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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ong0708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6월 25일 (목) 02:5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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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학력

  • 오류고등학교 졸업
  • 동국대학교 사학과 재학중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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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 음악듣기, 축구, 전시관람

기말과제

최부의 표해록

최부의 표해록 장서각본

  • 3월 5일

初五日,過(劉)(留】城鎮,是日睛,曉發船,過九里山至洞山,山有十王殿十王殿시왕전,又過秦梁洪鋪秦梁洪鋪진량홍포、茶城店、梁山寺,至境山市鎮(29) 山有上下寺,皆巨殺, 又過集殿、白廟兒鋪" 夾溝淺,至夾溝驟,驛丞忘其姓名,不從陳萱之言,供饋臣等甚優,贈杜玉以一斗米,萱與玉爭奪,玉 董額,自曝至黃家閘,閘上有眉山萬翼碑,臣令程保告楊旺請觀之,旺不肯,强而後許之,其碑撰略曰:“洪惟我朝太祖高皇帝,龍飛淮甸,混一寰宇,建都南京,以臨天下,暨我太宗文皇帝,紹基鴻業,遷都北京,于時方獄諸鎮及四夷,朝聘貢賦,每歲成會於畿內,而滇蜀、荊楚、瓯越、閩潮,悉由楊子江泛東海,沿流北入天津,度潞河訪京師,其江海之闊,風波之險,京儲轉輸為難,故我太宗文皇帝慮東南海運之艱,乃召股肱大臣,往徐、楊、淮、濟,度地勢,順水性,東自瓜洲,西自儀真,成作土貝以截之,倒不泄於江,仍因近世舊矢見,臺灣引水為河,而總會于楊,由楊到准,由淮至徐,由徐至濟,自濟以南,則水勢南下接黃河,會進入海,自濟以北,則水勢北流接衛河,會白河,亦入於海, 上復以地形南北,高下不一,分泄水勢,無以貯蓄,非經久計,仍命有司置閘,或五七一聞,或十數"里一開,溺水水濟舟,迄今淵源不竭,自是方獄蕃鎮,與夫四夷朝聘會同,及軍民貢賦轉輸、商賈貿易,皆由於斯,而舟楫之利,始通乎天下,以濟萬民,無復江海風濤之厄,我太宗是作,實續禹之功,補天之不足,開萬世大平之盛典也,徐迪古彭城,東方大郡,襟淮帶濟,為南北兩京喉舌!徐之北黃家村之東,有山溪一派,南流入

p.412 閘,水勢湧多漱流,走沙壅塞淤淺,舟楫此,恒為阻隘,民甚病焉,天順戊寅春,有司具疏聞于朝,我英宗睿皇帝不讚洪休,益篤前烈,召有司,立閘以通之,設官以理之,自是舟楫往來,無復前患”云云,閘官開閘,令人奖__牽上臣船以過,又行過義井、黃家鋪(候)侯〕村鋪、李家中鋪,新興閘、新興寺、(劉)留城鎮,夜三更,至謝溝閘.

유성진(留城鎭)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새벽에 배를 출발시켜 구리산(九里山)을 지나 동산(洞山)에 이르니, 산에는 시왕전(十王殿)374 이 있었습니다.

또 진량홍포(秦梁洪鋪)375, 다성점(茶城店), 양산사(梁山寺)를 지나서 경산시진(境山市鎭)에 이르렀습니다.

경산(境山)에는 상사(上寺)와 하사(下寺)가 있는데 모두 큰절이었습니다.

또 집전(集殿), 백묘아포(白廟兒鋪)378 협구천(夾溝淺)을 지나 협구역(夾溝驛)에 이르렀는데, 성명은 잊었지만 어떤 역승이 진훤의 말을 따르지 않고 신 등에게 음식을 매우 넉넉하게 주었습니다.

두옥(杜玉)에게도 쌀 한 말을 주었는데, 진훤과 두옥은 서로 빼앗으려고 다투다가 두옥이 진훤의 이마를 쳤습니다.

협구역에서 황가갑(黃家間)에 이르니, 황가갑 위에 미산만익비(眉山萬翼碑)380가 있었습니다.

신이 정보를 시켜 양왕에게 보기를 청하였습니다.

양왕은 내켜하지 않았지만 강하게 조르니 허락하였습니다.

그 비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회전(句)에서 몸을 일으켜 천하를 통일하고 남경에 도읍을 세워서 천하에 군림하셨다. 우리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에 이르러 큰 제업(帝業)을 계승하여 북경으로 도읍을 옮기셨다.[1] 당시에 방악(方嶽)과 제진(諸鎭) 및 사이(四夷)의 조빙(朝聘)과 공부(貢賦)가 해마다 모두 기내(畿內)383로 모였다. 그리고 전촉(蜀)·형초(荊楚)·구월(歐越)·민절(__浙)이 모두 양자강을 경유하여 동해에 떠서 물의 흐름을 따라 북쪽으로 가서, 천진(天津)에 들어와 노하(路河)를 건너서 경사에 이르렀다.

그 강해(江海)의 광활함과 풍파의 험난함으로 경사로의 운반 수송이 어려웠다. 그런 까닭에 우리 태종문황제께서 동남방의 해운이 곤란함을 염려하여 이에 고굉대신(股肱大臣)84을 불러 서주, 양주, 회남, 제남(濟南)에 가서 지세를 헤아리고, 물길을 따라 동쪽은 과주(瓜洲)로부터, 서쪽은 의진(儀眞)으로부터 모두 제방을 만들어서 물을 막아 장강[2]으로 새지 않도록 하셨다.

이어서 근세(近世)의 구규(舊)385를 따라 뱃길을 파서 물을 끌어들여 강을 만들어 모두 양주에 모이게 했으므로, 양주를 경유하여 회안(淮安)에 이르고, 회안을 경유하여 서주에 이르고, 서주를 경유하여 제남에 이르게 하였다.

제남에서 남쪽은 수세(水勢)가 남쪽으로 흘러내려 황하와 접하여 회수를 만나 바다로 들어가고, 제남에서 북쪽은 수세가 북쪽으로 흘러 위하(衛河)에 접하여 백하(白河)를 만나 또한 바다로 들어가게 하였다.

황제께서는 다시 지형의 남쪽과 북쪽이 높고 낮음이 같지 않아 물길이 나뉘어져 물을 모아놓을 수 없는 것은 장기적인 계책이 못된다는 이유로 곧 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갑(間)을 두되, 5-7리에 1갑을 두기도 하고 십 수리에 1갑을 두기도 해서 물을 모아 배를 건너게 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물의 연원이 마르지 아니하였다.

이로부터 방악(方嶽)과 번진(蕃鎭) 및 사이(四夷)의 조빙(朝聘)와 회동(會同)386, 군민(軍民)의 공부(貢賦) 수송, 상고(商賈)의 무역이 모두 이곳을 경유하게 되고, 배의 이로움이 비로소 천하에 통하여 만민을 구제하고 다시는 장강과 바다에 풍랑의 재액이 없게 되었다.

