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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ie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4월 2일 (목) 17:2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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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학력

  • 동국대학교 사학과 재학
  • 동국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복수 전공

경력

  • 국립중앙박물관 '아라비아의 길' 전시 스태프 (17.05~17.08)
  • 국립중앙박물관 '칸의 제국 몽골' 전시 스태프 (18.04~18.07)
  • 소마미술관 전시 스태프 (19.04~19.06)

좋아하는 것들

  • 뮤지컬, 전시 관람, 음악 감상, 요리

유튜브

최부의 표해록

최부의 표해록 장서각본

5월 21일

二十一日,時而風。過要站鋪,至高平疇,過清泉鋪、新河橋、通河橋、通河鋪,至沙嶺驛,

맑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요참포(要站鋪)를 지나서 고평역(高平驛)에 이르렀고, 청천포(淸東鋪), 신하교(新河橋), 통하교(通河橋), 통하포(通河鋪)를 지나서 사령역(沙嶺驛)에 이르렀습니다.


21st Day. Fair but windy. [We went from Yao-chan Stop to Sha-ling Station.]

5월 22일

二十二日,晴風,過高墩鋪,至新關門,有長土城,北附長城而南,關門正當其中,即成化年間所新築也,又過大臺、三官廟、河灣舖,至三叉河,河即遼河 요하也,源自開原 개원東北,經鐵嶺,至此與渾河、(泰)(太子河 태자하合流 為一,故名三汉,盖遼地瀕海而高亢,支河皆逆流,故泰子、渾河,皆自東而西,又有境外支河,皆自北而南,曲折紫迴,俱會于此,作浮橋,橫截河流,又挽舟而渡,號為遼河渡,有一官人坐于河岸小廳,以識察往來行人,其南有聖母媽媽廟,又過臨河橋,到牛家莊露,又過石井鋪、沙河在城鋪,至在城睾,睾在海州衛之城西門外,故名,衛亦巨鎮也,東有西车城山。

맑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고돈포(高數鋪)를 지나서 신관문(新關門)에 이르니 장토성(長土城)205이 북쪽으로 장성(長城)에 붙어서 남쪽으로 뻗었고, 관문(關門)은 바로 그 복판에 있었으니 곧 성화(成化) 연간에 새로 쌓은 것이었습니다.

또 대대(大臺), 삼관묘(三官廟), 하만포(河灣鋪)를 지나서 삼차하(三가河)에 이르니 삼차하가 곧 요하(遼河)[1][2][3][4][5]였습니다.

그 원류는 개원(開原)의 동북으로부터 시작하여 철령(鐵嶺)[6][7][8]을 지나 이곳에 이르러서 혼하(渾河), 태자하(太子河)206 와 합류해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삼차하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대개 요동 지대는 바다에 가깝지만 지대가 높아서 지류가 모두 역류하기 때문에 태자하와 혼하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렀습니다.

또 이 지역 밖의 지류는 모두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굽이지고 빙 둘러서 모두 이곳으로 모이니 부교(浮橋)를 만들어 하류(河流)를 가로막아 끊었으며, 또 배를 당겨 건너게 되므로 요하도(遼河渡)라고 불렀습니다.

한 관인이 강가의 작은 청사에 앉아서 왕래하는 행인들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 남쪽에는 성모양양묘(聖母壤壤廟)가 있었습니다.

또 임하교(臨河橋)를 지나서 우가장역(牛家莊)에 이르고, 다시 석정포(石井鋪)·사하재성포(沙河在城鋪)를 지나 재성역(在城驛)에 이르렀습니다.

재성역은 해주위(海州衛)의 성 서문 밖에 있었기 때문에 재성역이라 이름한 것이었습니다.

해주위 또한 큰 진(鎭)이었습니다. 동쪽에 서모성산(西牟城山)이 있었습니다.


22nd Day. Fair but windy. [We went from Kao-tun Stop across the Liao River to Hai-chou Garrison, which was also a big market town.]

205. 명대 遼東 지역에 쌓은 邊牆.

