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우
목차
개요
학력
- 용인고등학교 졸업
- 동국대학교 사학과 재학
경력
- 2018.1.1~2018.12.31 동국대학교 사학과 73대 학생회 문화부장
- 2019.1.1~2019.12.31 동국대학교 사학과 74대 학생회장
좋아하는 것들
- 영화, 게임, 음악, 축구
최부의 표해록
5월 3일
初三日,在난하(灤河)驛,是日晴,장술조(張述祖)令其子仲英還于북경(北京),仲英誤懷兵部交付臣等于廣寧太監之관문(關文)而去,述祖使人追之,日暮乃返,故不得已而留,夜,大雷電以雨,
난하역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장술조가 그 아들 중영을 북경으로 돌아가게 했는데, 중영이 잘못하여 병부에서 신 등을 광녕태감(廣寧太監)에게 넘겨주는 관문(關文)을 가지고 가버렸습니다.
장술조가 사람을 시켜 뒤쫓게 했는데 해가 저물어서야 돌아와 하는 수 없이 하루 더 묵게 되었습니다.
밤에 큰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비가 내렸습니다.
3rd Day. At Luan-ho Station. This day was fair. Chang Shu-tsu ordered his son Chung-ying to return to Peking. Chung-ying left, taking with him by mistake the document by which the Ministry of War was to transfer us to the Overseer of Kuang-ning. Chang Shu-tsu sent a man after him, but since it was sunset when he returned, there was nothing to do but stay there. At night there were heavy thunder, lightning and rain.
5월 4일
初四日,至무녕위(撫寧衛),是日晴,過東關遞運所,至聽槽河,河之北岸,有大石如槽,號為石槽,該傳唐張果飼聽之器,又過國家鋪、十八里鋪、雙望鋪、儀院嶺鋪、蘆宰口鋪、讓消鋪,至陽河,河源出列陀山,經撫寧縣城西八里許,又過民壯教場門,入撫寧縣城西門,過關王廟,寓于撫寧衛,兔耳、罐子、大崇、連宰諸山,圍城之南北,治西有西關遞運所,
무녕위(撫寧衛)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동관체운소(東關遞運所)를 지나서 여조하(驪槽河)에 이르렀습니다.
여조하의 북쪽 언덕에는 구유 같은 큰돌이 있는데, 석조(石槽)라 호칭하였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당나라 장과(張果)가 당나귀를 먹이던 그릇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국가포(國家), 십팔리포(十八里鋪), 쌍망포(雙望鋪), 의원령포(儀院嶺鋪), 노봉구포(盧峯口鋪), 녹궁포(遠遠鋪)를 지나서 양하(陽河)에 이르렀는데, 양하의 원류는 열타산(列陀山)에서 나옵니다.
무녕현성(撫寧縣城) 서쪽을 8리가량 지났습니다.
또 민장교장문(民壯敎場門)을 거쳐서 무령현성의 서문으로 들어가 관왕묘(關王廟)를 지나서 무령위에 유숙하였습니다.
토이산(兔耳山), 화자산(罐子山), 대숭산(大崇山), 연봉산(連峯山) 등 여러 산들이 성의 남북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치소의 서쪽에 서관체운소(西關遞運所)가 있었습니다.
4th Day. Arrival at Fu-ning Garrison. This day was fair. [We went from Tung-kuan Transfer Station to Fu-ning Garrison and stopped there.]
5월 5일
初五日,過山海關,是日晴,由調橋入山海衛西門,至儒學門,問所謂味鋪,--> 이 부분 이상함. 至榆關店,店舊為關,今移為山海關,店之東有河,河之上有臨涂山,隋開皇中伐高句麗時,漢王諒帥兵出檢關者,即此地也,又過檢關驛、半山鋪而行,路西北有海陽古城,城之北有列陀山,山高聳為諸山之雄,又過張 (古)【果】老河,至娘子河,日已薄暮,河邊有人居三四屋,借器做飯,又過十餘里,停車于名不知路街,
유관역(__關驛)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청운득로문(靑雲得路門)을 지나 성 동문을 나간 다음 흥산포(興山鋪), 배시포(背時鋪)를 지나서-->??
유관점(關店)에 이르렀습니다.