우리 태종께서 하신 이 일은 실로 우왕(禹王)의 공적을 계승하여 하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고 만세의 태평을 열어놓은 성대한 사업이었다. 하물며 서주는 곧 옛 팽성(彭城)으로서 동방의 큰 군(郡)이며, 회수를 끼고 제수(濟水)를 둘러싸 남경과 북경의 길목이 되었음에랴!

서주의 북쪽 황가촌(黃家村)의 동쪽에 산에서 흐르는 시냇물 한 가닥이 남쪽으로 흘러 갑문으로 들어가는데, 수세가 용솟음치고 돌아 흐르는 곳이 많아 모래가 밀려 내려와 쌓여 하천을 막으니, 배가 이곳을 지나는데 항상 장애가 되어 백성들이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다.

천순(天順) 무인년(1458) 봄에 유사가 자세히 상소하여 조정에 알리니, 우리 영종예황제(英宗睿皇帝)께서 유업을 계승하여 이를 빛내고 전대의 공업(功業)을 더욱 두터이 하려고, 이에 유사를 불러 갑문을 세워서 이를 통하게 하고 관직을 설치하여 이를 관리하게 하셨다.

이로부터 배가 왕래하면서 다시는 예전과 같은 우환이 없어지게 되었다.”

갑관(官)이 갑문을 열더니 인부로 하여금 신의 배를 들어 올려 지나가게 하였습니다. 또 가다가 의정(義井)·황가포(黃家鋪)387 · 후촌포(侯村鋪)·이가중포(李家中鋪)388. 신흥갑(新興間)·신흥사(新興寺)·유성진(留城鎭)을 지나서 밤 3경에 사구갑(謝溝間)에 이르렀습니다.

5th Day. Passing Liu-ch'eng Market. This day was fair.

[We went from Chiu-li Mountain to Chia-kou Station.] The Station Master, whose name I have forgotten, did not go by what Ch’en Hsüan said and served us food lavishly. He presented a bushel of rice to Tu Yü. Hsüan struggled with Yü for it, and Yü hit Hsüan on the forehead. From the station we came to Huang-chia Lock, on which was Mei Mountain Myriad Carriers Stone Marker [Mei-shan wan-i pei]. I ordered Chòng Po to ask Yang Wang to let us look at it, but Yang was not willing to do so. He gave permission only after we had insisted. Briefly, the inscription on the stone said, “Magnificent, the Exalted Emperor T'ai Tsu [1368-1398] of our ruling house rose, a dragon flying, from the region of the Huai and united the world. He built his capital at Nanking to watch over the Empire. With the succession to the great duties of our Cultured Emperor Tai Tsung [1403-1424], he moved the capital to Peking. Then the Four Mountains, all the guardian mountains, and the Four Barbarians76 paid tribute and taxes to the Court. Every year, they all gathered in the Imperial domains. But Tien, Shu, Ching, Ch'u, Ou, Yüeh, Min, and Che77 sailed, by way of the Yangtze River, the Eastern Sea, following it north to Tientsin. They went up the Lu River78 and reached the capital. “The distances of the river and sea and the dangers of wind and waves made transporting (grain) and accumulating it at the capital hard. Our Cultured Emperor T'ai Tsung, therefore, mindful of the difficulty of transport in the Southern and Eastern seas, had his greatest ministers go to the Hsü, Yang, Huai, and Chi and survey the land and regulate the rivers. East from Kuachou and west from I-chen they built embankments along them all to block them and keep them from leaking into the Yangtze. Making use of existing channels, they cut canals and led in streams to make a river, converging in the Yang. From the Yang it went to the Huai, from the Huai to the Hsü, and from the Hsü to the Chi. “From the Chi south, rivers flowed south and joined the Huang River. That converged with the Huai and entered the sea. From the Chi north, rivers flowed north and joined the Wei River. That converged with the Pai River and also entered the sea. His Majesty, realizing that the land north and south, being of uneven height, dissipated the waters and kept none and that such a condition was not good in the long run, ordered those in charge to put up locks: in some places one lock every five to seven li, in others one every ten li or more, in order to catch the water and let boats pass. To the present day, that fountainhead [of benefits] has not been exhausted. 79 “From then on, the gathering of tribute to the Court from the Four Mountains, the guardian mountains, and the Four Barbarians; the transportation and accumulation of military and civilian taxes; and all commerce and trade have come by way of it. For the first time, the advantages of water transport extend throughout the Empire to the benefit of the people. There will not again be danger from the wind and waves of the Yangtze and the sea. “This act of our T’ai Tsung has truly carried on the virtuous accomplishments of Yü. It has made up a deficiency of Heaven. It has begun a glorious procedure for all ages and all alike. "That is all the more so in that Hsü had been the old P’eng-ch'eng, a great prefecture of the east. It strategically dominated the Huai and Chi and was a controlling pass between the northern and southern capitals. “North of Hsü and east of Huang-chia Village was a mountain stream that flowed south into a lock. Its force was torrential, and it had many whirlpools. Drifting sand having silted it up and made it shallow, boats passing there were constantly obstructed, and the people were extremely distressed by it. "In the spring of T’ien-shun wu-yin [1458], the authorities drew up a memorial and laid it before the Court. Our Sagacious Emperor Ying Tsung [1457-1464] carried forward the tremendous and good work, adding much to the previous accomplishment. He ordered the authorities to set up locks and make a passage there, and he established an official to take charge of it. Thereafter, boats went to and fro, and there was no more of the previous distress.” The lock official opened the lock and ordered laborers to pull my boats up, and we passed. [We went from l-ching-huang-chia Stop to Hsiehkou Lock.]

  • 3월 6일

初六日,過沛縣,是日晴,曉過頭下開、頭中間、社學、洁頭上 開、(刀)(陽湖、金溝兒淺有上中下三處,至沛縣,縣即漢高祖故里也,縣之東北有河,即泡河,河之越岸有高墩,其前建族門,(標)「標]以 ‘歌風臺’之名,即高祖歌大風之處也,縣之東南有亭躁,即高祖少為上亭長之處也,河之西岸有橋,即張良取履處,飛雲在河口,臣等其河,歷其間,觀其臺,訪其橋,至驛前,驛距河三十步,傅榮謂臣曰:“足下觀我大國制度,以謂何如?自江南抵北都,舊無河路,自至正年間以來,始為通路之計. 至我太宗朝,置平江(候)(侯]以治之,疏清源,濟濟、沛,整淮陰,以達于大江,一帶脉絡,萬里通津,舟楫濟,功保萬全,民受其賜,萬世永頼.” 臣曰:“響非此河路,則我等於崎嶇萬里之路,有百技跛行之苦,今乃安队舟中,以達遠路,不知顛仆之虞,其受賜亦大矣,”是日,自曝過水母神廟,冒夜而行.