206. 民國《遼陽縣志》 권2, 山川에는 '太子河'로 기재되어 있다. 康熙《遼陽州志》 권7, 山川에도 太子河가 혼하 및 요하와 합류하여 三叉河를 이룬다고 하고 있다. 《方輿記 要》에 의하면 “太子河는 곧 옛 衍水이다. 燕 太子 丹이 衍水에 숨어들었기 때문에 後人이 太子河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동 ↑ 요하문명(遼河文明)의 발견과 동북아 상고사-우실하 교수 이동 ↑ "고구려시대 압록강은 요하(遼河)였다", 연합뉴스, 2012,02.23 이동 ↑ 고조선의 서쪽 경계 '요하'는…"현재의 랴오닝강" vs "더 서쪽", 연합뉴스, 2017.03.22 이동 ↑ 요하지역에서 발견된 ‘신비의 왕국’한국인의 고향,‘신비의 왕국’찾았다(8), the Science Times, 2007.11.06 이동 ↑ 요하문명론 이동 ↑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압록강 서북쪽 ‘철령’은 요동… 일제때 함경남도 안변이라 우겼다, 서울신문, 2018.03.12] 이동 ↑ 윤여동설 - 고려는 “철령(鐵嶺)” 때문에 망했다 이동 ↑ 철령위, 우리역사넷

5월 23일

二十三日,至遼陽驛,是日,陰而雷,自曝傍城而西北而東,過遞運所、土河铺、甘泉鋪、關王廟,至鞍山睾,睾之東有遼高山,西有遼下山,又過武安王廟、長占鋪,至沙河鋪,有二水俱帶于鋪之東西,名皆沙河,盖自通州以來,地多沙土,故水以沙河得名者多,又過首山鋪,至遞運所城,城即八里莊也,過接官亭,至遼陽在城驛,驛在遼東城西,

요양역(遼陽驛)[1]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흐렸다가 천둥이 쳤습니다.

재성역에서 위성(衛城)을 따라 서쪽으로, 북쪽으로 다시 동쪽으로 가서 체운소(遞運所), 토하포(土河鋪), 감천포(甘泉鋪)207, 관왕묘(關王廟)를 지나 안산역(鞍山驛)에 이르니 안산역의 동쪽에는 요고산(遼高山), 서쪽에는 요하산(遼下山)이 있었습니다.

또 무안왕묘(武安王廟), 장점포(長店鋪)를 지나서 사하포(沙河鋪)에 이르니, 두 강물이 모두 포(鋪)의 동쪽과 서쪽을 두르고 있었는데 모두 '사하'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통주(通州)로부터는 사토가 많았기 때문에 '사하'라고 불리는 강이 많았습니다.

또 수산포(首山鋪)를 지나서 체운소성(遞運所城)에 이르렀으니, 체운소성이 곧 팔리장(八里莊)[2]이었습니다.

접관정(接官亭)을 지나서 요양재성역에 이르렀는데, 역은 요동성의 서쪽에 있었습니다.

23rd Day. Arrival at Liao-yang Station. This day was cloudy, and there was thunder. [We went from the wall of the garrison to Liao-yang-tsai-ch'eng Station, which was west of the wall of Liao-tung.]

207.《全逸志》권1, 圖考, 遼陽城에는 井泉鋪로 되어 있다. 이동 ↑ 쓰다소키치, 어떻게 고려국경선 날조했나, 코리아히스토리타임스, 2018.07.24 이동 ↑ 최영, 고려시대사료

5월 24일

二十四日,晴,有僧戒勉者能通我國語音,謂臣曰:“僧系本朝鮮人,會祖父逃來于此,今已三世矣,此方地近本國界,故本國人來往者甚夥,中國人最怯懦無勇,若遇賊,皆投戈奔竄,且無善射者,必抄本國人向化者,以謂精兵,以為先鋒,我本國一人,可以當中國人什百矣,此方即古我高句麗之都,奪屬中國千有餘載,我高句麗流風遺俗,猶有未验,立高麗祠,以為根本,敬__不怠,不忘本也。嘗聞鳥飛返故鄉,狐死必首丘,我等亦欲返本國以居,但恐本國反以我等為中國人,刷還中國,則我等必服逃奔之罪,身首異處, 故心欲往而足超耳:”臣曰:“汝以清淨之流,宜在深山之中,何為僧冠俗行,出入於閩閣之中乎?”曰:“僧入山中久矣,今為官吏所招來”臣曰:“招以何事?”曰:“大行皇帝尊崇佛法,巨利半於天下,方袍多於編戶,會等安队飽食,以修釋行,新皇帝自為東宮,素惡僧徒,及即位大有剪去之志,今則 下詔天下,凡新設寺庵,並令撤去,無度牒僧刷令還俗之令,急於星火,故三堂老爹令吏招僧,自今日壞寺長髮云云,僧徒顧安所容一身

p.454 乎?”臣曰:“此乃撤寺利為民舍,毁銅佛為器皿,髮影首充軍伍之漸,乃知大聖人之所為,出於尋常萬萬也,汝徒嘗祝釐曰:“皇帝陛下萬萬歲,汝之祝釐如是,大行皇帝之崇佛如是,寺利僧佛之盛又如是,大行皇帝壽未中身,八音遠遏,汝之祝釐之勤,安在哉?”言未眠,勉辭謝而退,

맑았습니다.

