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허균·허난설헌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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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OJH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4월 5일 (수) 16:5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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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의

조선시대 여류시인 허난설헌(1563-1589)과 그의 동생인 문신 허균(1569-1618)이 태어난 집이다.

소개

강릉시가 2001년 강원의 얼 선양 사업의 일환으로 허균·허난설헌 선양 사업을 추진하면서 허씨 가족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가옥을 매입하여 복원한 것이다. 5년에 걸쳐 기념관을 건립하고 자료 및 유물을 수집하여, 현재는 허균·허난설헌 기념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강릉 관련 일화

  • 허씨 남매의 아버지인 허엽(1517-1580)의 본가는 서울 건천동(乾川洞)[1] 이다. 동인의 영수로 활약하였는데, "동인"은 그의 집이 동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 허엽의 두번째 아내는 예조참판 김광철(1493-1550)의 딸로, 그녀에게서 난 허봉(1551-1588), 허난설헌, 허균이 외가인 강릉에서 출생하였다.
  • 허균은 자신의 출생지 강릉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강릉부(江陵府)는 옛 명주(溟州) 땅인데, 산수의 아름답기가 조선[東方]에서 제일이다. 산천이 정기를 모아가지고 있어 이인(異人)이 가끔 나온다. 국초(國初)의 함동원(咸東原)의 사업이 역사에 실려 있고, 참판 최치운(崔致雲) 부자의 문장과 절개가 또한 동원(東原)만 못지 않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호)은 천고에 동떨어지게 뛰어났으니, 온 천하에 찾아보더라도 참으로 찾아볼 수 없으며,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城) 또한 뛰어난 행실로 일컬어지고, 중종조의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과 최간재(崔艮齋)의 문장이 세상에 유명하다. 요즘 이율곡(李栗谷) 또한 여느 사람과는 다르다. 우리 중씨(仲氏)와 난설헌 또한 강릉의 정기를 받았다 할 수 있다. 현재는 최운보(崔雲溥) 이후에는 등과(登科)한 사람이 없어, 이인(異人)이나 문인[翰士]을 만나기 쉽지 않다. 그런데도 과거한 선비는 전혀 볼 수 없으니, 또한 극히 성했다가는 쇠해지는 것이 만물의 이치인가보다.[2]

  • 난설헌은 강릉 초당에서 태어나 아버지와 잠시 살았으나 허엽은 곧 경주부윤이 되어 떠났고, 7세 무렵 일가가 서올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3] 허균 역시 건천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 난설헌은 1585년 모친상을 당해 강릉 외삼촌 집에 머물렀다. 이때 선계인 광상산(廣桑山)에서 노니는 꿈을 꾸고 일어나 시를 지었는데, 이 시는 그녀가 스물일곱에 죽을 것을 예언한 시참(詩䜟)으로 알려져 있다.
 푸른 바다가 구슬바다 침범하고 碧海侵瑤海
 푸른 난새가 채색 난새 의지하네 靑鸞倚彩鸞
 부용꽃 스물일곱 꽃송이가 芙蓉三九朶
 붉게 지니 달과 서리 서늘하구나 紅墮月霜寒
  • 허균은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갔다가 강릉에 와 외가에 머물면서 <애일당기>[4]를 지었다. 이때 애일당이 있는 뒷산의 이름인 교산을 호로 사용하였다.

생가 터 확정 경위

  • 허균이 편집하여 중국에 보낸 <난설헌집>에 실린 죽지사 제 3수에 강릉이 언급되어 있다.
 강릉의 돌쌓인 물가에 살면서 家住江陵積石磯。
 문 앞에 시내에서 비단옷 빨았었네 門前流水浣羅衣。
 아침이면 한가하게 목란주 노 매어놓고 朝來閑繫木蘭棹。
 짝지어 날던 원앙 부러운듯 쳐다봤네 貪看鴛鴦相伴飛

주석

  1. 현재 중구 인현동 일대로 추정된다.
  2. 한국고전번역원 성소부부고 권 26 부록 학산초담 번역에서
  3. 장정룡, <허난설헌과 강릉>, 강릉시 발행, 1998, 19면
  4. "愛日"은 세월이 흐르는 것이 애석하다는 뜻으로, 허균의 외조부인 김광철이 노모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