패현(__縣)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새벽에 고두하갑(活頭下閘)·고두중갑(活頭中閘)의 상·중·하 세 곳을 지나서 패현에 이르니, 패현은 곧 한고조(漢高祖)389의 고향이었습니다.

패현의 동북방에 강이 있었으니 곧 포하(泡河)였습니다.

포하의 건너편 언덕에 높은 돈대(數臺)가 있었는데, 그 앞에 정문(推門)을 세워 '가풍대(歌風臺)'란 이름을 붙였으니 곧 한고조가 대풍(大風)을 노래390 한 곳이었습니다.

패현의 동남방에는 사정역(四亭驛)이 있었으니 곧 한고조가 젊었을 때 사상정장(泗上亭長)으로 있던 곳이었습니다.

포하의 서쪽 언덕에는 이교(橋)가 있었으니 곧 장량(張良)이 신을 주워 준 곳 392이었습니다.

비운갑(飛雲間)은 포하의 어구에 있었습니다.

신 등은 그 포하를 거슬러 올라가서 갑()을 지나 대(臺)를 구경하고 다리를 찾아보고 사정역 앞에 이르니, 사정역은 포하에서 30보 떨어져 있었습니다.

부영이 신에게 말하기를,

“족하는 우리 대국의 제도를 보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남으로부터 북도(北都)에 이르기까지는 옛날에는 강의 수로가 없었는데, 지정(至正)393 연간으로부터 비로소 수로를 개통할 계책을 세웠습니다.394 우리 태종대에 와서 평강후(平江侯)395를 두어 이를 다스리게 하여 청원(淸源)을 소통시키고, 제수(濟水)·패수(流水)를 깊이 치고 회음(淮陰)의 땅을 파서 대강(大江)에 도달하게 하니, 한 줄기 맥락이 만 리나 되는 수로로 통하여 배가 다니는 데 안전을 보장하여 백성들이 그 은혜를 입어 만세에 길이 힘입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지금까지 이 강의 수로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들은 기구한 만 리 길에 온갖 고통을 겪었을 것인데 지금 배 가운데 편안히 누워서 먼 길을 오면서 전복의 근심을 알지 못했으니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날 사정역에서 수모신묘(水母神廟)396를 지나 밤을 무릅쓰고 길을 떠났습니다.

6th Day. Passing P’ei District. This day was fair.

[We went from Ku-t'ou Lower Lock to P’ei District,] which had been the native place of Han Kao Tsu (r. 202 B.C. -195].80 Northeast of the district was a river, which was the P’ao. On its far bank was a high mound, in front of which a banner gate had been erected. It displayed the name Ko-feng Tower and was the place where Kao Tsu had sung of the great wind. Southeast of the district was Ssu-t'ing Station, which was the place where Kao Tsu had for a short time been head of Ssu-shang Pavilion. On the west bank of the river was I Bridge, which was the place where Chang Liang had got the shoe [that the old man had dropped].81 Fei-yün Lock was at the mouth of a river. We went up that river through the lock, looked at the stand, visited the bridge, and arrived in front of the station. The station was 150 feet from the river. Fu Jung said to me, “Now that you see our great country's system, what do you think of it? Formerly there was no river route from south of the Yangtze to the northern capital. From the Chih-cheng period [1341-1367] there was for the first time a plan for a passage. With the reign of our T’ai Tsung, a Marquis of P’ing-chiang was established to carry it out.82 He dredged the Ch’ing and Yüan, deepened the Chi and Pei, and channeled the Huai and Yin so that they passed into the Yangtze. Throughout the whole region for ten thousand li, streams interlace like veins. Boats are able to pass in safety because of the work. The people have received the benefits and will continue to do so forever.” I said, “If there were not this river passage, it would be our misfortune to hobble along by whatever means we could over a long, hard road. Now we lie at ease in the boats all the long way and do not know what it is to fall down. The benefits we have received are great, indeed.” This day we went from the station past Shui-mu-shen Shrine and on through the night.

  • 3월 7일

初七日,午陰雨,曉過廟道口、湖陵城閘,至兖州府地方,兖州即舊魯國也,過沙河驛少泊,又過孟陽泊間,至八里灣閘,閘西魚臺縣地,縣前有觀魚臺,即魯隱公觀魚之處,縣之得名亦以此,又過上·下淺二鋪、河西集場,至穀亭閘,登河岸以望,則東北望渺茫間,有山不甚高峻,傳榮指其山,日:“彼卽尼丘山,孔子所生處也.” 山之下有孔里、洙·泗·沂水. 又東北望, 若有高山連豆數百里,如雲氣然,榮指其山,曰:“彼乃泰山,即古岱宗山,虞舜及周天子東巡狩之處也,此行若緣陸路,經竞州曲阜縣,則尼丘可 經, 洙、泗可涉, 孔里可觀, 泰山可近望矣.” 過玉皇廟,至南陽閘以泊.

흐렸다 비가 내렸다 했습니다.

새벽에 묘도구(廟道口), 호능성갑(湖陵城閘)을 지나서 연주부(兖州府)지방에 이르니, 연주는 곧 옛날의 노국(魯國)이었습니다.

사하역(沙河)을 지나서 조금 정박했다가 또 맹양박갑(孟陽泊間)을 지나 팔리만갑(八里灣間)에 이르니, 팔리만갑의 서쪽은 곧 어대현(魚臺縣)의 땅이었습니다.

어대현의 앞에는 관어대(觀魚臺)가 있었으니 곧 노은공(魯隱公)398이 물고기를 구경399했던 곳이므로 현이 '어대'란 명칭을 얻은 것 또한 이 때문이었습니다.

또 상천포(上淺鋪), 하천포(下淺鋪)의 두 포와 하서집장(河西集場)400을 지나 곡정갑(毅亭間)에 이르러 강의 언덕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동북으로 아득히 바라보이는 사이에 산이 있었는데 그다지 높고 가파르지는 않았습니다.

부영이 그 산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저 산이 바로 이구산(尼丘山)[1][2]으로 공자[3][4]께서 태어나신 곳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구산 아래에 공리(孔里)와 수수(洙水)·사수(泗水)·기수(淨水)가 있습니다.

또 동북쪽으로 바라보니 높은 산이 수백 리를 이어져 있었는데 마치 구름 같았습니다.

부영은 그 산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저 산이 태산(泰山)이니 바로 옛날의 대종산(俗宗山)입니다. 우(虞) 나라 순(舜) 임금과 주(周) 나라 천자께서 동쪽으로 순수(巡游)하던 곳입니다. 이번 걸음이 만약 육로로 연주 곡부현(曲阜縣)을 경유하게 된다면 이구산도 지날 수 있고 수수와 사수도 건널 수 있고 공리도 구경할 수 있고 태산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옥황묘(玉皇廟)를 지나 남양갑(南陽間)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7th Day. Alternately cloudy and rainy.