유관점이 옛날에는 관(關)이었으나 지금은 산해관(山海關)으로 옮겼습니다.
유관점 동쪽에 투하(兪河)가 있고 유하 상류 쪽에 임투산(臨流山)이 있었습니다.
수(隋) 나라 개황(開皇) 연간에 고구려를 칠 때 한왕(漢王) 양(詠)이 군사를 거느리고 유관을 나왔는데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또 유관역, 반산포(半山鋪)를 지나서 가니, 길 서북쪽에 해양고성(海陽古城)이 있었습니다.
고성의 북쪽에는 열타산이 있었는데 열타산은 높이 솟아 여러 산의 으뜸이었습니다.
또 장과로하(張果老河)를 지나서 낭자하(娘子河)에 이르니 해는 벌써 저물었습니다.
강가에 인가 서너 채가 있었으므로 그릇을 빌어 밥을 지었습니다.
또 10여 리를 지나 이름 모르는 길거리에서 수레를 멈추었습니다.
5th Day. Passing Yü-kuan Station. This day was fair. We passed Ch'ing-yün-te-lu Gate and went out the east gate of the wall. We passed Hsing-shan Stop and Pei-shih Stop and came to Yü-kuan Stop. The stop had formerly been a pass which had now been moved to Shan-hai-kuan. East of the stop was the Yü River, and Lin-yü Mountain was above the river. When Kogury> was being brought to submission in the K’ai-huang period [581-600] of Sui, that was the Yü-kuan from which Han Wang Liang led troops. We went on, past Yü-kuan Station and Pan-shan Stop. Northwest of the road was the old wall of Hai-yang, north of which was Lieh-t'o Mountain. The mountain was high and majestic, the boldest among the mountains. We passed the Chang-ku-lao River and came to the Niang-tzu River. The day was already growing dark. On the river bank, where there were three or four houses, we borrowed utensils to make a meal. We passed more than ten villages and stopped the carriages at a road whose name I do not know.
5월 6일
初六日,晴,行至石河,南有五花城,乃唐太宗征高句麗時薛仁貴所築也,至遷安驛,驛在山海衛城西門外,城之東南有孤山臨海濱,城北有角山吃立,山海關當其中,北負山,南帶海,相距十餘里間,為夷夏要險之地,秦將蒙恬所築長城,跨出于角山之腹, ____爲衛之東城,以達于海. 有東門遞運所在城中.
맑았습니다. 가다가 석하(石河)에 이르렀습니다. 남쪽에 오화성(五花城)이 있었는데,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설인귀(薛仁貴)가 쌓은 것이었습니다. 천안역(遷安驛)에 이르니 천안역은 산해위성(山海衛城) 서문 밖에 있었습니다. 성 동남쪽에는 고산(孤山)이 바닷가에 접해 있고 성 북쪽에는 각산(角山)이 높이 솟았는데, 산해관이 그 복판에 있어 북으로 산을 등지고 남으로 바다를 면해 있는 10여 리가량의 거리가 오랑캐와 중국의 요충의 땅이었습니다. 각산+발해=산해관 진(秦)나라 장수 몽염(蒙店)이 쌓은 장성(長城)이 각산 복판을 타고 나와 비스듬히 뻗어서 산해위(山海衛)의 동쪽 성이 되어 바다에까지 도달하였습니다. 동문체운소(東門遞運所)가 성안에 있었습니다.
6th Day. Fair. We went on, coming to the Shih River. In the south was the wall of Wu-hua, which had been built by Hsüeh Jen-kuei34 when T’ang T'ai Tsung was campaigning against Koguryð. We came to Ch’ien-an Station, which was outside the west gate of the wall of Shan-hai Garrison. Southeast of the wall was Mt. Ku, overlooking the seashore. Mt. Chüeh was north of the wall, and at its very peak stood Shan-haikuan. There were some ten li between the mountains that pressed against the north and the sea that skirted the south. It was a strategic point between barbarians and Chinese. The Great Wall built by the Ch'in general Meng T’ien35 was projected from the waist of Mt. Chüeh, passed as the east wall of the garrison, and extended to the sea. In the wall was Tung-men Transfer Station.
