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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면직물

근대 조선에서 상품으로 유통된 면직물은 재래면포(토포)와 기계로 생산된 수입면직물(양포)로 초기에는 재래면포와 수입면직물의 시장이 달리 존재하였다. 그러나 수입면직물이 점차 토포시장을 잠식해 감에 따라 우리나라 면직물 생산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수입면직물이 조선 면직물의 수요를 상당부분 차지하게 된다. 당시의 면직물에는 기계제의 수입면직물과 조선에서 생산하는 각 지역의 특산물인 무명과 공장에서 생산되는 면직물로 구성된다.

연구방법

근대면직물에대한 조사시기는 1876년 개항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가 끝나는 1945년까지로 하며, 조사방법은 선행연구와 당시의 문헌자료 및 각종보고서, 신문기사를 기본으로 하며, 특히 『朝鮮向染織物名稱類彙』『綿絲布ニ關スル調査(綿布ノ部)』『朝鮮綿業史』『朝鮮の織物に就て』문헌을 중심으로 조사한다.

근대 면직물의 시기별 특징

1876년~1882년의 시기별 특징

1876년 조일수호조규로 개항정책이 시작되면서 1876년 9월 부산을 시작으로 1880년 4월 원산, 1883년 1월 인천, 1883년 8월 양화진이 개항된다. 1876년부터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기 전까지 조선의 교역은 일본만이 공식적이었으며, 1882년부터 청이 일본과 함께 조선과의 교역을 주도하게 된다. 개항을 시작으로 늘어나는 수입품의 절반이상은 직물이 차지하는데 조선의 수입노선은 1882년까지 일본이 유일하였고, 그 이후부터 청과 일본의 양국에서 조선과의 직물무역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당시 실제 수입되는 직물의 원산지는 대부분이 서양산으로 특히 영국산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는 일본과 중국의 면직물에 대한 중계무역으로 인함이다. 당시의 일본과 청은 근대적인 직물공업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로 일본은 영국산 옥양목과 자국산 광목을, 청은 자국산 견직물과 영국산 옥양목, 광목을 중계무역의 형식으로수출하였다. 당시 가장 많이 수입된 면직물은 옥양목, 한랭사로 이 제품들의 특징 상 조선의 상류층과 농민층의 수요는 많지 않았다. 즉 조선의 상류층은 견제품을 선호하였고, 농민층은 작업복과 평상복에 적합하면서 당시의 세탁방법과 의복 관리방법에 적합한 질기고 튼튼한 직물을 필요로 한 결과 옥양목과 한랭사와 같은 제품은 가격이 저렴하여도 구매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조선에 수입된 면직물은 조선 면직물 수요의 1/4을 차지하고, 이는 조선 농가에서 제직하던 토포 생산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한것으로 조사된다. 그외에도 광목, 홍색 면직물, 능직면포 등이 수입되었다.

1895년~1910년의 시기별 특징

청일전쟁의 종전으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입지는 강해지고 청은 서양직물의 중계무역보다는 자국산의 견직물과 모직물을 중심으로 교역하였다. 일본 역시 서양면직물의 중계무역보다는 자국산 면직물을 수출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일본산 면직물은 1890년부터 조선으로 수출되기 시작하였으나 제품의 조악성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1895년부터 일본은 제품의 품질과 규격을 조선산 재래무명과 유사하게 개발하여 공장제 수공업으로 생산 한 낮은 가격의 일본목면과 일본산 광목을 조선으로 수출하게 된다. 이로 인해 영국산 옥양목과 한랭사는 수입이 감소되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에 영국산과 일본산 면직물이 서로 공존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청과 일본의 무역형태가 변할 뿐만 아니라 수입노선의 다양화로 직물의 종류도 다양화되는 시기다. 이 시기의 수입면직물은 광목, 생목면, 옥양목, 백목면, 일본목면, 한랭사, 천축포, 모슬린 등이 수입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 외에도 조선면업사에 의하면 광목, 양목, 옥양목, 목모본단, 목관사, 마미단, 라단 양공단, 항라 등이 1910년 전후로 수입된 직물 명칭으로 기록되어있다.[1]