[We went from Miao-tao-k’ou to Ku-t’ing Lock.] When we climbed the river bank and looked, we saw that in the vast spaces to the northeast were mountains, which were not very high. Fu Jung pointed to them and said, “They are the Ni-ch’iu Mountains, the birthplace of Confucius. Below the mountains are Confucius' village and the Chu, Ssu, and I rivers.” We also saw in the northeast what appeared to be high mountains lying stretched out over several hundred li like clouds. Jung pointed to them and said, “Those are the T'ai Mountains, the old Tai-tsung Mountains. They are where Yü Shun (traditionally 2317-2208 B.C.) and the Chou emperors made eastern tours. If this group followed the land route by way of Ch’ü-fu District, Yen-chou, we could go through the Ni-ch’iu, cross the Chu and the Ssu, see Confucius' village, and look at the T'ai-shan from nearby.” We passed Yü-huang Shrine and came to Nan-yang Lock and stopped.

  • 3월 8일

初八日,過魯橋驛,是日陰,自南陽開,過聚林閘,至魯橋驛,驛前有魯橋閘, 東道齊魯,西連鉅野,南引淮楚,北抵京師,四通之路,西有黑矾池,池水黑,有太監姓劉者,封王赴京,其疾病、甲胃、鍾鼓、管絃之盛,震盪江河,及是開,劉以彈丸亂射人,其狂悖如此,陳豈曰:“此舟中內官,如此歪爲.” 傅榮問諸臣曰: “貴處亦有此太監否?” 臣曰: “我國內官, 只任宮中酒

p.414 掃、傳命之役,不任以官事,”榮曰:“太上皇帝信任宦官,故若此刑餘人,持重權為近侍,文武官皆趨付之”萱曰:“醫、道、佛三法,貴國何重?”臣曰:“我國重儒術,醫方次之,有佛而不好,無道法.”豈曰:“成化皇帝最重道、佛二法,今新皇帝一切禁之,”庄問曰:“貴地今當大明之時,皆稱大唐,何也?”榮曰:“此無他,因大唐時傳習之舊而云,習俗然也.”臣又問曰:“自我到此,貴地人皆指我等,曰:大大的鳥也機,此何等語也?”榮曰:“此日本人呼我處大人之訓,此方人恐你等從日本來,故有此言:”臣等自魯橋閘,過通利王、魯津橋,至五樓橋,東魯諸水,交流于此,又過師家莊下·上鋪、仲家鋪、仲家淺閘,至新聞,傅榮謂臣曰:“此開會都水監丞也先不華所建也,會通河至此地,沙土遺,水勢散逸,不能負舟,前後置脯,自新店至師氏莊,猶淺澀有難處,每灣船過此,上下畢力終日號,進寸退尺,必資車於陸而運,自立此新以後,舟行得其安且順也”云云,之東有河神祠,西有公署,署南南有遐觀臺,臺上構亭,以東與鄉峰山對,扁曰瞻鄉’. 臣等過其,夜過新店開以行,

노교역(魯橋驛)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남양갑에서 조림갑(聚林閘)을 지나 노교역에 이르니 노교역 앞에 노교갑(魯橋間)이 있었는데 동쪽으로는 제로(齊魯) 지방으로 통하고, 서쪽으로는 거야현(鍾野縣)과 접하고, 남쪽으로는 회초(淮楚)와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경사에 이르게 되니 사방으로 통하는 길이었습니다.

노교갑 서쪽에는 흑연지(黑視池)가 있었는데 흑연지의 물은 검었습니다.

성이 유(劉)라는 태감이 왕을 봉하고 북경으로 갈 때, 정기(産旗), 갑주(甲骨), 종고(鍾鼓), 관현(管絃)의 성대함이 천지를 진동시켰는데, 이 갑문에 와서는 유(劉) 태감이 탄환으로 뱃사람을 향해 함부로 쏘니 그의 난폭한 행동이 이와 같았습니다.

진훤이 말하기를, “이 배의 내관(內官)이 이같이 못된 짓을 하는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부영은 신에게 묻기를, “귀국에도 이런 태감이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내관들은 궁중에서 청소하는 일과 왕명을 전달하는 일만 맡고 관부의 일은 맡지 않습니다."

부영이 말하기를, “태상황제(太上皇帝)께서 환관을 신임했던 까닭에 이 같은 궁형(宮刑)을 받은 사람들이 막중한 권력을 쥐고 근시(近侍)가 되어 문· 무관들이 모두 이에 빌붙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진훤이 말하기를, “의술, 도교, 불교의 세 가지 가운데 귀국에서는 어떤 것을 중하게 여깁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술(儒術)을 중히 여기고 의방(醫方)은 그 다음이며, 불교는 있지만 좋아하지 않고 도법(道法)은 없습니다." 신선 김가기[1][2][3]

“성화황제(成化皇帝)께서는 도교, 불교의 두 가지 법을 가장 중하게 여겼는데, 지금 신황제(皇帝)께서 일절 이를 금지시켰습니다.”

신이 묻기를, “귀국은 지금 대명(大明)의 시대를 당했는데도 모두 대당(大唐)[4][5][6]이라 일컫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부영이 말하기를, “이는 다름이 아니라 대당 시대부터 전습되어 오던 대로 일컫는 것이니 습속이 그러하기 때문이지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귀국에 도착한 이후로 사람들이 모두 우리들을 가리켜 '높으신 오야지[大大的鳥也機]라 말하니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7] [8][9]

“이는 일본인이 우리나라의 '대인(大人)'을 그렇게 부르는 훈(訓)입니다. 이 지방 사람들은 당신들이 일본에서 왔을까 하여 그런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신 등이 노교갑에서 통리왕묘(通利王廟), 노진교(魯津橋)를 지나 오루교(五樓橋)에 이르니, 동로(東魯) 지방의 여러 갈래의 물이 서로 만나 이곳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또 사가장(師家莊)의 상포(上鋪)·하포(下鋪), 중가포(仲家鋪), 중가천갑(仲家淺間)을 지나서 신갑(新聞)에 이르렀습니다.

부영이 신에게 다음과 같은 말들을 하였습니다.

“이 수문은 곧 도수감승(都水監丞) 야선불화(也先不華)가 세운 것입니다. 회통하(會通河)가 이곳에 이르면 모래 섞인 흙이 물에 밀리고 수세가 흩어져서 배를 띄울 수 없었으므로 앞뒤에 수문을 설치하였습니다. 신점(新店)에서 사씨장(師氏莊)까지는 오히려 물이 얕아 어려운 곳이 있으므로, 조운 선박이 이곳을 지날 적마다 상하가 힘을 다해서 종일 부르짖어도 한 치를 나아가면 한 자를 물러나게 되므로 반드시 육지에서 수레를 이용하여 운반하여야 했는데, 이렇게 새 수문을 만든 이후로는 배의 운행이 안전하고 순조롭게 되었습니다.”