5월 7일
初七日,過山海關,是日晴,由주橋入山海衛城西門, 至儒學門, 門所謂味甘之雙文井,人皆以雙宰答之,過步雲門、給事元門、靈應兩,至東北第一關,即所謂山海關也,關之東有鎮東公館,有兵部主事官一員,率軍史常川坐館,東西行人皆識察是非以出入之,雖汲婦、樵童,亦皆給牌以表驗,張述祖列寫臣等姓名,告主事官,主事官一一呼名姓點之,然後乃出,出自關東城門,門之上建東關樓,門外有東關橋,跨海子,關外有望鄉臺、望夫臺,證傳望夫臺秦築城時,孟姜女尋夫之處,又過東遼一鋪、鎮遠鋪,鋪之東一里有小河,不記其名,又過中前千戶所城,城轄于廣寧之前屯衛也。城東又有小河,過至高嶺睾,睾有城。自此以後,瞬皆築城,遞運所同在一城中, 산해관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조교(調橋)를 경유하여 산해위성 서문으로 들어가 유학문(儒學門)에 이르러 이른바 물맛이 달다는 쌍문정(雙文井)을 물으니 사람들이 모두 쌍봉(雙峯)에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보운문(步雲門)·급사방아원문(給事方亞元門)·영응묘(靈應廟)를 지나서 동북제일관(東北第一關)에 이르니 이른바 산해관이었습니다. 산해관의 동쪽에 진동공관(鎭東公館)이 있는데 병부주사관(兵部主事官) 한 명이 군리(軍吏)를 거느리고 항상 그 공관에 앉아서 동서로 지나가는 자들 모두를 시비를 가려서 드나들게 하니, 비록 물 긷는 아녀자나 나무하는 동자일지라도 모두 패(牌)를 주어서 증표로 삼도록 하였습니다. 장술조가 신 등의 성명을 죽 써서 주사관에게 알리니, 주사관은 일일이 성명을 불러서 점검한 뒤에 나가게 하였습니다. 산해관 동쪽 성문으로 나왔는데 문 위에는 동관루(東關樓)가 세워져 있고, 문 밖에는 동관교(東關橋)가 해자(海子)에 걸쳐 있었습니다. 산해관 밖에는 망향대(望鄕臺)와 망부대(望夫臺)가 있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망부대는 곧 진 나라가 장성을 쌓을 때 맹강녀(孟美女)'가 남편을 찾았던 곳'이라 하였습니다. 또 동요일포(東遠一鋪)·진원포(鎭遠鋪)를 지나니 진원포의 동쪽 1리에 작은 강이 있었지만 그 이름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또 중전천호소성(中前千戶所城)을 지났는데 성은 광녕(廣寧)의 전둔위(前屯衛) 소속이었습니다. 성 동쪽에 또 작은 강이 있었습니다. 그곳을 지나 고령역(高嶺驛)에 이르니 고령역에는 성이 있었습니다. 이곳부터는 역에 모두 성을 쌓았으며 체운소도 한 성 안에 같이 있었습니다. 7th Day. Passing Shan-hai kuan. This day was fair. We entered the west gate of the wall of Shan-hai Garrison by way of Tiao Bridge and came to Ju-hsüeh Gate. When I asked about what has been called the Shuang-wen Wells of the excellent water, everyone called them Shuangfeng. 36 We passed Pu-yün Gate, Chi-shih-fang, Ya-yuan Gate, and Ling-ying Shrine and came to No. 1 Northeast Pass, which was called Shan-hai-kuan. East of the pass was Chen-tung Official Guest House. One Administrative Secretary of the Ministry of War, in charge of military petty-officers, was regularly stationed in the guest house. Everyone going east or west was inspected and allowed or forbidden to pass. Everyone, even women drawing water or servants gathering firewood, was issued a pass to show for inspection. Changtsu wrote a list of our names and reported them to the Administrative Secretary, who passed us only after he had called out the names one by one and verified them. We went out Kuan-tung-ch'eng Gate, on top of which Tung-kuan Tower was built. Outside the gate was Tung-kuan Bridge, which spanned a lake. Outside the pass were Look Homeward Tower and Husband-Lookout [Wang-fu] Tower. According to legend, Husband-Lookout Tower was the place from which Meng Chiang-nü37 had sought her husband when Ch’in was building the Wall. We passed Tung-liao Stop 1 and Chen-yuan Stop. One li east of the stop was a small river, the name of which I do not remember. We passed the wall of Chung-ch'ien Chiliad, which was under the jurisdiction of the Ch’ien-t’un Garrison of Kuang-ning. East of the wall was another small river. We passed it and came to Kao-ling Station, which had a wall. From there on, walls were built round all the stations, and the transfer stations were inside the same walls.
