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사
강화 전등사(江華 傳燈寺)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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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번호 | |
지정일 | |
지정 명칭 | 강화 전등사(江華 傳燈寺) |
한자 명칭 | |
영문 명칭 | Gsa Temple |
분류 | |
건립·제작 |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아도화상이 진종사眞宗寺 창건 |
주소 |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관촉리 반야산(般若山) |
위도 | 36.1884574 |
경도 | 127.1124062 |
웹사이트 |
목차
서론
논산읍에서 남동쪽으로 난 643번 지방도로로 10분 남짓 가면 바로 관촉사 입구에 닿는다. 100m쯤의 나지막한 야산인 반야산 중턱에 있는 관촉사는 너른 연무벌을 향하고 있는데, 다알다시피 연무는 우리나라 장정이면 한번은 거쳐야 하는 상징처럼 되어있는 ‘논산훈련소’가 있는 곳이니 이 절에 늠름히 서 있는 관음보살상의 기상과도 맥이 닿아 있다고 함직하다.
이 절에는 ‘은진미륵’으로 유명한 부처가 있다. 도상 자체로는 관음보살상인데도 사람들은 흔히 그렇게 부른다. 미륵이 대개 상을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이 있기보다는 조성된 내력에따라, 또 사람들의 바람에 따라 불리게 마련이니 그 두 이름이 다 통용되어도 무방하겠다. 다만 미륵부처가 뜻하는 의미가 참으로 여러 가지임은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미륵상의 다양성에서 알 수 있는데, 이 관촉사의 미륵은 왕권과 밀접한 관련을 맺은 관제미륵 중의 하나이다.
부처 왼쪽에 있는 사적비에 따르면, 고려 4대 광종 19년(968)에 왕명을 받은 혜명대사가 조성하기 시작하여 37년 만인 7대 목종 9년(1006)에 완성되었는데 찬란한 서기가 삼칠일 동안 천지에 가득하여 찾아오는 사람으로 저잣거리를 이룰만큼 북적댔다고한다. 또 머리의 화불(化佛)이 내는 황금빛이 하도 밝아 송나라 지안대사가 빛을 따라 찾아와서 예배하면서 절 이름을 ‘관촉사’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 절에는 관음보살상말고도 창건 당시에 같이 조성했을 것으로 보이는 석등과 석탑, 그리고 연화배례석이 있다.
Gwanchoksa Temple
Gwanchoksa Temple located in Nonsan, South Chungcheong Province, is known for a host of cultural sites and intriguing legends. The most famous attraction of the temple is Seokjomireukbosalipsang Buddha (Treasure No. 218). The construction of the Buddha statue, widely known as “Eunjinmireuk Buddha,” started in 968 during the Goryeo period and lasted for 37 years. When the country’s largest stone Buddha statue was fully built (18.12m in height and 9.9m in girth) in 1006, the temple was said to have been crowded with people coming from across the country. The origin of the name of the temple has to do with the alleged “golden glow” emanating from the stone Buddha, but the original small sculpture placed in the head of the statue is now gone.
