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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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린

개요

성경린(成慶麟, 관제, 1911.9.18~2008.3.5)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

기본 정보

  • 이름 = 성경린(成慶麟)
  • 아호 = 관제
  • 전공 = 거문고
  • 출생지 = 서울시
  • 출생-사망 = 1911-2008

음악활동

고인은 생전 스스로의 삶에 대해 “풍류의 정신으로 자연에 맡기고 노을에 띄운 채 애처로운 가락으로 살아온 일생”이라며 “국악을 하려면 아주 파묻혀 이것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한다”[1] 그의 자서전의 제목도 '노을에 띄운 가락'으로 그는 평생을 풍류정신으로 무장하여 국악과 함께 살았다. 그의 회고록의 제목인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라는 제목을 보아 그의 국악에 대한 열정과 업적이 느껴진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그는 어느날 친척한분이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시험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집이 가난하여 상급학교에 갈 수 없었고, 이 학교에서 아는바가 없었지만 공부를 공짜로 시켜주고, 게다가 돈까지 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시험을 치뤘다고 한다.[2] 그러한 계기로 아악의 길로 들어온 그는 한 평생 국악을 위해 인생을 바치셨다. 광복 후 국악의 단절 위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국악보급를 통해 국악이 전승되도록 힘썼다. 해방직후 이왕직아악부는 구왕궁아악부로 바뀌었고, 당시 당국의 제도의 미비로 인한 경제적 궁핍으로 근근히 명백만 이어져 오고 있었다.[3] 이주환과 함께 해방직후 '雅樂部國營에 關한 請願'을 제출하였고, 이 청원서가 받아들여져 1951년에 국립국악원이 개원하게 되었다. 또한 동시에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치라는 필요성[4]으로 1955년 국악사양성소가 설립되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밖에 시조강습회를 통해 국악을 보급하였고, 이혜구 등과 더불어 한국국악학회를 1949년에 창설[5] 하였다. 그가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시절 선생으로부터 "항상 빈자리는 생기게 마련인거야. 앞이 겹겹이 막혔다고 꿈을 중도에서 꺾거나 괴로와할 필요가 없더군"[6]라는 말을 듣고, 항상 이 말을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자란 그는 노후에 본인 스스로가 훌륭한 스승이 되어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고, 그가 걸었던 아악의 길을 현재 많은 국악전공자들이 걷고 있는 것이다.

주요경력

  • 1926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
  • 193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
  • 194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
  • 1945년 구왕궁아악부 아악사
  • 1950년 국립국악원 악사장
  • 1950년 국악사양성소 부소장
  •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 1961년 국립국악원 원장
  • 1961년 국악사양성소 소장
  • 1972년 국립국악고등학교 초대교장

주요작품 및 저서

  • 저서 1947년 《조선의 아악》
  • 저서 1947년 《조선음악독본》
  • 저서 1949년 《수상집 雅樂》
  • 저서 1949년 《조선의 민요》
  • 저서 1952년 《국악개론》
  • 저서 1952년 《국악개설》
  • 저서 1976년 《한국의 무용》
  • 저서 1976년 《한국음악논고》
  • 저서 1976년 《국악감상》
  • 저서 1978년 《나의 人生觀: 노을에 띄운 가락》
  • 저서 1979년 《韓國傳統舞踊》
  • 저서 1985년 《世宗時代의 音樂》
  • 저서 2000년 《국악학논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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