수문의 동쪽에는 하신사(河神祠)가 있고 서쪽에는 공서(公署)가 있었으며 공서의 남쪽에는 하관대(__觀臺)가 있었습니다.

하관대 위에는 정자를 건축하여 동쪽으로 추역산(鄒山)과 마주보게 하고는 편액을 첨추(瞻鄒)라고 하였습니다.

신 등은 그 수문을 지나서 밤에 신점갑(新店開)을 거쳐 갔습니다. 8th Day. Passing Lu-ch'iao Station. This day was cloudy.

From Nan-yang Lock we passed Tsao-lin Lock and came to Lu-ch'iao Station, in front of which was Lu-ch'iao Lock. There was a crossroads, going east to Ch'i and Lu, linking in the west with Chü-yeh, leading south to Huai and Ch’u, and reaching the capital in the north. West of the lock was Black Ink-slab Lake, the water of which was black. An Overseer named Liu was there on his way to the capital to be enfeoffed. His multitude of flags, arms, armor, bells, drums, and musical instruments set the rivers trembling. Having come to that lock, he was wantonly shooting at boatmen with round shot. That was how depraved he was. Ch'en Hsüan said, “It is a eunuch who is behaving so wrongly in that boat.” Fu Jung asked me questions. He said, “Are there these overseers in your country, too?” I said, “The eunuchs in my country are employed only in sprinkling and sweeping in the palace and conveying messages. They are not given charge of public affairs.” Fu Jung said, “The Emperor's father trusted eunuchs and gave them appointments. That is why those castrated for punishment, like that one, have great power as ministers close to the throne. All the civil and military officials toady to them.” Ch’en Hsüan said, “Which of the three Laws, Medicine, Taoism, or Buddhism, does your country respect?” I said, “My country respects the Confucian practices. Medicine comes next. There are Buddhists, but people do not esteem them. There is no Taoism.” Ch'en Hsüan said, “The Ch’eng-hua Emperor [Hsien Tsung, r. 1465-1487] respected Taoism and Buddhism most. The new Emperor now strictly prohibits them.” I asked, “Now that it is the time of Great Ming in your country, why does everyone call it Great T'ang?” Fu Jung said, “It is simply that the latter has become customary since Great T'ang times.” I then said, “Ever since I arrived here, all your countrymen have pointed at us and said, “Ta-ta-ti-wu-yeh-chi.' What kind of speech is that?” Fu Jung said, “That is what the Japanese call eminent persons in our land. The people here suspect that you have come from Japan. That is why they use those words.”83 [We went from Lu-ch'iao Lock to New Lock.] Fu Jung said to me, “This lock was built by Supervisor of Waterways Yeh-hsien Pu-hua.84 When the Hui-t’ung River85 reached here, sand and mud had silted it up. The stream had spread and could not carry boats. Sluice-gates were put in at both ends, from Hsin-tien to Shih-shih-chuang, but in shoals and [sections where the bottom was] rough, there were still difficult places. Every time a canal boat passed here, all the men, high and low, exhausted their strength, shouting through the day, gaining an inch and losing a foot, and being obliged to resort to carts on land for transport. Since this new sluice-gate was built, the movement of boats has acquired safety and regularity.” [We went on, noting landmarks.]

  • 3월 9일

初九日,至濟寧州,是日晴,欲曙過閘,則乃石(福)佛】開也,又過趙村閘,至南城驛,少停舟而行,又過真武廟,至下新聞,闡在越河口西(入)【八】百餘尺,越河東密澜天井開,北對會通河,二水縱橫十字然,由閘河而西者,或至流覆,越河而上者,艱於逆乾,置此間於兩口之下,時水盈縮而開縱之,聞之西北二十里許,有獲麟堆,即西狩獲麟之處,今嘉祥縣地也,臣等過其間,至濟寧城,則東北有酒從曲阜,光從祖,合鲁城東,來入漕河達淮,以入于海,踰淮為南京,西北有湖,東分入漕河,北分臨清,出衛河以達于海,驗海為北京,兩京相望三千餘里外,水皆從濟寧中分,城之東畔光河,西畔濟河,二河紫抱,合流于城南底,兩河之中有土阜,阜自東北起,蜿蜒而來,殆千有餘里,阜上有觀瀾亭,即孫蕃所建也,由亭下至通津橋,橋當城門道,橋南有靈源弘濟王廟,至宿于廟西北河岸,

제녕주(濟寧州)[1]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날이 새려고 할 때 수문을 지나니 곧 석불갑(石佛聞)이었습니다.

또 조촌갑(趙村間)을 지나 남성역(南城驛)에 이르러 조금 배를 정박시켰다가 길을 떠났습니다.

또 진무묘(眞武廟)를 지나 하신갑(下新開)에 이르니 하신갑은 월하(越河) 어구에서 서쪽으로 800여 척이 되었습니다.

월하는 동쪽으로 천정갑(天井間)과 매우 가깝고, 북쪽으로 회통하(會通河)와 마주보고 있었는데 두 물이 가로 세로로 십(十)자와 같았습니다.

갑(間)과 하(河)를 경유하여 서쪽으로 가는 것은 흘러가다가 뒤집어지곤 하고 월하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거슬러 당기기가 어려워 이 갑문을 양쪽 어귀의 아래에 설치하고서 물이 차고 줄어드는 것을 보아 이를 닫고 열고 하였습니다.

갑 서북쪽 20리가량에 획린퇴(獲麟堆)가 있었으니 곧 '서쪽으로 사냥 가서 기린(麒麟)을 잡았다'413는 곳으로 지금의 가상현(嘉祥縣)지방입니다.

신 등이 그 갑문을 지나서 제녕주성(濟寧州城)에 이르니 동북쪽에 사수(泗水)는 곡부로부터, 황하(光河)는 조래(요양)로부터 노성(魯城)의 동쪽에서 서로 합류하여 조하(遭河)에 들어가 회수에 도달하여 바다에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회수를 넘어가면 남경이 되고 서북쪽에 거호(鍾湖)가 있어 동쪽으로 갈린 것은 조하에 들어가고, 북쪽으로 갈린 것은 임청(臨淸)에서 위하(衛河)를 나와 바다에 도달하여 바다를 건너면 북경이 되니, 남경과 북경은 3천여 리 밖에서 서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강물은 모두 제녕(濟寧) 성중에서 갈라져 성의 동쪽 경계는 황하(河)이고 서쪽 경계는 제하(濟河)인데, 두 강이 빙 둘러서 있어서 제녕성 남쪽 밑에서 합류하고 있었습니다.

두 강물의 복판에 토산(土山)이 있었으니 토산은 동북방에서 일어나 구불구불하면서 길게 이어진 것이 거의 천여 리나 되었습니다.

토산의 위에 관란정(觀__亭)이 있었으니 곧 손번(孫菴)이 세운 것이었습니다.

