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선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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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 Data

타입 : 인물
한글항목명 : 인선왕후
한자항목명 : 仁宣王后
편자 : 자운서원팀 김소희

내용

  • 요약 : 조선 제17대 왕 효종의 비. 1631년 봉림대군과 가례를 올려 풍안부부인에 초봉되고, 병자호란 후 봉림대군과 함께 선양에서 8년간의 볼모생활을 하고 돌아와 세자빈이 되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에 진봉되었다.
출생~사망 1619~1674
본관 덕수(德水)
별칭 휘호 경렬명헌(敬烈明獻)

아버지는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덕수(德水) 장씨 장유(張維)이며 어머니 김씨는 우의정을 지낸 김상용의 딸이다. 1618년(광해군10) 12월 시흥 장곡동 안골마을에서 출생하였다.

1631년 14세에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과 혼인하여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에 봉해졌다. 병자호란소현세자 내외와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가 8년간 심양에서 기거하였고 그곳에서 현종을 낳았다. 이후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볼모에서 풀려나 귀국하였으나 독살로 의심되는 의문의 죽음을 맞았으며 한 달뒤 봉림대군이 귀국하여 세자로 책봉되었다. 장씨는 1646년 3월 소현세자빈이 사사된 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인조가 죽은 후 효종은 왕위에 올랐으며 2년 후 장씨는 정식으로 왕비가 되었다. 효종 못지않은 북벌론 지지자였던 인선왕후는 효종과 더불어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굿판을 근절하고 금주령을 내리는 한편 이불의 색을 적색과 청색의 두가지 색으로 통일하여 전시에 군복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이렇게 준비된 재원은 모두 북벌 계획에 사용되었다.

이후 1659년 효종은 머리에 난 종기에 침을 맞다가 피를 너무 많이 쏟아 재위 10년만에 사망하였다. 이로서 북벌론은 물거품이 되었고 아들 현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세력이 커진 조정대신들에 의해 실권에서 멀어져 갔다. 아들 현종이 즉위한 후 왕대비로서 효숙(孝肅)의 존호를 받았다. 소생으로는 현종과 6명의 공주를 두었다. 인선왕후는 몸이 무척 뚱뚱했다고 전하며 남편 효종의 북벌 계획의 수행을 못 보고 1674년(현종 15) 57세로 사망하였다.

효종이 묻혀 있는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 영릉(寧陵)에 쌍릉으로 안장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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