우리말에 능통한 계면(戒勉)이란 중이 신에게 말하기를,

“소승(小僧)은 본디 조선 사람인데, 소승의 할아버지가 이곳으로 도망 온 지 지금 벌써 3대가 되었습니다. 이 지방은 본국(本國)의 경계와 가까운 까닭에 왕래하는 본국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중국 사람은 겁이 많고 용맹스럽지 못하여 도적을 만나면 모두 창을 던지고 도망해 숨어버리며, 또 활을 잘 쏘는 사람도 없어 반드시 본국인으로서 귀화한 사람을 뽑아서 정병(精兵)이라 하여 선봉으로 삼으니, 우리 본국의 한 사람이 중국사람 열 명, 백 명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이 지방은 곧 옛날 우리 고구려의 도읍[1][2][3][4][5][6][7][8][9]인데 중국에게 빼앗긴 지 천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우리 고구려의 옛 풍속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아서 고려사(高麗祠)를 세워 근본으로 삼고, 공경하게 제사지내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근본을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듣건대, 새는 날아서 고향으로 돌아 가고, 여우는 죽을 때 살던 굴로 머리를 돌린다208고 하였으니, 우리들도 본국으로 돌아가서 살고 싶습니다. 다만 본국에서 도리어 우리들을 중국 사람으로 간주하여 중국으로 돌려보내면, 우리들은 반드시 외국으로 도망한 죄를 받아서 목을 잘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가고 싶지만 발이 머뭇거릴 뿐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그대는 청정(淸淨)의 무리209이므로 깊은 산 속에 있어야 할 것인데 어째서 중의 관(冠)을쓰고 속인(俗人)의 행동을 하면서 여염에 드나들고 있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소승은 산 속에 들어간 지 오래됐는데 지금 관리에게 불려온 것입니다."

“무슨 일로 부르던가?”

“대행황제(大行皇帝)께서 불법을 존숭하시어 큰 사찰이 천하에 반을 차지하고, 방포(方__)210가 편호(編戶)'보다 많았으며, 중들은 편안히 누워있고 배부르게 먹으면서 수행하였습니다.

새 황제께서는 동궁으로 있을 때부터 중들을 미워하시더니 제위(帝位)에 오르시고는 아주 제거해 버릴 뜻을 가지셨습니다.

지금은 천하에 조칙(詔勅)을 내려 새로 설치한 암자는 모두 철거하도록 하고 도첩(度牒)이 없는 중은 모조리 환속시키라는 명령이 성화(星火)보다 급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삼당(三堂) 대감께서 관리로 하여금 저를 불러서 오늘부터는 절을 부수고 머리를 기르도록 하라 운운하셨으니, 僧徒는 어디서 이 한 몸 받아 줄지를 살피고 있습니다.”

신이 이르기를 “이것은 곧 사찰을 철거하여 민가로 만들고, 청동불상을 부수어 구리 그릇으로 만들며, 깎은 머리를 기르게 하여 군적(軍籍)에 충당시키시려는 의도이니, 이제야 대성인(大聖人)께서 하시는 일이 비범함을 알겠다. 너희들은 일찍이 '황제폐하 만만세'라 축원하였다. 너희의 축원이 이와 같았고 대행황제의 불교를 숭상하심이 이와 같았으며 사찰과 중들의 번성이 또 이와 같았으나, 대행황제는 장수(長壽)하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으니, 213 너희가 축원한 수고로움은 어디 있는가?”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계면은 하직하고 물러가버렸습니다.

24th Day. Fair.

A monk there, Chieh Mien, could understand our language. He said to me, "Originally my ancestors were Koreans, but my grandfather fled to this place. It has been three generations now. Since this region is near the border of the old country, a great many men from there come here to live. “The Chinese are extremely cowardly. If they meet bandits, they all throw away their spears and flee. They have no good bowmen, moreover, and must seize immigrants from the old country and use them as vanguards, calling them picked troops. One man from our country is a match for ten or even a hundred Chinese. “This region was the capital of our old Koguryo. It was taken into China over one thousand years ago, but the traditional customs of our Koguryo have not yet all died out. We have built a Koryð temple and use it as a center. We sacrifice regularly and do not forget our origins. “I have heard, ‘Birds fly home to die, and foxes head for their burrows.?43 We, too, want to return to our country to live, but we are afraid that our country will consider us Chinese and send us back to China. Then we should be charged with having fled and lose our heads. Our hearts, therefore, want to go but our feet hesitate.” I said, “As an anchorite, you ought to be deep in the mountains. Why do you frequent the streets like a layman in a monk's hat?” Chieh Mien said, “For a long time I was in the mountains; now I have been called out by the officials.” I said, “Why have you been called?” Chieh Mien said, “The late Emperor respected the Buddhist law. Great monasteries were built all over the Empire, and there were more monks than people. We lay at ease, ate our fill, and did the Buddhist rounds. “Since the new Emperor was Heir-Apparent, he has consistently hated the monks. When he took the throne, he was determined to do away with us. Now he has handed down an edict ordering all newly established temples and monasteries to be abolished. Monks who do not have official certificates are to be returned to the laity, and this is to be done in the greatest haste.44 The Three Chiefs, therefore, ordered sub-officials to call out the monks. From now on the temples will be destroyed, and the monks will have to grow their hair. That is why I am like this."45 I said, “That way, the abolished temples become people's houses, the destroyed bronze Buddhas become vessels, and the heads that once were bald and now are hairy fill the army ranks. These actions are the deeds of a Sage Emperor, far superior to the ordinary sovereign. “You people have prayed, saying, 'Long live His Majesty the Emperor.' If you so prayed for good fortune, and the late Emperor so respected Buddhism, and the temples and priests so flourished, what good was your earnest praying when the late Emperor died before he was middle-aged?” Before I finished speaking, Chieh Mien made excuses and left.

