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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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혁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4월 2일 (목) 16:4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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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학력

  • 2014년 중국칭다오한국학교 졸업
  • 2015년 동국대학교 재학

경력

  • 2018년 2월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

좋아하는 것들

  • 메이플스토리(1)

최부의 표해록

  • 3월 14일

十四日,晴,至臨清縣之觀音寺前,寺在兩河交流之嘴,東西設四開以水,寺東以舟作浮橋,以通于縣,縣城在河之東岸半里許,縣治及臨清衛治,俱在城中,在兩京要衝,商旅輻禁之地,其城中及城外數十里間,樓臺之密、市肆之盛、貨財之富、船(泊)(帕]]之集,雖不及蘇·杭,亦甲于山東,名於天下矣,臣等沿清泉河而北,過漏浮關、藥局、新開上開、衛河廠、板下閘、大浮橋,至清源驛前留宿.

맑았습니다.

임청현(臨淸縣)의 관음사(觀音寺)에 이르니 관음사는 두 강이 만나는 끝에 있었고 동쪽 서쪽에 갑문 넷을 설치하여 물을 모아 두었습니다.

관음사 동쪽에는 배로 부교(浮橋)를 만들어 임청현으로 통하게 하였습니다.

현성(縣城)은 강의 동쪽 언덕 반 리가량에 있었으며 현치와 임청위치(臨淸衛治)는 모두 성안에 있었는데, 양경(兩京) 사이의 요충이며 상인이 몰려드는 곳이었습니다.

그 성 안팎 수십 리 사이엔 누대가 빽빽하고 상점이 성대하며 재화가 풍부하고 선박이 모여들어 비록 소주와 항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산동에서 제일가고 천하에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신 등은 청천하(淸泉河)를 따라 북쪽으로 가서 누부관(漏浮關)·약국(藥局)438 . 신개상갑(新開上岡)·위하창(衛河__)·판하갑(板下間)439 · 대부교(大浮橋)를 지나서 청원역(淸源驛) 앞에 이르러 유숙하였습니다.

14th Day. Fair.

We arrived in front of Kuan-yin Temple of Lin-ch’ing County. The temple was on a spit at the junction of two rivers. To east and west, four locks had been built to hold water. East of the temple a floating bridge had been built of boats to give passage into the county [seat]. The wall of the county was about a half li from the east bank of the river. Both the county seat and the Lin-ch’ing Garrison headquarters were inside the wall. It was an important junction between the two capitals, a place to which traveling merchants flocked. For several tens of li inside and outside the wall, the multitude of pavilions and towers, the flourishing of the markets, the wealth of valuable goods and the fleets of moored boats, though not equal to those of Su-chou or Hang-chou, were still the greatest in Shantung and famous everywhere. [We followed the Ch’ing-ch'uan River north to Ch’ing-yüan Station and stopped there.]

  • 3월 15일

十五日,朝大雷電以雨,午後陰,有遼東人陳、王鑽、張景、張昇、王用、何玉、劉傑等,以商販事先到于此,聞臣等之至,以清酒三壶、糖__一盤、荳腐一盤、大餅一盤來饋臣及從者,且曰:“我遼東城,地鄰貴國,義同一家,今日幸得相見於客旅之中,敢將薄物,以為禮耳:”臣曰:“貴地即古高勾麗故都,高勾麗今為我朝鮮之地,地之沿革,雖因時有異,其實同一國也,今我喘息九死之餘,漂泊萬里之外,四顧無相識之人,得遇諸足下,又受厚惠,如見一家骨肉之親”曰:“我於正月起程,二月初吉到此,四月初,旬間回還,恐不得再相見也,若先過暖地安定門內,問有儒學陳瀛者,吾兒也,好傳吾消息”云云,相別而去,臣等撑舟至下津廠前留泊,

아침에 큰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렸다가 오후에 흐렸습니다.