1910년~1930년의 시기별 특징

경술국치로 인한 일본의 조선 지배와 1920년 일본과 조선간의 무관세 시행, 1924년 사치품에 대한 관세를 높이는 일본에 대한 유리한 관세개정은 조선에서의 일본산 직물가격 경쟁을 높이는 동시에 영국산 면직물과 기타 국가의 직물 가격을 상승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는 1920년대 말이 되면서 1910년 초반에 다양하던 직물의 수입노선이 점차 일본으로 일원화가 되고 1942년에는 면직물의 전량을 일본에서만 수입하게 된다.이 시기의 수입 면직물은『조선통계연보』에 따르면 광목, 생목, 능금건, 운제포, 천축포, 이탈리안 클로스, 면 플란넬, 백목면이 수입되고, 동아일보 포목주단의 시세 기사에 의하면 당목, 옥당목, 양목, 옥양목, 목면, 쇄목면, 광목, 목모본단, 목관사의 명칭을 볼 수 있다.[2] 이 시기에는 이전에 일본 이외의 국가에서 수입되었던 면직물이 일본에 의해 생산된 면직물이 조선에 수입되는 특징을 가진다.

1930년~1945년의 시기별 특징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조선에서는 군수물자제조에 따라 직물부족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직물부족현상의 해결책으로 인조섬유인 스테이플파이버를 30% 혼직하도록 강요, 필 이하의 직물만 구매 가능, 직물배급제 등이 시행되었는데 이는 혼직으로 인한 인조섬유의 교직물의 증가, 인견직물의 소비증가, 직물의 양·질적으로 하락하게 된다. 그 외에도 조선 내 면방직업이 발달하여 1923년 조선인 자본의 경성방직에서 공장제 면직물 생산을 시작으로 1935년부터 가공 면직물인 옥양목, 1937년 옥당목을 생산한다. 그러나 가공 면직물은 설비가 갖추어진 대규모 공장에서나 생산이 가능한 것으로 소규모의 방직공장에서는 주로 광목을 생산하였다. .[3] 즉 가공과정을 거쳐야하는 고급 면직물은 일본에서 생산하여 수입을 하고 가공과정이 적은 광목은 조선에서 생산하는 면직물 생산 체계로 재편되면서 조선산과 일본산 면제품이 병용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939년까지 생목면, 세포, 광목, 옥양목, 쇄세포, 쇄광목, 백목면, 진스, 능금건, 운제포가 수입되었으나,[4] 1940년 2차 세계대전과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다양한 면직물 생산은 중단되고, 광목의 획일적인 면직물만 생산되었다. 또한 생산량과 수입량이 현저하게 감소하였다.

근대 면직물의 종류

근대 면직물의 종류와 특징은 옥양목, 한랭사, 금건, 광목, Shetting, 목면, 천축포, 모슬린, 운제포, 한양목, 와사단, 소창 등으로 구분하여 정리한다.

옥양목

옥양목(玉洋木, calico)은 생금건(生金巾)으로도 불렸으며, 당시에는 당목(唐木), 양목(洋木), 때로는 광목(廣木)으로도 불리었다.[5] 옥처럼 하얀 서양옷감이라는 의미로 명명된 평직의 면직물로 대부분 영국 맨체스터에서 생산된 공장제 공업제품이었다. 영국산 옥양목은 재래면직물인 무명에 비하여 얇고, 흰색의 빛을 띠어 외관상 맵시가 있어 양반들이 개항이전부터 청 상인을 통해 널리 사용되었으며, 개항이후 사용이 증가하였다.[6] 보통 26~28번수 내외의 가는 실로 짜며 1필의 중량은 보통 10파운드 내외며, 폭은 38인치, 길이는 38야드다.[7]
현재는 금건에 풀을 먹이고 윤기 가공을 한 것을 옥양목으로 보고 있다.[8]

한랭사

한랭사(寒冷紗)는 얇은 평직의 면직물로 외관이 아름답고 마직물과 같은 촉감을 가져 여름옷감으로 사용되었으나 내구성이 약하다. 60번수 내외의 경사와 80번수 내외의 단사를 위사로 사용한 얇은 면직포며, 1필의 폭은 42인치, 길이는 10야드 정도이다.[9]

금건

광목

광목(廣木, sheeting)은 문헌에 따라 시칭그, 조포(粗布), 생조포(生粗布)로 불리며, 조선인의 기호에 맞게 가격이 저렴하고 내구성이 있어 서민들의 옷감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10] 소폭목면(小幅木綿)과 금건(金巾)의 중간에 위치하는 품질과 내구력을 가지고 도시시장을 중심으로 소비지역을 넓혀갔다.[11] 경위사 모두 24번수의 단연사를 이용하여 직조한 평직의 조포로 폭36촌 1필의 길이 40마이다.[12]
일본산으로는 3A가 유명하며, 조선산으로는 경성방직회사(경성방직주식회사)에서 생산한 삼성표, 삼각산표 등 여러 상표의 광목이 있다.