208.《進南子》권16 (說林)에 “鳥飛反鄕, 走歸窟, 狐死首丘”라는 말이 있다. 209. 죄악과 번뇌를 멀리하여 세속을 떠난 승려를 말함. 210. 方袍란 僧服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승려를 가리킨다. 211. 戶口冊에 편입된 人家. 212. 官府에서 尼에게 발급한 出家 증명서.

213. 成化帝는 재위시 많은 佛寺와 道觀을 만들고 長生術을 추구했지만, 만 40세가 되지 못한 나이에 급사했다. 이동 ↑ 후기의 도읍 평양의 진짜 위치 탐구중입니다”, 한겨레신문, 2015.06.11 이동 ↑ "장수왕 천도 평양은 평양 아닌 랴오양" , 연합뉴스, 2009.06.23 이동 ↑ 장수태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북한 평양아닌 요양 이동 ↑ 랴오양(遼陽)이 고구려의 평양? 中요동 고구려계 고분벽화 국내 공개, 동아일보, 2016.04.08 이동 ↑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박지원 지음, 고미숙・길진숙・김풍기 엮고 옮김, 북드라망, 2014, p.94-95 이동 ↑ “수도 평양은 이북 아닌 요동에 있었다!”, 신동아, 2015.08.21 이동 ↑ 고대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다, 코리안스피릿, 2016.07.11 이동 ↑ 고려 평양이 중국 요양이라고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 이동 ↑ HOME 이슈 평양 위치가 중국? 엉터리 연구에 놀아난 한국'수학으로 푼 고지도의 비밀', 뉴스토프, 2018.01.22

5월 25일

二十五日,晴,通事千戶王憲、百戶吳鹽來語臣曰:“館夫不說你輩留此經日,故我等在家不知,所以來看之晚也”聖遂引程保、金重等,三堂大人根前,告以漂來首末,三堂大人都指揮使鄧玉、分守總兵官韓斌、布政司副使吳玉、巡按監察御史陳琳琳等也,夕,指揮使命吏將黃酒三盆、全猪一頭、稻米一斗、栗米一斛,來臣等,

맑았습니다.

통사인 천호 왕헌(王憲)과 백호 오새(吳靈)214가 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관부(館夫)가 당신들이 이곳에 며칠 묵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까닭에 우리들은 집에 있으면서 알지 못하여 와서 뵙는 것이 늦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오새는 마침내 정보, 김중 등을 이끌고 삼당(三堂) 대인의 앞에 나아가서 표류해서 온 전말을 고하였습니다.

삼당 대인은 곧 도지휘사(都指揮使)215 등옥(鄧玉), 분수총병관(分守總兵官) 한기(韓旗), 포정사부사(__政使副使) 오옥(吳玉), 순안감찰어사(巡按監察御史) 진림(陳琳) 등이었습니다.

저녁에 지휘사(指揮使)가 이속(吏屬)을 시켜 황주(黃酒)[1] 3동이, 통돼지 1마리, 쌀 1되, 좁쌀 1되를 가지고 와서 신 등을 위로하였습니다.

25th Day. Fair.

Chiliarch Wang Hsien and Centurion Wu Hsi, the interpreters, came and talked with me: “The porters at the inn did not tell us that you would stay here several days, and not knowing, therefore, we stayed at home. That is why we are late in coming to see you.” Wu Hsi took Chong Po, Kim Chung, and others to call on the chiefs of the Three Authorities. Before them, they reported the whole story, from our going adrift to our arrival. The chiefs of the Three Authorities were Teng Yü, Regional Military Commissioner; Han Pin,46 Deputy Regional Commander; Wu Yü, Administration Vice Commissioner [Pu-cheng ssu fu-shih]; and Ch’en Lin, Regional Inspector.47 In the evening, the General ordered an officer to bring us three jugs of yellow wine, one whole pig, one peck of rice, and ten pecks of millet for a feast.