Гуанчугса хийд
Нунсан тосгонд зүүн өмнөд хэсгээр тавигдсан орон нутгийн 643-р замаар 10 минут орчим явбал шууд Гуанчугса хийдийн үүдэнд тулж очно. 100 метр орчим намхавтар толгод болох Банясан толгодын бэлд байрлах Гуанчугса хийд нь уудам хөндий тал болох Ёнмү руу харсан байдаг. Та бүхний мэдэж байгаачлан Ёнмү бол манай улсын эрийн цээнд хүрсэн залуу л бол заавал нэг удаа очиж үзэх ёстой бэлэг тэмдэг болсон “Нунсан цэргийн сургуулилалтын газар” байрладаг. Мөн энэхүү хийдэд “Өнжинмирөг” гэдгээрээ алдартай Будда бурхны хөшөө дурсгал байдаг. Гаднаас нь харахад Гуанөм энэрлийн бурханаас ялгарах зүйлгүй боловч хүмүүс ихэвчлэн “Өнжинмирөг” гэдэг нэрээр нь дууддаг. Энэхүү Будда бурхны хөшөөний зүүн талд буй түүхэн хөшөөний бичээсээс харвал, Гурёгийн 4 дэх их хаан Гуан Жун хаан ор суусны 19-р он(968)-д Хемён санваартанд тушаал өгөн энэхүү хийдийг барьж эхлүүлсэн гэдэг. Үүнээс хойш 37 жилийн дараа буюу Гурёгийн 7 дах их хаан Муг Жун хааны ор суусны 9-р он(1006)-д уг хийдийг бүрэн хийж дуусгасан байна. Гялтганан гялалзах сүр хүч нь 21 өдрийн турш тэнгэр газрыг дүүргэж байсан гэх ба хайж ирсэн хүмүүсээр хийд бүхэлдээ бараг дүүрч байсан гэдэг. Түүнчлэн Будда бурханы хөшөөний тэргүүн хэсэг дээр байрласан галын бурхнаас гарч буй шижир алтан туяа нь машид гэрэлтэж байсан тул Сун улсын Жианъ санваартан хүртэл тэрхүү гэрлийг хараад дагасаар хүрээд ирсэн гэдэг. Тэгээд тэрээр уг Будда бурханы хөшөөнд мөргөн энэхүү хийдийн нэрийг Гуанчугса гэж нэрлэсэн гэдэг. Энэхүү хийдэд Гуанөм энэрлийн бурхны хөшөө дурсгалаас гадна энэхүү хөшөөг бүтээх үед хамт бүтээсэн гэж үздэг чулуун дэнлүүн хөшөө ба чулуун цамхаг, мөн бадам лянхуа цэцгэн хээтэй мөргөлийн чулуун тавцан байдаг.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강화 전등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제1785호)은 17세기 전반에 전북, 충남 등지에서 활동하던 수연(守衍)이 수화승으로 참여하여 1623년에 조성한 불상으로 수연이 수화승(首畵0僧)으로 조성한 작품들 가운데 지금까지 알려진 두 번째 불상이다. 삼불의 구성은 석가불을 본존으로 아미타불과 약사불이 좌우에 협시하는 형식으로서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유행했던 삼세불의 도상을 보이고 있다. 불상들의 세부를 보면, 본존 석가불상은 단엄한 자세에 자비한 상호(相好)를 보이며, 좌우의 아미타불상과 약사 불상은 이목구비의 표현이나 비례 면에서 본존상 보다는 다소 조형감이 떨어지는 편이다. 본존상은 상호(相好)의 표현이 근엄하고 전체적인 신체비례 면에서도 안정감이 느껴져 시기적으로 앞서는 같은 수연 작의 서천 봉서사 목조 아미타여래삼존좌상(1619년)에 비해 조각적으로 세련된 감각을 보여준다.
삼세불상의 얼굴은 각각 독특한 상호를 보이고 옷주름 표현기법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아마도 전등사 삼세불상 조성에 참여한 조각승들 가운데 수화승 수연과 함께 서천 봉서사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1619년, 보물 제1751호) 조성에 참여했던 성옥(性玉)의 조각적 개성이 표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세 번째 화원으로 참여한 영철(靈哲)은 이후 옥구 보천사 목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1634년, 익산 숭림사 봉안)과 남원 풍국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1639년, 예산 수덕사 봉안)의 조성에 수연을 따라 참여했으며 성옥에 비해 연배가 아래인 조각승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등사 대웅보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조성원문을 통하여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조각적으로 우수하며, 조각승들과 나타난 발원시주자들의 명단이 잘 전하여 불상(佛像), 면금(面金), 체목금, 체목, 오금(烏金), 좌대(座臺), 보단(甫團), 채안(彩安), 복장(腹藏) 등 세부적인 시주 항목이 기록된 점 등에서 조선시대 불교조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석등
미륵보살 앞쪽에 석등이 한 기 있는데 부처 못지않게 힘이 좋아 보이는 것이 미륵보살과 같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높이 5.45m, 둘레 4m로 남한에서는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큰 석등으로 꼽힌다. 흔히 미륵불의 위엄과 힘에 눈이 빼앗겨 부처만 보다 오는 수가 많은데 이 석등도 듬직하고 볼 만하다. 보물 제232호이다.