Shetting

sheeting은 옥양목과 같은 방법으로 짠 면포지만, 옥양목보다는 굵은 원사를 써서 두껍게 짜여진다. sheeting를 판매하는 상인들은 조포(粗布)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3]
그 외에도 생조포(生粗布), 광목(廣木)이라고 불리었다. 수입량은 적어서 통계상 옥양목에 포함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규격은 옥양목과 같다 朝鮮綿絲布商聯合會(1929) 朝鮮綿業史. 京城: 朝鮮綿絲布商聯合會. pp.148-149.
현재는 시트지의 원단을 의미하며 거칠게 직조하여 가장 저렴한 순 백색의 면포를 말하고, 가봉이나 입체 재단때 사용하기도 한다. [14]


목면

천축포

천축포(天竺)는 인도산 면직물로 질기고, 가공과정을 많이 거치지 않아 값이 저렴하였다. 금건류와 동일한 백색면포로 조선에 수입되는 천축포의 종류에는 生천축포, 晒천축포, 色천축포 3가지가 있다.[15] 천축포는 메킨칸이라고도 불린다.

모슬린

모슬린(muslin)은 당시 수입된 대표적인 면직물로 여름 의복 감으로 조선인에게 인기를 끌었다. 면모슬린과 cambric,[16] . batiste[17] 은 서로 유사한류의 직물로 금건과 비교하면 원단이 얇다. 또한 풀을 먹이지 않거나 풀을 얇게 먹여도 금건과 비교하면 원단의 감촉은 매우 부드럽다. 그러나 cambric와 batiste에 비하여 모스린 원단의 질이 가장 떨어지는 편이다. [18]

운제포

운제포(雲齊布)는 경사 23번 내지 18번수의 단연사, 위사는 10번수 내지 14번수, 드물게 20번수까지의 단연사를 사용하여 직조한 3매 능직의 두꺼운 면포로 제직하고, 얇은 것은 보통 능목면과 동질의 것이다. 양복지로 사용되어지며, 중국하층사회에서 의류로 많은 수요가 이루어지고 조선에서 운제포는 능목면의 심상치 않은 유행으로 수요가 매우 적다.

한양목

한양목(漢陽木)은 두껍게 짠 금건(粗布)과 비슷한 천으로, 경위사 모두 20번수의 단사를 사용한 평직의 면포로 조선에서 의류지로 많이 사용되었다. 폭은 9촌5분1반, 길이 2장9척이 보통이다. [19] 1920년대 후반 김덕창의 동양염직주식회사에서 개발한 동양목에 밀려 수용는 점차 줄어간다. 그 외에도 한양저(漢陽苧)와 한양사(漢陽紗)가 있는데, 한양저는 마포(麻布)의 대용품으로 한양목과 마찬가지로 이와 유사한 동양저, 해동주가 등장하면서 1920년대 후반에는 수요가 감소한다.[20] 한양사는 경사에는 silket, 위사에는 견사를 사용한 견면교직물로 紗 및 평직 모기장, 호박 등이 있다.[21] 경사는 생사, 위사는 silket으로 직조한 평직물로 생주(生紬)의 대용품이다.[22]

와사단

와사단(瓦斯緞)은 와사 silket 80번수의 쌍자(双子)로 평직으로 직조한 것에서 려와 같은 광택을 낸다. 백색, 또는 회색 무지염이 많고, 조선에서는 상급의 의류지에 속한다. 한단의 길이는 2장 9척, 폭은 9촌5분이 있다.[23] 기계방적사를 이용한 면직물로 비단같이 광택이 나게 만든 것으로 조선에서는 1920년대에 들어서 상류층의 의복지로 많이 소비되었으며, 이와 유사한 직물로는 동양목(東洋木)을 들 수 있다.[24]