214. 吳靈는 이 때보다 4년이 지난 후에 鳳凰城의 鎭撫가 되어 있었고, 명나라 사신 艾꽃이 곧 조선으로 나갈 것이라는 소식을 조선에 알려주었다. 《朝鮮成宗實錄》 23년 5월 乙酉.

215. 都指揮使司 및 行都指揮使司의 장관으로 정2품이다. 都指揮同知, 都指揮僉事와 함께 한 省의 軍政을 관장하였다. 司의 일을 총괄하는 자는 掌印이라 하였다. 1인은 練兵을, 1인은 屯田을 통괄하였는데, 僉書라고 불렀다. 巡捕, 軍器, 漕運, 操練, 備御 의 여러 직무를 모두 통괄하였다. 모두 流官으로 충임하였으며, 조정에서 선발하여 임명하였다. 이동 ↑ [경제학자의 우리 술 이야기중국 황주와 우리 술, 경향신문, 2014.11.07]

5월 26일

二十六日,晴。王憲復來,曰:“貴國及海西、毛鄰、建州等衛,皆路經于此,貴國使臣往來,接待唯我與吳靈二人耳,我今年老畏暑,故總兵官差郵件送你,鄭亦好人,你可好還本國,可勿憂也,大抵道途之遠,客旅之中,四體不得息,寝食不以時,疾病易以纏,故不數月間,貴國使臣若韓鑽、李世弱相繼道死,其行道若是其難也,今你則歷盡鯨濤疆浪、越南、燕北,全其身全其從者而還,天所以置諸危而全之,措諸禍而福之,從可知矣!”臣曰:“我之保全而來,都是皇恩所賜,抑又我先人亡靈,必有陰佑之功故也。”

맑았습니다.

왕헌이 다시 와서 말하기를,“귀국과 해서위(海西衛), 모린위(毛鄰衛), 건주위(建州衛)등으로 가는 길이 모두 이곳을 거치게 되는데, 귀국의 사신이 왕래할 때 접대하는 사람이 나와 오새 두 사람뿐입니다.

내가 지금 나이가 많아 더위를 견디지 못하므로 총병관께서 오새로 하여금 당신을 호송하게 하셨습니다.

오새도 좋은 사람이어서 당신은 본국으로 잘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개 먼 길을 여행 중에는 몸을 쉬지 못하고 먹고 자는 것을 제 때 하지 못하여 병이 쉽게 생깁니다.

그런 까닭에 몇 개월도 안 되는 사이에 귀국의 사신 가운데 한찬(韓贊), 이세필(李世弼) 같은 이가 잇달아 길에서 죽었던 것18이니 먼 길을 간다는 것은 이처럼 어려운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험한 파도와 월남(越南), 연북(燕北) 지방을 두루 다 거치면서도 자신과 종자들이 모두 온전히 돌아가게 되었으니, 하늘이 위험에 처하게 했다가 온전히 구해주시고 재앙 속에 빠트렸다가 복을 내려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내가 몸을 보전해 온 것은 모두 황제의 은혜 덕택이고, 또 저의 선친(先親)의 신령이 반드시 몰래 도와주신 공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26th Day. Fair.

Wang Hsien came again and said, “The road to your country and those to Hai-hsi, Mao-lin, and Chien-chou garrisons pass through here. Only Wu Hsi and I are here to receive the envoys' of your country who pass to and fro. I am old now, and I dread the summer heat. The Regional Commander, therefore, has commissioned my colleague Wu Hsi to accompany you as escort. Wu Hsi is also a good man. Do not worry, you will get back safely to your country. “Generally, during a long trip the body gets no rest, and sleeping and eating are irregular, so that one easily falls sick. That is why within a few months envoys from your country like Han Ch’an and Yi Se-p’il died one after another on the way. So hard is the journey! Yet you, now, have passed through mountainous seas and come all the way from south of Yüeh to north of Yen. You are going home safe yourself and your followers safe; from that it is evident that Heaven has made dangers to save you and calamities to bring you through them in good fortune.” I said, “My arrival safe and sound is entirely a gift of the Imperial graciousness. It must also be because my dead father's spirit has been giving me secret help.”

5월 27일

二十七日,陰,吳璧來,曰:“總兵官差我以騎馬四十三匹、默載馬十五匹,送你等還國,其中一匹,乃我所騎,你等行李,約有多少?”臣曰:“我四十三人,原有行李合而載之,不滿一二默,但受賞於皇帝之胖綿榜,皆冬節之衣,又有所受於廣寧衣韓等物耳。”夔曰:“行李少則行路可便矣.”