5월 8일
5월 8일 初八日,過前衛,是日陰,高嶺驛人,頑悍暴橫之無甚者,臣之軍人文者催聽時,驛人以杖杖文之頭顱进血,張述祖與臣等行至前衛,于衛管軍都指揮晟銘,即差人拿其辱人,臣等至衛,將近城,城西二里有石子河,由城南門而入,過迎恩、承恩、治政、永安等門,至衛館,指揮楊相來暫話,容貌魁偉者,又出城東崇禮門而行,前衛城即舊大寧路瑞州之地,有大山,西連山海關而來鎮于衛之東北,即三山,俗謂之三山頂,又過東嶽廟,至沙河驛,城西所過小水,即沙河也, 전둔위를 지났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고령역 사람은 비할 데 없이 사나웠습니다. 신의 군인 문회(文廻)란 자가 당나귀를 재촉할 적에 그 역 사람이 몽둥이로 문회의 머리를 때려서 머리에서 피가 솟았습니다. 장술조가 신 등과 함께 가다가 전둔위에 이르러 전둔위의 관군도지휘(管軍都指揮) 성명(__銘)에게 사실을 호소했더니 즉시 사람을 보내어 그 역 사람을 잡아왔습니다. 신 등이 전둔위에 이르러 성 가까이 갔는데 성 서쪽 2리에 석자하(石子河)가 있어 성 남문을 경유하여 들어갔습니다. 영은문(迎恩門)·승은문(承恩門)·치정문(治政門)·영안문(永安門) 등을 거쳐서 전둔위의 객관에 이르니 지휘양상(__楊相)이 와서 잠깐 동안 이야기했는데 체구가 크고 훤칠하였습니다. 또 성 동쪽의 숭례문(崇禮門)으로 나가서 앞으로 갔습니다. 전둔위성(前屯衛城)은 곧 옛날 대녕로(大寧路) 서주(瑞州)의 땅이었습니다. 서쪽으로 산해관과 접한 큰 산이 전둔위의 동북을 제압하고 있었습니다. 이 산이 ‘’’바로’’’ 삼산(三山)으로 세상에서는 삼산정(三山頂)’’’이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또 동악묘를 지나서 사하역성(沙河驛城)에 이르렀습니다. 성의 서쪽을 지나는 작은 강이 사하(沙河)[1]였습니다. 8th Day. Passing Ch’ien-t'un Garrison. This day was cloudy. The men of Kao-ling Station were exceedingly cruel and overbearing. When Munhoe, one of my soldiers, was urging his donkey forward, a man from the station struck him on the head with a stick, making blood spurt forth. Chang Shu-tsu went with us to the Ch'ien-t'un Garrison and complained to Sheng Ming, Commissioner for the Garrison Forces, [Wei-kuan-chün tu-chih-hui], who sent men to arrest the man at the station. [We went on to a place west of Sha-ho Station.]
5월 9일
5월 9일 初九日,晴,過張公墓、雙數鋪、王公墓,至前衛之中後千戶所城,由南門而入,門即瑞寧門也,至所館,與千戶劉清話別,復出自城東慶春門,而行至東關驛,是日所渡河有三,日十子、狗兒、六州等,河北有殷惡山, 맑았습니다. 장공묘(張公墓), 쌍돈포(雙數鋪), 왕공묘(王公墓)를 지나서 전둔위의 중후천호소성(中後千戶所城)에 이르렀습니다. 남문을 거쳐 들어갔는데 남문이 서녕문(瑞寧門)이었습니다. 천호소(千戶所)의 객관에 이르러 천호 유청(劉淸)과 환담하다 헤어졌습니다. 다시 성 동쪽 경춘문(慶春門)으로 나와서 동관역(東關驛)에 이르렀습니다. 이 날 건넌 강이 셋이었는데 십자하(十子河), 구아하(狗兒河), 육주하(六州河)였습니다. 북쪽에는 은악산(殷惡山)이 있었습니다. 9th Day. Fair. [We went from Chang-kung Tomb to Tung-kuan Station.]
