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경 오페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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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사)김자경 오페라단은 1968년 故 김자경 선생님이 한국의 오페라 발전과 저변확대를 위하여 창설한 민간 오페라단으로 1968년 베르디의 대표적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첫 공연한 이래 "나비부인" "원효대사" 등 국내 초연, 한국 최초의 야외 그랜드 오페라 "메리위도우" "카르멘" 공연 등 607회의 그랜드 오페라와 1,500여 회의 단막 오페라와 각종 음악회를 무대에 올린 한국의 대표적인 오페라단입니다.



김자경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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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자경 선생님은 1950년 한국인 최초로 카네기 홀에서 독창회를 가졌고, 1968년 한국 최초의 민간오페라단인 `김자경 오페라단'을 창단하였으며 60여 편의 그랜드 오페라를 무대에 올린 한국 오페라의 대모라고 불립니다. 1917년 9월 개성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나 이화여대 음대와 줄리어드 음악학교, 이탈리아 산타 체칠리아 음악학교를 거쳐 한양대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았습니다. 1948년 명동 국립극장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춘희)에서 주인공 비올렛타역을 맡아 노래했습니다. 31세 줄리어드 음악학교에 입학한 김자경 선생님은 세기적인 소프라노 릴리 폰즈의 무대를 보고 지도교수를 찾아가 앞으로 자신이 카네기홀에서 독창회를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당시 변방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온 여인의 당돌한 말에 교수는 비웃었지만 1950년 5월 한국인 최초로 카네기홀에 서며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갖습니다. 귀국 후 선생님께서는 이화여대 음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1962년 8월 남편 되시는 故 심형구 화백님을 여의고 충격으로 몸져 눕고, 3년 만에 슬픔에서 벗어나 1년 여간 이탈리아를 비롯해 전 유럽의 성악 교육제도를 돌아본 뒤 귀국해 재산을 털어 '김자경 오페라단'을 창단하였습니다. 창단 무렵, 직업 오페라단이라고는 '김자경 오페라단' 뿐이어서, 반듯한 성악가 치고 연습실을 겸했던 서울 대신동 그녀의 집에서 먹고 자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현재 대한민국 음악계의 거성들이 거의 모두 이 집에서 음악의 꿈을 키웠습니다. '영원한 춘희'라는 애칭을 가진 그녀의 마지막 무대는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한 <라 트라비아타>가 그녀의 마지막 무대가 되었습니다. 항상 스스로 "오(오페라)서방과 결혼했다"라고 말씀하시던 선생님은 아직도 우리 곁에 우리의 오페라 곁에 머무르십니다. 대한민국 예술원상 (1974), 은관문화훈장(1974), 중앙일보 문화대상 (1976), 국민훈장석류장(1983), 올해의 음악가상(1984), 세종문화상 (1987), 프랑스 문화예술 공로훈장(1992)을 받았고 1999년 11월 한국예술평론가협회 '20세기를 빛낸 예술인' 음악부문에 선정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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