요동 사람 진기(陳)·왕찬(王讚)·장경(張景)·장승(張昇)·왕용(王用)·하옥(何玉)·유걸(劉傑) 등이 장사하는 일로 먼저 이곳에 도착하였다가 신 등이 이른 것을 듣고, 청주 3병 · 엿 1쟁반 · 두부 1쟁반·떡 1쟁반을 가지고 와서 신과 종자들을 접대하고 말하기를,

“우리 요동성(遼東城)[1][2]은 귀국과 접했으므로 정의(情義)가 한 집안과 같습니다. 오늘 다행히 객지에서 만나게 되었으므로 감히 약소한 물품을 가져와서 예를 차리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귀지(貴地)는 곧 옛날 고구려의 고도(故都)입니다. 고구려가 지금은 우리 조선의 땅이 되었으니, 땅의 연혁은 비록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실은 한 나라와 같습니다. 지금 내가 거의 죽을 뻔하다가 만리 밖에서 표류 정박하여 사방을 돌아보아도 서로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족하를 만나게 되고 또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한집안 골육의 친족을 본 듯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진기는, “제가 정월에 길을 떠나서 2월 초길(初吉)440에 이곳에 도착했고 4월 초순쯤에 돌아가게 될 것이니 아마 다시는 보지 못할 듯합니다. 만약 먼저 제가 사는 지방을 지난다면 안정문(安定門)안에 유학(儒學) 진영(陳婦)이란 자가 있는데, 제 아들이니 저의 소식을 전해 주기 바랍니다" 운운하고는 서로 작별하고 떠났습니다.

신 등은 노를 저어 하진창(下津__) 앞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15th Day. At dawn, a violent thunder-storm. In the afternoon, cloudy.

There were some men from Liao-tung- Ch’en Ch'i, Wang Chih, Chang Ching, Chang Sheng, Wang Yung, Ho Yü, and Liu Chieh, who had arrived there previously on commerce. When they heard of our arrival, they brought three pots of refined wine, one plate of sweetmeats, one plate of bean-curd, and one plate of large pancakes and served them to me and my staff. They said, "The site of our city of Liao-tung is adjacent to your country, and we are like a single family. We are fortunate today to have met you on our journey and venture to offer these crude things only as tokens of courtesy.” I said, “Your land was the former capital of old Koguryo, and Koguryo is now the land of my Choson. Though the conditions of rule of the land have changed with the times, it is really the same country. Now, when I am panting from the closest brush with death and a voyage of ten thousand li, and no one I know is around me, to meet you and, moreover, receive your warm kindness are like meeting someone of my own flesh and blood.” Ch’en Ch’i said, “We started out in the First Month and arrived here on the first of the Second Month. In the first ten days of the Fourth Month we shall return home. I am afraid that we shall not be able to meet again. If you pass through my land ahead of me, ask inside An-ting Gate for Ch'en Ying, a Confucian scholar. He is my son. Be good enough to give him word of me.” We took leave of each other and left. We poled the boats to [a point) in front of Hsia-chin-ch'ang and moored them there.

  • 3월 16일

十六日,過武城縣,是日睛,沿河而北,至裴家圈鋪,東為夏津縣地方,西為清河縣地方,過巡檢司、孫家新開口、草廟、黃家口、平河口等鋪, p.420 至渡口驛,又過商家道鋪,至武城縣,河抱城西,隔河有進士二門,又有祈雨堂,徹夜行,至甲馬營驛.

무성현(武城縣)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위하(衛河)를 따라 북쪽으로 가서 배가권포(喪家圈鋪)에 이르니 동쪽은 하진현(夏津縣) 지방, 서쪽은 청하현(淸河縣) 지방이었습니다.

순검사(巡檢司)·손가(孫家)·신개구(新開口)·초묘(草廟)·황가구(黃家口)·평하구(平河口) 등 포를 지나서 도구역(渡口驛)에 이르고, 또 상가도포(商家道鋪)를 지나서 무성현에 이르니 강이 성 서쪽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진사문(進士門) 둘이 있고 또 기우당(祈雨堂)이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가서 갑마영역(甲馬營驛)에 이르렀습니다.

16th Day. Passing Wu-ch’eng County. This day was fair.

[We went from P'ei-chia-chüan Stop past Wu-ch'eng County to Chia-maying Station.]