주석

  1. 朝鮮綿絲布商聯合會(1929) 朝鮮綿業史. 京城: 朝鮮綿絲布商聯合會. p.255.
  2. 박진경(2014) 개항이후 일제강점기 수입직물의 수용과 의생활 변화. 석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p.23.
  3. 박진경(2014) 개항이후 일제강점기 수입직물의 수용과 의생활 변화. 석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p.35.
  4. 박진경(2014) 개항이후 일제강점기 수입직물의 수용과 의생활 변화. 석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p.37: 朝鮮總督府統計年報 재인용.
  5. 兪水敬(1989) 韓國女性洋裝의 變遷에 관한 硏究. 박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p.86; 朝鮮綿絲布商聯合會(1929) 朝鮮綿業史. 京城: 朝鮮綿絲布商聯合會. pp.71-81. 재인용.
  6. 박진경(2014) 개항이후 일제강점기 수입직물의 수용과 의생활 변화. 석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p.10.
  7. 朝鮮綿絲布商聯合會(1929) 朝鮮綿業史. 京城: 朝鮮綿絲布商聯合會. pp.71-81.
  8. http://fashion-guide.jp/fiber-fabric/calico.html 金巾. 검색일: 2019.10.27.
  9. 朝鮮綿絲布商聯合會(1929) 朝鮮綿業史. 京城: 朝鮮綿絲布商聯合會. pp.166-167.
  10. 박진경(2014) 개항이후 일제강점기 수입직물의 수용과 의생활 변화. 석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p.11.
  11. 權泰檍(1988) 韓國近代의 綿業과 織物業. 박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p. 51.
  12. 京城府(1925) 綿絲布ニ關スル調査(綿布ノ部). p.80.
  13. 京城府(1925) 綿絲布ニ關スル調査(綿布ノ部). p.30.
  14. http://fashion-guide.jp/fiber-fabric/calico.html 金巾. 검색일: 2019.10.27.
  15. 朝鮮綿絲布商聯合會(1929) 朝鮮綿業史. 京城: 朝鮮綿絲布商聯合會. pp.133-147.p. 12.
  16. 프랑스의 캄브레(cambrai)가 원산지이므로 이런 명칭이 붙었다. 올이 섬세하고 부드러운 평직의 면직물로써 표백하거나 무지염으로 하여, 행커치프・에이프런・아동복・안감 등으로 사용한다. 원래는 가느다란 아마사로 짠 얇은 리넨 직물인데, 이 원형은 현재로는 케임브리크(cambrique), 아이리시 케임브리크(irish cambrique)라고 한다; 패션전문자료사전(1997) 패션전문자료편찬위원회, cmmbric. 검색일 2019.10.2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86491&cid=50345&categoryId=50345
  17. 얇은 평직 코튼천의 일종인데 아름다운 실크 모양의 광택을 지녔다. 흰바탕이나 짧은 색으로 무지염하든지 자수를 하여 여름용의 드레스, 나이트 가운, 아동복, 행커치프 등에 쓰인다. 원래 프랑스의 리넨업자 장 바티스트(Jean Batiste)가 최초로 짠 데서 이런 명칭이 붙었다.;패션전문자료사전(1997) 패션전문자료편찬위원회,batiste. 검색일 2019.10.2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78896&cid=50345&categoryId=50345
  18. 權泰檍(1988) 韓國近代의 綿業과 織物業. 박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p. 317.
  19. 權泰檍(1988) 韓國近代의 綿業과 織物業. 박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p. 78.
  20. 權泰檍(1988) 韓國近代의 綿業과 織物業. 박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p. 317; 朝鮮經濟雜誌(1928) 朝鮮의 綿布需給槪況, 151호, 1928.7. p.10. 재인용
  21. 兪水敬(1989) 韓國女性洋裝의 變遷에 관한 硏究. 박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p.96; 朝鮮總督府(1913) 京城仁川商工業調査. 재인용.
  22. 吉永彦太郞(1916) “朝鮮向染織物名稱類彙”. 朝鮮彙報, 대정4년3월, p.151.
  23. 京城府(1925) 綿絲布ニ關スル調査(綿布ノ部). p.78.
  24. 權泰檍(1988) 韓國近代의 綿業과 織物業. 박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p. 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