 게양하고 침공해 오는 미군을 격퇴할 태세를 취하였다. 미군은 광성보에 대한 수륙양면작전을 개시해서, 해상에서는 함포사격, 지상에서는 야포사격으로 초토화작전을 전개하였다. 드디어 광성보로 돌입한 미군과 어재연군 사이에는 육박전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어재연은 임전무퇴의 결의로 칼을 손에 잡고 적을 무찔렀고, 대포알 10여 개를 양손에 쥐고 적군에 던져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병조판서지삼군부사(兵曹判書知三軍府事)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3]

Eo Jae Yeon

  • the life story of Eo Jae Yeon
1823 He was born.
1841 He passed the military service examination and became an Gongchungdobyungmajerdosa (commander of army).
1866 Byeongin Yangyo broke up and defended at Gwangseongbo.
1871 During Byeongin Yangyo, he was recommended to Samgunboo (the government office in charge of military affairs) 
and dispatched to Sunmoo-young as a general.
1871 During Shin Mi Yangyo in Gwangseongbo, he was killed by a gunshot wound by James Doherty.
After his death, he was promoted to Byeongjopanseo Jisamgunbusa.
(Leader of Byeongjo, which was in charge of military affairs.)
1988년 김형모 作[4]
  • Achievement (related to Ganhwa)

Shin mi Yangyo (United States-Korea War of 1871)

Shin mi Yangyo (United States-Korea War of 1871) The war situation was not good when United States-Korea War of 1871 occurred as the U.S. forces had occupied the Chojijin and Deokjinjin fortresses and attacked Gwangseongbo, the main fortress. On June 11, 600 Korean soldiers, who were at the defence site in Gwangseongjin, struggled to fight the U.S. general offensive that took over Deokjinjin. As he was pushed from Gwangseongjin to the Son Dol Mok-dondae Fortress, General Eo Jae-yeon prepared for the final battle with 350 soldiers under his command. U.S. and Joseon troops engaged into a fierce battle of in Son Dol Mok-dondae Fortress . General Eo Jae-yeon led the battle against the U.S. on both water and land, fighting without backing down until the very end, before he was shot by the U.S. marine officer James Doherty. In the battle, the Joseon military suffered a crushing defeat, with 53 soldiers killed, 100 killed and 20 captured. However, the U.S. military, which praised the Joseon soldiers for their persistent battles, politely buried the bodies of the officers, including those of the officer's staff. While his was still alive, General Eo Jae Yeon, he erected a monument as a tribute to the loyalty of his two brothers - Eo Jae-soon and General Eo Jae-yeon.[5]

사진[6]

지도


영상

출처

  1.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보문사'
  2. 'GGHS 2019 Winter - Team 10'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어재연'
  4. 강화전쟁박물관 '어재연 초상'
  5. 'GGHS 2019 Winter - Team 10'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화 광성보' 사진

기여

일자 역할 이름 전공
2019년 4월 편집 및 정리 전준영 인문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