흐렸습니다.

오새가 와서 말하기를, “총병관께서 나를 보내 타는 말 43필과 짐 싣는 말15필로써 당신들을 귀국시키도록 하셨는데 그중 1필은 내가 탈 것입니다. 당신들의 행장이 대략 얼마나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43인이 원래 지닌 행장은 합하여 실어도 한 두 바리에 지나지 않고 황제에게 상으로 받은 반오(胖煥)와 면고(綿榜)가 모두 겨울옷이고, 그밖에 광녕에서 받은 의복과 가죽신 등 물품이 있을 뿐입니다.”

“행장이 적으면 길 가기가 편할 것입니다.”

27th Day. Cloudy.

Wu Hsi came and said, “The Regional Commander has commissioned me to escort you back to your country with forty-three horses and fifteen pack horses. One of the animals will be ridden by me. About how much baggage do you have?” I said, “If we loaded together the baggage the forty-three of us had originally, it would not fill one or two packs. But the padded jackets and trousers we received as awards from the Emperor are winter clothes. There are also the gowns, shoes, and other things we received at Kuang-ning, and that is all.” Wu Hsi said, “If there is little baggage, the trip can be easy."

5월 28일

二十八日,大雨,吳鑒又來,曰:“今日治任將行,天雨雨奈何?”臣曰:“以我式端之心,難過一刻之留,憂此兩者,我一人而已,今年大旱,自二月不雨,以至于今,幸而得雨,則其喜之者,人與萬物也,天實為之,謂之何哉?”璽日:“正是正是。”O遼東舊我高句麗之都,為唐高宗所滅,割屬中原,五代時為渤源(太)[大]氏所有,後又為遼、金、胡元所併,城中有都司、察院、布政司、大僕分司、閱馬司,又有左·右·中·前·後衛,自城西昇平橋,以至肅清、迎恩、澄清、楊武、威振、四路等門及進士門八座,以至高麗市間,民居可謂繁夥,揆之江南,可與嘉興府相頡頑矣,但嘉興城外,市間相接,遼東城外,雞鳴狗吠,不得相聞,海子路傍,土飄飄耳,城東又別築東寧衛城,首山、千山、木場、駱駝、太子、杏花諸山,環拱于城之西南東,其北則平曠無現之野,

큰비가 내렸습니다.

오새가 또 와서 말하기를,

“오늘은 행장을 차려 떠나려 했는데 하늘이 비를 내리시니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나의 조급한 마음으로는 한 순간도 머물기 어려워 이 비를 근심하는 사람은 나 한 사람뿐입니다. 올해에는 크게 가물어 2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다가 오늘에야 다행히 비가 내리니 사람과 만물이 모두 기뻐합니다. 실로 하늘이 하신 일인데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옳습니다! 옳습니다!"

요동219은 곧 옛날 우리 고구려의 도읍이었는데[1][2][3][4] 당고종(唐高宗)에게 멸망을 당하여 중원에 예속되었습니다.[5]

오대(五代) 시대에 발해(渤碑) 대씨(大氏)의 차지가 되었으나 후에 또 요(遼)나라 금(金)나라 원(元)나라에게 병탄되었습니다.

성안에 도사(都司)·찰원(察院)·포정사(布政司)·태복분사(太僕分司)·열마사(馬司)가 있고, 또 좌위(左衛)·우위(右衛)·중위(中衛)·전위(前衛)·후위(後衛)가 있었습니다.

성 서쪽의 승평교(昇平橋)에서 숙청문(肅淸門)·영은문(迎恩門)·징청문(澄淸門)·양무문(揚武門)·위진문(威振門)·사로문(四路門) 및 진사문(進士門) 등 팔좌(八座)로부터 고려시(高麗市) 사이에 민가는 번창하다고 할 만하니, 강남으로 가늠한다면 가흥부(嘉興府)와 서로 겨룰 만하였습니다.

다만 가흥은 성 밖에까지 시가(市街)가 잇닿아 있었는데 요동의 성 밖은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리지 않았으며 해자(字) 길 가에는 흙먼지만이 가득할 뿐이었습니다.

성 동쪽에는 또 동녕위성(東寧衛城)을 별도로 쌓았는데 수산(首山)222 · 천산(千山)·목장산(木場山)·낙타산(協駝山)·태자산(太子山)·행화산(杏花山) 등 여러 산들이 성 서쪽 남쪽 · 동쪽으로 빙둘러 있었으며, 그 북쪽은 평평하고 툭 트여서 끝이 없는 벌판이었습니다.