관란정 아래를 경유하여 통진교(通津橋)에 이르니 통진교는 성 남문의 길이었습니다.

통진교 남쪽에 영원홍제왕묘(靈源弘濟王廟)가 있었으며 묘의 서북쪽 강 언덕에 이르러 유숙하였습니다.

9th Day. Arrival at Chi-ning Department. This day was fair.

[We went from Shih-fu Lock to Hsia-hsin Lock,] which was more than one hundred feet in to the west from the mouth of the Yüeh River. To the east, the Yüeh River came close to T’ien-ching Lock and against the Hui-t’ung River on its north. The two rivers met at right angles. People going west on the river from the lock sometimes were overturned by the current, and those going up the Yüeh River had trouble towing against the current. The locks had been established below the two mouths to await the flooding or ebbing of the water to be opened or closed. About twenty li northwest of the lock there was Huo-lin Knoll, which had been the place of “hunting and trapping unicorns in the west.”86 It is now the land of Chia-hsiang County. We passed the lock and came to the wall of Chi-ning Department. To the northeast the Ssu from Ch'ü-fu and the Kung from Tsu-lai joined east of Lu Bridge and came into the Grand Canal to pass the Huai and enter the sea. Beyond the Huai was Nanking. To the northwest was Lake Chü, which in its eastern part received the Grand Canal and in its northern part, in Lin-ch’ing, put out the Wei River to pass to the sea. Beyond the sea was Peking. The two capitals stood over three thousand li apart. All the rivers from outside divided in Chi-ning. The Kung River, bounding the east wall, and the Chi River, bounding the west wall, curved windingly round and joined below the south wall. In the two rivers were earthen dunes. The dunes started in the northeast and came undulating down for more than one thousand li.87 On top of a dune there was Kuan-lan Pavilion, which had been built by Sun Fan.88 From below the pavilion we came to T’ung-chin Bridge, which was on the road to the southern gate of the wall. South of the bridge was Ling-yuan-hung-chi-wang Shrine. We came to a stop on the river bank northwest of the shrine.

  • 3월 10일

初十日,至開河驛,是日晴大風,曉發濟寧城,西過分水閘,至南旺湖,湖彌漫無際,但西望遠山而已,其東有青草茂塞之行,即《禹貢》大野既(滿)「豬」之澤,今為塞者湖中築石長堤,名官堰,臣等沿堤岸順風而北,過馬長坡、安民、牢正、曹井等鋪,至鉅野縣地方,過火頭灣、白嘴兒、黃沙灣、小長溝等鋪、大長滿集,又至嘉祥縣地方,過大長溝、十字河、寺前、孫村等鋪,又至上縣地方,過界首鋪、老坡閘,至分水龍王廟,有大水自東北來,至廟前分南·北派,南派即臣所已經,順流

p.416 南下,北派臣所將往,逆流北上,廟當其二水之分,故以分水名,問其東北來大水,則人口濟河之源也,未詳其實,楊旺與其徒入廟中,焚香禮神以祭,令臣等亦拜,臣曰:“祭山川,諸侯事,為士庶人者,特祭祖考耳,少驗其分,非禮也,非禮之祭,人為誼,神不享,故我在本國,不敢拜山川之神,況可拜異國之乎?”陳萱曰:“此洞,乃龍王祠也,有靈跡,故過此者,皆致恭拜祭,然後行,不然則必有風濤之險,”臣曰:“觀於海者難為水,我已經數萬里大海暴濤之險,若此中土中”江河之水,不足畏也.”語未畢,萱告于旺曰:“此人不要拜,亦不可屈其志”云云,又過嚴城鋪,至開河驛,夜已三更矣,所謂官堰,至嚴城鋪而絕,堰中有聞,相間或八九里、或 十餘里, 凡十有四,堰之長,亦過百餘里.

개하역(開河驛)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맑았으나 큰바람이 불었습니다.

새벽에 제녕성을 출발하여 서쪽으로 분수갑(分水間)을 지나서 남왕호(南旺湖)에 이르니, 남왕호는 물이 가득차 끝이 없고 다만 서쪽으로 먼 산만 바라보일 뿐이었습니다.

그 동쪽에는 푸른 풀이 우거진 평지가 있었으니, 곧 〈우공>의 '대야(大野)에 물이 고이니'라는 못입니다.

지금은 메워져 있었는데 호수 복판에 돌로 긴 제방을 쌓고 명칭을 '관언(官恨)'이라 하였습니다.

신 등은 제방의 언덕을 따라 바람이 부는 대로 북쪽으로 가서 마장파(馬長坡)·안민(安民)·뇌정(牢正) ·조정(曹井) 등 포를 지나서 거야현(鍾野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화두만(火頭灣)·백취아(白嘴兒)·황사만(黃沙灣)·소장구(小長溝) 등 포와 대장만집(大長滿集)을 지나서 다시 가상현(嘉祥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대장구(大長溝)·십자하(十字河)·사전(寺前)·손촌(孫村) 등 포를 지나서 또 문상현(上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계수포(界首鋪)416 · 노파갑(老坡間)을 지나서 분수용왕묘(分水龍王廟)에 이르니, 큰 강물이 동북쪽에서 용왕묘 앞에 이르러 남쪽 갈래와 북쪽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남쪽 갈래는 곧 신이 이미 물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온 강이고, 북쪽 갈래는 곧 신이 장차 물길을 거슬러 북쪽으로 올라갈 강이었습니다.

용왕묘는 그 두 갈래 물이 나뉜 곳에 있는 까닭에 분수(分水)라고 명명한 것이었습니다.

그 동북쪽에서 온 큰 강물을 물으니 사람들은 '제하(濟河)의 연원이다'라 하였지만 사실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양왕은 그 무리와 함께 용왕묘 안에 들어가서 향을 피우고 용신(龍神)에게 배례하면서 제사를 지내고 신 등에게도 또한 절하라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산천에 제사하는 것은 제후의 일로서 사서인(士庶人)은 조고(祖考)에게만 제사를 올릴 따름입니다.

조금이라도 그 분수를 넘으면 예절에 어긋난 일입니다.

예절에 어긋난 제사는 사람들이 아첨으로 보고 귀신도 제물을 받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내가 본국에 있을 때 산천의 신에게는 절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다른 나라의 사당에 절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진훤이 말하기를, “이 사당은 곧 용왕사(龍王祠)로서 영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공경스럽게 절하고 제사지낸 뒤에야 길을 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풍랑의 조난을 당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다를 구경한 사람 앞에선 강물은 물이라 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나는 이미 수만 리나 되는 큰 바다에서 거센 파도의 험난함을 겪었으니, 이와 같은 중원의 강물은 두려워할 것도 못 됩니다."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진훤은 양왕에게, “이 사람은 절하려 하지 않으며 또 그의 뜻을 굽힐 수도 없겠습니다" 운운하였습니다.