5월 10일
初十日,晴,過曲尺河鋪、大沙河,至寧遠衛之中右千戶所城,由南薰門而入,過武安王廟,至所館,城之北望有甲山、羊角山,復出自永和門,過小沙河而行,路東南有燒場城,海浦環抱于城之東北,至曹莊驛城。 맑았습니다. 곡척하포(曲尺河鋪), 대사하(大沙河)를 지나서 영원위(寧遠衛)182의 중우천호소성(中右千戶所城)에 이르렀습니다. 남훈문(南薰門)을 경유해 들어가서 무안왕묘(武安王廟)184를 거쳐 천호소의 객관에 이르렀습니다. 성 북쪽에서 바라보니 갑산(甲山)과 양각산(羊角山)185 이 있었습니다. 다시 영화문(永和門)으로 나와 소사하(小沙河)를 지나 앞으로 가니 길 동남쪽에 소염장성(燒鹽場城)이 있었으며, 바닷가가 성의 동북쪽을 빙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달려서 조장역성(曹莊驛城)에 이르렀습니다. 10th Day. Fair. [We went from Ch’u-ch’ih-ho Stop to Ts'ao-chuang Station.]
5월 11일
十一日,過寧遠衛,是日晴,大風,自曹莊驛至寧遠衛城,城南又築長垣,坦南乃講武場,女兒河來繞城東北而西而南注之,城之西有鐵冒山,北有立山、虹螺山,南有青粮山,虹螺三疊獨秀起,臣等由城南門而入,過迎恩、進士、崇敬等門,至迎恩街,街中作二層樓,樓西懷遠門,北靖邊門,東景陽門,又馳至衛館,少歇。城中又有左·右·中·前·後五所,臣等從春和門出城東,城東四里許,有聖塘溫泉,張述祖引臣至,則果有溫湯三井,建浴室,又過桑樹鋪,至連山睾,睾之南有胡蘆套,西有三首山,北有塞兒山,購之得名以此。 영원위를 지났습니다. 이 날은 맑고 큰바람이 불었습니다. 조장역(曹莊驛)으로부터 영원위성(寧遠衛城)에 이르니 성 남쪽에는 긴 담을 쌓았는데 담의 남쪽이 강무장(講武場)이었습니다. 여아하(女兒河)가 흘러 와서 성 동북쪽을 둘러서 서쪽으로 갔다가 남쪽으로 흘러갔습니다. 성 서쪽에는 철모산(鐵冒山)186이 있고 북쪽에는 입산(立山)과 홍라산(虹螺山)이 있고 남쪽에는 청량산(靑糧山)이 있었는데, 홍라산의 세 봉우리가 유독 빼어났습니다. 신 등은 성 남문으로 들어가 영은문(迎恩門)·진사문(進士門)·숭경문(崇敬門) 등의 문을 지나서 영은가(迎恩街)에 이르렀는데, 거리 가운데는 2층 누각을 지어 놓았습니다. 누각 서쪽에는 회원문(懷遠門), 북쪽에는 정변문(邊門), 동쪽에는 경양문(景陽門)이 있었습니다. 또 달려서 영원위(寧遠衛)의 객관에 이르러 조금 쉬었습니다. 성안에는 또 좌소(左所)·우소(右所)·중소(中所)·전소 (前所)·후소(後所) 등이 있었습니다. 신 등이 춘화문(春和門)에서 성 동쪽 으로 나가니 성 동쪽 4리가량에 성당온천(聖塘溫泉)이 있었습니다. 장술조가 신을 안내하여 이르니 과연 온탕(溫湯) 삼정(三井)이 있는데 욕실(浴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 상수포(桑樹鋪)를 지나서 연산역(連山驛)에 이르니, 연산역 남쪽에는 호로투(胡蘆套), 서쪽에는 삼수산(三首山)', 북쪽에는 채아산(__兒山)이 있었습니다. 연산역이란 명칭을 얻은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11th Day. Passing Ning-yuan Garrison. This day was fair with high winds. [We went from Ts'ao-chuang Station past Ning-yuan Garrison to Lien-shan St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