  • 3월 17일

十七日,晴,朝過鄭家口、河口鋪、陳家口鋪,至恩縣地方,過白馬河口鋪,又過下方遷無谷寺、河口鋪,至梁家莊驛,移轉過鍾閣,夕至故城縣前留泊,臣謂傅榮曰:“今夜月白風便,何以不去?”榮曰:“你見此河中有漂尸三簡乎?”曰:“見之.”榮曰:“此皆盜殺之也,此方連遭匈歉,相率而為盜者多,又不知你等為漂流行李掃地,反以為異邦人必寶貴物,皆有欲利之心,又前路人煙鮮少,盜多肆行,故不去也,”臣曰:“我之此行,已遇寧波府之盜,平生不願相逢者,盜也.”榮曰:“大抵中國人心,北方則强悍,南方則柔順,寧波之盜,江南人也,故雖或為盜,類皆劫而不殺人,你所以保其身也,此北方人,劫則必殺人,或置之溝壑,或漂之河海,今日所見漂屍,可知矣.”

맑았습니다.

아침에 정가구(鄭家口)·하구포(河口鋪)·진가구포(陳家口鋪)를 지나서 은현(恩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백마하구포(白馬河口鋪)를 지나고 또 하방천무곡사(下方遷無谷寺)·하구포(河口鋪)를 지나서 양가장역(梁家莊驛)에 이르러 노를 저어 종각(鐘閣)을 지나 저녁에 고성현(故城縣) 앞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신이 부영에게 말하기를, “오늘밤은 달이 밝고 바람이 순한데 어찌 가지 않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부영이 말하기를,“당신은 강 한복판에 3구의 시체가 떠다니는 것을 보았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보았습니다.”

“이는 모두 도적이 죽인 것입니다. 이 지방은 연이은 흉년[1][2]으로 서로 이끌어 도적이 된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또 당신들이 표류해서 행장을 모조리 잃어버린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이방인은 반드시 귀중한 물건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 여겨 모두 탐내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또 앞길에는 인가가 적고 도적은 많이 횡행하기 때문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이번 길에 영파부(寧波府)에서 도적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평생에 서로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 도적입니다.”

“무릇 중국의 인심은 북방은 억세고 남방은 유순합니다. 영파부의 도적은 강남 사람인 까닭에 비록 도적은 되었을지라도 대부분 약탈만 하고 사람은 죽이지 않으므로 당신이 그 몸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북방 사람들은 약탈하면 반드시 사람을 죽여서 산골짜기에 던져 버리거나 강과 바다에 떠내려 보내기도 합니다. 오늘 떠다니는 시체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7th Day. Fair.

[We went from Cheng-chia-k’ou to Liang-chia-chuang Station and beyond.] In the evening we arrived in front of Ku-ch'eng County and stopped. I said to Fu Jung, “The moon is bright tonight and the wind favorable. Why do we not leave?” Fu Jung said, “Did you see the three corpses floating in this river?” I said, “I saw them.” Fu Jung said, “They were all killed by bandits. This region has suffered successive famines, and many people have been driven into banditry. They do not know that you were set adrift and all your baggage lost. On the contrary, they will take it that as foreigners, you must have valuable things. All of them have greedy hearts. Then, too, on the road ahead settlements are few and scattered, and the bandits are many and reckless. That is why we do not leave.” I said, “On this journey, I have already met bandits from Ning-po Prefecture. The last person I want to meet in my life is a bandit.” Fu Jung said, “In general, the temperament of the Chinese in the north is forceful and violent. In the south it is mild and docile. The Ning-po bandits were men from south of the Yangtze; even though they were of the outlaw type, therefore, they plundered without killing people. That is what saved you. When these northerners plunder, they invariably kill the people. Either they put them in ditches or float them on rivers or the sea. That accounts for the floating corpses we saw today.”