또 감성포(闕城鋪)를 지나서 개하역(開河驛)에 이르니 밤이 벌써 3경이 되었습니다.

이른바 '관언(官倭)'이란 것도 감성포에 이르러 끊어졌습니다.

관언 가운데 있는 갑문은 8-9리 혹은 10여 리 간격으로 모두 14개가 있었고, 관언의 길이 또한 100여 리가 넘었습니다.

10th Day. Arrival at K’ai-ho Station. This day was fair, with high winds.

At dawn we left the wall of Chi-ning, went west past Fen-shui Lock and came to Nan-wang Lake. The lake was an endless expanse of water; only in the west did we see distant mountains. In the east were dense barriers of green grasses, which were the marsh in Yü kung: “The lake of Ta-yeh was confined within its proper limits” [Legge, III: 105]. Now it has become silted up, and in the lake a long stone levee has been built and named Public Dam. [We went from Ma-chang-p'o to the Shrine of the Dragon King of the River Fork.] A large river there came from the northeast, arrived in front of the shrine, and split into northern and southern branches. The southern branch was the one that we had come down, with the current. The northern branch was the one up which we were going to go, against the current. Because the shrine was at the fork of the two rivers, it had the name River Fork. I asked about the large river that came from the northeast, and someone said, “It is the source of the Chi River.” I do not know whether that was so.89 Yang Wang and his staff entered the shrine, burned incense, and worshiped the god with sacrifices. They ordered us to pray, too. I said, “Sacrificing to mountains and rivers is a matter for the nobility; gentlemen and commoners sacrifice only to their ancestors. To overstep one's place is improper, and improper sacrifices make fawners of men and do not satisfy the gods. In my own country, therefore, I do not venture to pray to the gods of mountains and rivers. How could I possibly pray at the altars of foreign countries ?” Ch'en Hsüan said, “This is the altar of the Dragon King who once appeared here. For that reason, everyone who passes here sacrifices most respectfully before going on. Otherwise there would surely be trouble with the wind and waves.” I said, “One who has looked at the sea is not easily impressed by other waters. I have passed through an ocean of tens of thousands of li and violent waves. The water of rivers like these, here in the land, is not enough to scare me.” Before I had finished speaking, Ch'en Hsüan said to Yang Wang, “This man will not pray, and we should not bend his will." We passed K’an-ch'eng Stop and came to K’ai-ho Station. It was already the third watch of the night. What was called Public Dam went as far as K'anch'eng Stop and stopped. In it there were sluices, some eight or nine li apart, some over ten li apart, and fourteen in all. The dam itself was over one hundred li long.

  • 3월 11일

十一日,晴,過開河鎭、劉家口、表家口、開渠、頭山津、張八口”、步家口等鋪,至東平州地方,東平,即《禹貢》東原底平者,沙土遺陀,水性下濕之地,又過新家口、栗家莊、李家口明、劉家莊、王忠口、馮家莊、長張口等鋪,至安山開,登岸四望,則有山連綿西北間,問之則若梁山,若土山,若孝堂山,或謂孝堂,即郭巨理子得金之山也,夜至安山驛.

맑았습니다.

개하진(開河鎭)·유가구(劉家口)·표가구(表家口)·개거(開渠)·두산진(頭山津)·장팔구(張入口)·보가구(步家口) 등 포를 지나서 동평주(東平州) 지방에 이르니 동평은 〈우공>의 '동원(東原)이 평안해졌다'는 곳으로 모래 섞인 흙이 물에 밀리고 습기가 많은 땅이었습니다.

또 근가구(家口)·율가장(栗家莊)·이가구(李家口)·유가장(劉家莊)·왕충구(王忠口)·풍가장(馮家莊)·장장구(長張口) 등 포를 지나 안산갑(安山間)에 이르러서 언덕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산이 서북방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물어보니 양산(梁山)·토산(土山)·효당산(孝堂山) 등이었습니다.

효당산은 곽거(郭巨)가 자식을 묻다가 금을 얻었던 산이라고 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밤에 안산역(安山驛)에 이르렀습니다.

11th Day. Fair.

[We went from K’ai-ho Market to An-shan Station.]

  • 3월 12일

十二日,至東昌府,是日晴,過堡粮食、安山保、譯家花、積水湖口、蘇家莊、那家莊、沙孤堆等鋪及戴家廟,至金線閘遞運所,所前有經魁門. 門右人家,掛雕籠苗有鳥,其形如鸠,其味赤而長,其吻徵黃而鉤,其尾長八九寸,眼黃背青,頭與胸水黑色. 其性曉解人意, 其語音清和圓轉,曲節分明,人或有言,皆應之,臣與傳榮往觀之,謂榮曰:“此鳥能言,其無乃鸚鵡乎?” 榮曰: “然.” 臣曰:“此即隴西鳥也,我卽海東人也. 隴西、海東, 相距數萬餘里, 今日得相見於此, 得非幸乎? 但我與此為客他鄉,同也, 思故國,同也,形容之憔悴,亦同也,觀此鳥,彌增悲嘆之情,”榮日:“此鳥長在籠中,終死他國,今足下好還貴國,盡職君親,胡可謂之同也?”鸚__亦有言,似若有知然,又至壽(長)「張」縣地方,過戴家廟·劉家口·

p.418 戴洋·張家莊·沙灣等鋪、感應祠,至東(河)[阿]縣地方,過沙灣淺鋪、大河神祠、安家口鋪、北浮橋、掛劍鋪、通汴梁、通濟聞、汉河、沙灣巡檢司、兩河口、鍾樓閣、鼓樓閣、雲津門,到荊門驛,驛丞引臣及傳榮于皇華堂前饋茶,又過平河水鋪、新添鋪、荊門上·下閘,至陽穀縣地方, 夜過灣東鋪、張家口鋪、七級上·下開、周家店開、阿城上·下閘、李海務聞,至崇武驛,夜五更矣,東昌府即舊齊之聊·攝地,城在驛北三四里河岸,城中有府治、聊城縣治及按察司、布政司南司、平山衛、預備倉、宣聖廟、縣學.

동창부(東昌府)[1][2]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보량창(堡糧倉)·안산보(安山保)·역가화(譯家花)·적수호구(積水湖口)·소가장(蘇家莊)·형가장(家莊)·사고퇴(沙孤堆) 등 포와 대가묘(戴家廟)를 지나서 금선갑체운소(金線閘遞運所)에 이르니, 체운소 앞에 경괴문(經魁門)이 있었습니다.

이 경괴문 오른편의 인가에는 새장을 걸어놓고 새를 기르는데, 그 형상은 비둘기[3][4][5] 같고 그 주둥이는 붉으면서 기다랗고, 그 입가는 조금 누르스름하면서 구부러졌고, 그 꼬리는 길이가 8-9치나 되었으며, 눈은 누르스름하고 등은 푸르며, 머리와 가슴은 먹 빛깔이었습니다.