28th Day. Heavy rain.

Wu Hsi came again and said, “Today we were to pack the baggage and start, but it is raining hard; what shall we do?” I said, “It is hard for me, impatient as I am, to delay a moment. I alone am distressed by the rain. There has been a severe drought this year; it has not rained since the Second Month. Now that we are fortunate enough to get rain, men and all things are happy. If Heaven truly has done it, what can I say?” Wu Hsi said, “True, true.” XXX Liao-tung was the capital of our old Koguryo. It was taken and attached to China by T’ang Kao Tsung [r. 650-683]. Originally in the Five Dynasties period, it was held by the overlords of Po-hsieh.48 Later it was absorbed by Liao, Chin, and Barbarian Yuan. Inside the wall are the Regional Military Commission, the Office of Surveillance [Ch’a-yüan], the Provincial Administration Office, the Local Office of the Imperial Stud, and the Inspectorate of Horses. 49 There are also Left, Right, Center, Forward, and Rear garrisons. From Sheng-p'ing Bridge west of the wall to Su-ch’ing, Ying-en, Ch’eng-ch'ing, Yang-wu, Wei-chen, and Ssu-lu gates; and between Chin-shih-men-pa-tso and Koreatown, the houses can be called dense. By standards south of the Yangtze, [the city] can be pitted against Chia-hsing Prefecture. But outside the wall of Chia-hsing Prefecture, villages stretch one after another; outside the wall of Liao-tung, neither the crowing of cocks nor the barking of dogs is to be heard. Along the Hai-tzu Road, there is nothing but great altars stretching like beads on a string. The wall of Tung-ning Garrison is built separately east of the city. Mt. Shou, Mt. Ch’ien; Mu-ch’ang, Lo-to, T'ai-tzu, and Hsing-hua mountains circle the city to the east, south, and west. To the north is a flat, endless plain. XXX

219. 요동은 넓게는 遼河의 以東 지방을 가리키지만, 여기에서는 가장 좁은 의미의 遼東 즉 遼東都司가 위치한 遼陽을 가리킨다. 220. 唐의 제3대 황제(재위 649-683)로서 즉위 초기에 永徽律令과 律疏를 제정하고 《五經正義》를 반포 발행하여, 唐의 典章制度를 모두 마무리지었다. 655년 새로 則天武后를 황후로 맞아들인 뒤부터는, 武后에게 점차 권력을 빼앗기게 되었다. 221. 渤海의 시조인 高王(재위 699-719) 大祚榮을 가리킨다. 696년 李盡忠 등이 이끈 거란족의 반란을 이용하여 고구려 유민[6][7][8][9]과 말갈족을 이끌고 자립을 꾀하였다. 699년 지금 의 吉林省 敦化縣 지역인 東牟山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어 국호를 震, 연호를 天統이라 하였다. 이후 唐은 유화정책으로 나와 唐中宗이 705년 사신을 보내 왔고, 大祚榮도 아들 大武藝를 唐에 보냄으로써 답례하였다. 713년에 국호를 渤海로 바꾸었다.

222.《遼史》에 의하면 당태종이 고구려에 원정할 때 이곳에 주둔하고 石碑를 세워 戰功을 기록했다고 한다. 民國《遼陽縣志》 권2, 山川. 이동 ↑ 여호규 교수, ‘고구려, 광개토왕 때도 요동 벗어나지 못했다’,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즈2017.10.27 이동 ↑ [역사산책 고구려와 한나라의 요동 전쟁, 동포뉴스, 2016.04.21] 이동 ↑ 고구리의 요동·요서는 어디인가? (4부), 고구려역사저널, 2015.10.10 이동 ↑ 태조대왕의 요동진격 이야기, 민플러스, 2018.05.24 이동 ↑ 삼국사기 > 髙句麗本紀 第十 > 보장왕(寶藏王) > 당 고종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동 ↑ [한국 속 중국 고선지 장군, 중국 역사를 만든 고구려의 후손, 중앙일보, 2018.01.29] 이동 ↑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 나폴레옹보다 낫다", 오마이뉴스, 2011.04.04 이동 ↑ 고구려 후손 고선지 장군①…파미르 고원을 넘다, 오피니언유스, 2018.04.07 이동 ↑ 고구려 유민들의 디아스포라… 20여만명 끌려가, 오피니언뉴스, 2018.03.24

5월 29일

二十九日,自遼東登程,是日晴,吳鹽與千戶田福惜至驛,引臣等行,出驛城東門外,不一里,乃遼東城也,兩間有關王廟,行過兀良哈館、泰和門、安定門,至我朝鮮館,館前立(標)[標]1,扁畏天保國”四字,又過石河兒,入高麗洞,過大石門嶺、小石門嶺,兩嶺間有王都督墓,又過柳河

p.456 兒、湯河兒、頭巾站、狼子山,至顯得寨里而歇,里有三四家,乘昏,里人偷去臣之帽匣,匣中藏紗帽、囊佩及江南人所贈詩彙,程保告于璽,訊里人索之不得,鹽謂臣曰:“慢藏海盗,向誰给乎?”