지대석 위에 단단한 복련으로 기둥을 받쳤는데 기둥 중간에는 띠를 둘러 대마디 모양을 새기고 네 잎 꽃 여덟 송이를 꽂은 듯이 조각해 놓아 이 무뚝뚝한 석등에 다소나마 부드러운 느낌을 돌게 했다. 그러나 네모진 판석을 받친 앙련 역시 힘차며, 네 귀퉁이에 기둥을 세우면서 동시에 뚫린 곳을 화창을 삼아 시원한 맛을 보이고 그 위에 덮은 지붕돌에는 귀꽃이 번쩍번쩍 솟아올라 고려 초기의 강성한 힘이 넘쳐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상륜을 바로 올리지 않고 거기에 2층 누각처럼 화사석을 형식적으로 하나 더 얹어 넘치는 힘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이같은 사각 석등은 고려시대 석등의 특징이다. 우리나라 석등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은 팔각 간주에 팔각형 화사석이 얹혀, 팔각이 기본 형태이기 때문이다.
관촉사석등[1]
오층석탑
석등 앞쪽에 창건 때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오층석탑이 있다. 다른 절에서라면 이만해도 우람한 축에 들겠지만 여기에서는 원체 듬직한 부처와, 부처를 밝히는 데 힘을 준 석등이 경내를 차지하고 있어 석탑이 오히려 왜소해 보일 지경이다. 그러나 석탑도 높이 4.5m, 둘레 3.6m의 꽤 다부진 몸매를 하고있다.
기단부는 비교적 넓게 차지하고 든든한 이중기단에 5층을 올렸다. 몸돌의 높이에 비해 지붕돌은 넓지 않은 편이어서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왜소해지는 느낌을 준다. 중원의 월악산 세계사 미륵대원에 있는 오층석탑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고려 때에 지방마다 독특하게 정립해 가는 탑으로서 토속적인맛을 지니고 있다.
석탑 옆에는 폭 0.4m, 길이 1.5m의 긴 댓돌이 놓였는데, 그 위에 잎이 여덟인 연꽃 세 송이가 연가지에 달린 듯이 조각되어 있다. 이 연화대석은 부처에 제물을 바칠 때에 쓰는 배례석이다.
미륵
석가의 다음으로 부처가 된다고 약속받은 보살. 도솔천에 살며, 장래 인간의 수명이 8만세가 되고 이 세계가 정토화되면, 사바세상에 내려와 용화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어 3회의 설법을 한다고 믿어져 그 출현이 기대되는 미래의 부처님. 고로 미륵불이라고도 함. 인도에서는 처음 물병을 가진 보살형으로 만들어지고 과거 7불과 함께 배열한 예도 있다.
미륵신앙은 일찍 중국에 전해져 성행했고 북위시대(4~6세기)를 정점으로 그 조상도 매우 활발했다. 중국 신앙에는 도솔왕생(兜率往生)과 용화수하삼회설법(龍華樹下三會說法)의 기대(下生)에 있었으며, 조상으로 보살형이 전자, 여래형이 후자의 신앙에 기인한다고하나 예외도 있다. 보살형은 교각상이 많다. 남북조시대의 재명상(在銘像)에는 여래형이 많고 수∙당시대에는 의상(倚像)으로 좌수를 무릎에 올리는 모양이 보편적이었다. 또 당∙송에는 『미륵하생경』에의한 미륵정토변상도가 행해져 둔황에 오대(10세기)경의 벽화 등 수종이 현존함.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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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기여
일자 | 역할 | 이름 | 전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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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4. | 편집 | 김은숙 | 인문정보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