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순교성지(海美殉敎聖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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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김지선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6년 4월 15일 (금) 21:0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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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100년 박해의 현장 해미

해미읍성은 조선 태종17년(1417)부터 세종3년(1421) 사이에 축성하여 병마절도사영을 덕산에서 해미로 옮긴 데서 유래한다. 이후 효종3년(1652)에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이었다.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설되고 해미현의 관아가 이 성으로 옮겨졌다. 1914년까지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는 호서좌영으로서 내포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해미의 겸영장은 토포사를 겸하면서 해미, 대흥, 온양, 면천, 태안, 결성, 예산, 평택, 아산, 신창 덕산, 당진 등 12개 군·현의 치안을 관장하였다. 해미현 토포사가 관장하는 12개 지역은 한국 천주교의 못자리라 할 정도로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다. 1791년 한국 최초의 박해사건인 신해박해로부터 병인박해까지 100여 년 동안 해미에서도 박해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병인 대 박해 시기에는 수많은 신자들이 해미로 끌려와 남형(濫刑)에 의해 죽어갔다.

여숫골성지와 해미순교성지

병인박해기, 순교자들이 생매장을 당하면서 외치던 “예수 마리아”를 주민들이 “여수머리”로 잘못 알아들어 ‘여숫골’로 변천 되었다는 데서 성지의 이름이 ‘여숫골성지’로 유래하였다. 그로부터 65여년이 지난 1932년. 해미 생매장 터의 위치가 목격 증인들에 의해 구전으로 전해져 오고 있던 것을, 당시 서산 상흥리 본당에 부임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바로(P. Barraux, 범 베드로 : 1903-1946) 신부가 해미 순교자들을 목격한 증인들을 찾아 증언을 듣고, 그 순교 터를 확인하기에 이른다. 이후 생매장 순교 터 발굴 작업이 이루어지고 유해는 상흥리 본당 주변에 안치하였다. 1975년에는 생매장 당한 이름모를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하여 높이 16미터의 탑을 세웠다.

바로 신부에 의해 발굴되어 상흥리 본당 인근에 안장됐던 순교자들의 유해는 본래의 자리이기도 한 현재의 자리로 돌아왔다. 또한 여숫골성지 성지 성당 앞의 표석에 ‘해미순교성지’라 표기된 것은 여숫골 뿐만 아니라 신앙 증거 터인 해미읍성의 동헌과 교수형이나 옥사로 순교한 옥 터, 나무에 매달아 고문을 하거나 교수형이 집행됐다는 호야나무, 효수나 자리게질 외에 온갖 잔인한 방법에 의해 신자들이 순교한 남문 밖 순교 터, 남문에서 생매장터까지 생매장 순교자들이 걸었을 십자가의 길 1.5km, 모두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만큼 해미읍성과 여숫골성지는 불가분의 관계이고 순교의 연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병인박해

병인박해란 조선 후기 대원군이 가톨릭 교도를 대량 학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원인(遠因)은 당시 시베리아를 건너온 러시아의 남하(南下)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1864년(고종 1) 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慶興府)에 와서 통상하기를 요구하였을 때 대원군 이하 정부요인들의 놀람과 당황은 대단하였으나 이에 대한 대책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조선에 와 있던 몇몇 가톨릭 교도들은 대원군에게 건의하기를 한·불·영 3국동맹을 체결하게 되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으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 하여, 대원군으로부터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게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그러나 이들은 그 시기를 놓치고 말았으니 당시 지방에서 포교하고 있던 다블뤼 주교와 베르뇌 주교가 서울에 돌아왔을 때는 조정에서 이미 러시아인의 월경과 통상요구가 시일이 경과하여 한낱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을 때였다. 그리하여 3국동맹이 체결되면 포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선교사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그들은 지둔(遲鈍)과 무책임한 주선(周旋)의 발설로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톨릭교를 서학(西學)·사학(邪學)이라 하여 배척하던 당시,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학(天主學)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조대비(趙大妃) 이하 정부 대관들이 가톨릭 교도의 책동을 비난하자 대원군은 이들 가톨릭 교도를 탄압하기로 결심하였다.1866년 가톨릭교 탄압의 교령(敎令)이 포고되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학살당한 것을 필두로 불과 수개월 사이에 국내 신도 8,000여 명이 학살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아직도 체포되지 않은 3명의 프랑스 신부의 행방을 찾고 있었고, 이 사건으로 산속에 피신하여 좇겨 다니다가 병으로 죽고 굶주려 죽는 부녀자와 어린이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이때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가 톈진[天津]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전국의 천주교 신도 8,000명의 순교자가 발생한 병인박해 시기에는 1000을 훌쩍 넘는 신자들이 해미로 끌려와 재판도 없이 순교의 길을 가게 된다. 동헌에서 배교를 거부한 신자들은 옥에 갇히고, 옥 앞의 호야나무에 묶이기도 했다.

해미와 여숫골의 순교

피의 제사상 자리개돌[1][2]

이 박해 기간 동안 해미 진영에 있었던 두 채의 큰 감옥은 잡혀 온 교우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교수형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등으로 죽어 갔다. 또 더욱 잔인하게 돌다리 위에서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돌에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기도 했고, 여러명을 눕혀 두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 꿈틀거리는 몸뚱이를 발견하면 횃불로 눈을 지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쟁이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 한다. 온갖 회유와 협박, 모진 고문에 아랑곳하지 않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 지친 관헌은, 특히 1866년 병인년에서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시에는 시체 처리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 생매장을 하기도 했다.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에 수십 명씩 끌고 가 아무 데나 땅을 파고 구덩이에 산 채로 집어넣고 흙과 자갈로 덮어 버리는 참혹한 행위가 수없이 되풀이 됐다. 나중에는 열댓 명씩 신자들을 포승줄로 묶어 성 밖으로 끌고 가 구덩이에 밀어 넣기도 하고 더러는 물웅덩이에 밀어 넣어 생매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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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참고문헌

  • 해미순교성지 웹사이트 http://www.haemi.or.kr
  • 주평국(1996),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출처

  1. 피의 제사상 자리개돌, 교황방문 충청남도 천주교 성지 <피의 제사상 자리개돌> 검색, http://cncatholic.net/html/kr/sub01/sub01_010201.html
  2. 해미읍성 수구 위에 놓여있던 돌다리로 병인박해 대 천주교신자들을 자리개질로 처형했던 사형도구다. ‘자리개질’은 돌 위에 사람을 들어 매쳐서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형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