요동에서 길을 떠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오새가 천호 전복(田福)과 함께 역에 이르러 신 등을 이끌고 출발하였습니다.

역성의 동문 밖으로 나와 채 1리도 되지 않는 곳이 요동성이었습니다.

두 성 사이에 관왕묘(關王廟)[1][2][3]가 있었습니다.

가다가 올량합관(元良哈館)[4]223. 태화문(泰和門) · 안정문(安定門)을 지나서 우리 조선관(朝鮮館)[5]224에 이르니, 조선관[6] 앞에 푯말을 세워 '외천보국(畏天保國)225이란 네 글자를 써 놓았습니다.

또 석하아(石河兒)를 지나서 고려동(高麗洞)[7][8]으로 들어와 대석문령(大石門嶺)과 소석문령(小石門嶺)을 지나니, 두영 사이에 왕(王) 도독(都督)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또 유하아(柳河兒)·탕하아(湯河兒)·두건참(頭巾站)·낭자산(狼子山)[9]을 지나서 현득채리(縣得寨里)에 이르러 쉬었는데, 마을에는 서너 채의 집이 있었습니다.

황혼(黃昏)을 틈타 마을 사람이 신의 모자갑을 훔쳐 갔는데 모자갑 속에는 사모(紗帽)·낭패(囊佩)와 강남 사람이 지어준 시고(詩)가 들어있었습니다.

정보가 오새에게 알려서, 마을 사람을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하였습니다. 오새가 신에게 말하기를,

“소홀히 간수하여 도적을 불렀으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29th Day. Setting out from Liao-tung. This day was fair.

Wu Hsi and Chiliarch T’ien Fu came to the station and set out, leading us. Less than one li outside the east gate of the station wall was the wall of Liaotung. Kuan-wang Shrine was between the two walls. We passed Urianghai House, T’ai-ho Gate, and An-ting Gate and came to our Korea House. In front of the house stood a plaque with the (four) words, “Dread Heaven, Defend the State.” [We went from Shih-ho-erh to Hsien-te-chai Village, where we stopped.] There were three or four houses in the village. Under cover of dusk, villagers stole my hat box. I had packed light silk gauze hats, satchel pulls, and the manuscript of a poem presented to me by a man south of the Yangtze in the box. Chòng Po reported it to Wu Hsi, who questioned the villagers but did not get it. Wu Hsi said to me, “Carelessness in putting things away teaches others to steal. Who is at fault?”

223. 거쳐가는 元良哈 사람들을 접대하기 위하여 마련한 客館, 224. 조선 使臣을 접대하기 위한 客館으로 康熙《遼陽州志》권10, 〈驛站)에 舖遞의 항목으로 열거되어 있다. 《遼東志》의 〈遼東都司治衛山川地理之圖〉에 의하면 조선의 사신을 留宿시킨 懷遠館 즉 朝鮮館을 遼陽城 밖 동남방에 따로 지었다고 한다.

225. 畏天保國'이란 하늘을 두려워하며 나라를 지킨다'는 것이지만, 여기서 '畏天'의 '天이란 결국 '天子'나 '天朝'의 뜻으로 즉 明朝를 가리킨다. 《春秋集義》에 “以小事大者, 畏天者也. 畏天者, 保其國”이란 구절이 있다. 결국 '畏天保國'이란 네 글자를 朝鮮館 앞에 걸어 놓은 의미는 “明朝에 충실하게 事大를 함으로써 朝鮮을 잘 보존하도록 하라”는 암시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동 ↑ 관왕묘 이동 ↑ 서울동관왕묘 이동 ↑ [전북 남원 관왕묘(關王廟)_삼국지의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 이동 ↑ 조선(朝鮮)을 받아들인 올량합(兀良哈)의 정체(6)-누루하치는 오도리(吾都里) 출신- 이동 ↑ 기획특집-평택 밖의 평택, 중국에서 평택 찾기 6 - 홍익한·오달제의 흔적, 심양 삼학사 유적-2, 평택시사신문, 2013.10.10 이동 ↑ 연원직지(燕轅直指) / 봉황성기(鳳凰城記) 이동 ↑ 고려동 유적 정비의 필요성에 대하여 이동 ↑ [경남 문화재 여행 함안 고려동유적지, 경남일보, 2015.07.20] 이동 ↑ 삼류하 둘러보기 메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