그 새는 사람의 뜻을 잘 알아듣고, 말소리는 맑고 부드러워 음절이 분명하여 사람이 말을 하면 이에 응답하곤 하였습니다.

신은 부영과 함께 가서 보고는 부영에게 말하기를, “이 새가 말을 하니 앵무새[6][7][8][9][10][11][12][13][14]가 아닙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농서(隴西)의 새이고, 나는 곧 해동(海東)의 사람입니다. 농서와 해동은 거리가 수만여 리나 되는데, 오늘 이곳에서 보게 되었으니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나와 이 새는 타향에서 손 노릇한 것도 같고, 고국을 생각하는 것도 같고, 모습이 초췌한 것도 또한 같아서 이 새를 보니 비탄한 심정이 더할 뿐입니다.”

“이 새는 새장 속에 오래 갇혀 있다가 마침내 타국에서 죽겠지만 지금 족하는 귀국으로 잘 돌아가서 임금과 어버이에게 본분을 다 할 수 있는데 어찌 이 새와 같다고 하겠습니까.”

앵무새 또한 말을 하여 알아들은 듯하였습니다.

또 수장현(壽張縣)지방에 이르러 대가묘(戴家廟)·유가구(劉家口)·대양(戴洋) 장가장(張家莊)·사만(沙灣) 등 포와 감응사(感應祠)를 지나서 동아현(東阿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사만천포(沙灣淺鋪)·대하신사(大河神祠)·안가구포(安家口鋪)·북부교(北浮橋)·패검포(掛劍鋪)·통변량(通汴梁)·통제갑(通濟間)·차하(__河)·사만순검사(沙灣巡檢司)·양하구(兩河口)·종루각(鍾樓閣)·고루각(鼓樓閣)·운진문(雲門)을 지나서 형문역(前門驛)에 이르니, 역승이 신과 부영을 황화당(皇華堂) 앞에 인도하여 차를 접대하였습니다.

또 평하수포(平河水鋪)·신첨포(新添鋪)·형문상갑(荊門上)과 하갑(下間)을 지나서 양곡현(陽穀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밤에 만동포(灣東鋪). 장가구포(張家口鋪)·칠급상갑(七級上開)과 하갑(下間). 주가점갑(周家店) · 아성상갑(阿城上開)과 하갑. 이해무갑(李海務間)을 지나서 숭무역(景武驛)에 이르니, 밤 5경이었습니다.

동창부(東昌府)는 곧 옛날 제(齊) 나라의 요성(聊城)과 섭성(__城)으로서 성은 역 북쪽의 3-4리쯤 되는 강 언덕에 있었습니다.

성 안에는 부치·요성현치(聊城縣治)와 안찰사(按察司)·포정사(布政司)·남사(南司)·평산위(平山衛)·예비창(預備倉)432. 선성묘(宣聖廟)·현학(縣學)433이 있었습니다.

12th Day. Arrival at Tung-ch'ang Prefecture. This day was fair.

[We went from Pao-liang-ts’ang to Chin-hsien-cha Transfer Station.] In front of the station was Ching-k’uei Gate. From a house to the right of the gate hung a carved cage in which a bird was kept that was shaped like a pigeon. Its beak was red and long, the tip somewhat yellow and hooked, and its tail was ten or eleven inches long. Its eyes were yellow, its back green, and its head and breast inky. It was gifted with the ability to understand men's thoughts. Its speech was coherent and glib, and its songs were clear. If a person said something, it repeated it all. I went to look at it with Fu Jung and said to him, “This bird can speak; is it not a parrot?" Fu Jung said, “It is.” I said, “This is a bird from Kansu, and I am a man from Korea. Kansu and Korea are tens of thousands of li apart; is it not a fortunate coincidence that we have come to meet each other here today! Traveling in a foreign country, I and the bird are alike. Thinking of our homelands we are alike. Anxious and haggard of appearance, we are alike. To look at this bird deepens my grief.” Fu Jung said, “This bird is spending his life in a cage, and in the end he will die in a foreign country. You, now, are returning safe and sound to your own country and will carry out your duties to your lord and parents. How can you call that the same?” The parrot also said something, as if he understood us. [We went from Shou-ch’ang County to Ch’ung-wu Station, in Tung-ch'ang Prefecture.] Tung-ch'ang Prefecture was the Liao and She of the old state of Ch’i. The wall is three or four li up the river bank north of the station. Inside the wall are the prefectural capital, the seat of Liao-ch'eng County, a post of the Provincial Surveillance Office, the south post of the Provincial Administration Office, P’ing-shan Garrison, Yü-pei Granary, Hsüan-sheng Shrine, and the county school.

  • 3월 13일

十三日,過清陽驛,是日晴,過通濟橋、東岳廟、進士門、東昌遞運所、免粮廠,又過堤口、稍長削、柳行口、房家莊、白廟、雙渡兒、呂家灣、(校)(梭]堤等鋪,河之東會堂邑縣地方,西即博平縣地方,又過洪家口、梁家口等鋪及梁家開、感應神祠,又過表家灣19·馬家灣·老堤頭·中開口等鋪、土橋閘、新開口鋪、函谷洞、减水閘,至清平縣地方.又過(趨)「趙]家口鋪 59,至清陽驛,又過朱家灣·丁家口·十里书·李家口等鋪、戴家灣閘,乘月達曙而行.

청양역(淸陽驛)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통제교갑(通濟橋)·동악묘(東岳廟)434. 진사문(進士門)·동창체운소(東昌遞運所)·태량창(糧__)을 지나고, 또 제구(堤口), 초장갑(稍長)·유행구(柳行口)·방가장(房家莊)·백묘(白廟)·쌍도아(雙渡兒)·여가만(呂家灣) 사제(__堤) 등 포를 지났습니다.

강의 동쪽은 당읍현(堂邑縣) 지방이고 서쪽은 박평현(博平縣) 지방이었습니다.435

또 홍가구(洪家口)·양가구(梁家口) 등 포와 양가갑(梁家間)·감응신사(感應神祠)를 지났습니다.

다시 표가만(表家灣)436. 마가만(馬家灣)·노제두(老提頭)·중갑구(中間口) 등 포와 토교갑(土橋間)·신개구포(新開口鋪)·함곡동(函谷洞)·감수갑(減水間)을 지나서 청평현(淸平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또 조가구포(趙家口鋪)를 지나서 청양역에 이르렀습니다. 또 주가만(朱家灣)·정가구(丁家口)·십리정(十里井)·이가구(李家口)437 등 포와 대가만갑(戴家灣)을 지나서 달밤을 이용하여 날이 샐 때까지 갔습니다.

13th Day. Passing Ch’ing-yang Station. This day was fair.

[We went from T’ung-chi-ch'iao Lock past Ch’ing-yang Station to Taichia-wan Lock.]

매드맥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