  • 3월 18일

十八日,過德州,是日晴,大風揚沙,平明,過孟家口·兵河口·馬家等鋪、四女樹、文英門、劉皮口鋪、得意門、大浮橋,至安德驟,陳萱問臣曰:“貴國人對客醉用茶否?”臣曰:“用酒不用茶,”萱曰:“我地人對客,皆用茶,若有情厚遠來人,則或有用酒者:”臣問傅榮以上國傘、蓋、冠、帶、帶牌之制,榮曰:“傘與紗帽無等級,蓋則一品·二品茶褐羅表、紅網裏、三舊銀浮屠;三品·四品與前同,而浮屠則紅;五品青羅表、紅網裏、二詹紅浮屠;七·八·九品青油表、紅網裏、單簷紅浮屠,帶則一品玉,二品屋,三品花金,四品光金,五品花銀,六品光銀,七·八·九品角,牌則文職自一品至九品,皆有錫牌,一面(措)(楷]°書所任衛門,一面篆書常川帶四字,皂隸背之,武職有皂隸、衙門,皆佩之,”臣又問“韃靼或有入寇否?”榮曰:“彼時有之,今各邊有分方鎮守,總兵軍馬,常樣守禦,故不得來犯,”夜過德州城,河抱城西而北,城即古平原郡也,土廣人稱,商旅所會,至泊名不知河岸,傅榮謂臣曰:“大上皇帝同母弟有賢德,封鲁地,號魯王,在此德州境三百餘里之地,故時人稱為德王:”臣曰:“德王何以不在京師,在外方乎?”榮曰:“親王在內,恐有他意,故待年十六歲以上者,皆封為王,出之于外:”臣曰:“德王在山東所轄腹裏之地,亦自擅號令政事乎?”榮曰:“王府各司之官掌諸政,有教授之官,有護衛官,王與之講詩書、閱射御而已,號令政事,王不得有為,一出於朝廷,”

덕주(德州)를 지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으나 큰바람이 모래를 날렸습니다.

새벽에 맹가구(孟家口)·병하구(兵河口)·마가(馬家) 등 포와 사녀수(四女樹)·문영문(文英門)·유피구포(劉皮口鋪)·득의문(得意門)·대부교(大浮橋)를 지나서 안덕역(安德驛)에 이르니 진훤이 신에게 묻기를, “귀국에서는 손님을 접대할 적에 차를 씁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술을 쓰지 차는 쓰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손님을 접대할 적엔 모두 차를 습니다. 만약 인정이 두텁고 먼 곳에서 온 사람이 있으면 술을 쓰기도 합니다.”

신이 부영에게 상국(上國)의 산(傘), 개(蓋), 관(冠), 대(帶), 대패(帶牌)의 제도를 물으니

부영이 말하기를, “산(傘)과 사모(紗帽)는 등급이 없습니다. 개(蓋)44는 1품과 2품은 겉이 다갈라(茶褐羅)442이고 안이 홍초(紅箱)443로서 삼첨은부도(三舊銀浮屠)444이고, 3품과 4품은 앞의 것과 같지만 부도(浮屠)가 홍색이고, 5품은 겉이 청라(靑羅)이고 안이 홍초(紅)로서 이첨홍부도(二簷紅浮屠)이고, 7품 · 8품 · 9품은 겉이 청유초(靑油箱)이고 안이 홍초(紅狗)로서 단첨홍부도입니다. 띠는 1품은 옥대(玉帶), 2품은 서대(犀帶), 3품은 화금(花金), 4품은 광금(光金), 5품은 화은(花銀), 6품은 광 은(光銀), 7품 · 8품 · 9품은 각대(角帶)입니다. 패(牌)는 문관직(文官職)은 1품에서 9품까지는 모두 석패(錫牌)를 갖는데, 한 면에는 임명받은 위문(衛門)을 해서(楷書)로 쓰고, 한 면에는 상천현대(常川懸帶)445란 네 글자를 전서(篆書)로 써서 조예(自隸)446가 이를 짊어지고, 무관직(武官職)으로 조예(自隸)와 아문(衙門)이 있는 자 모두 이를 차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달단(薩)447이 침범하여 오기도 합니까?”

“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각 변방에서 구역을 나누어 진수(鎭守)가 군마(軍馬)를 통할하며 늘 지키고 있기 때문에 침범하지 못합니다.”

밤에 덕주성(德州城)을 지났는데 강은 성 서쪽을 둘러싸서 북쪽으로 흘렀습니다.

덕주성은 곧 옛날의 평원군(平原郡)으로서 토지는 넓고 사람은 조밀하였으며 상인들이 모여드는 곳이었습니다.

이름을 모르는 강 언덕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부영이 신에게 말하기를, “태상황제(太上皇帝)의 동모제(同母弟)가 덕망이 높았는데 노(魯) 지방에 봉함을 받고 노왕(魯王)이라 칭하여 이 덕주의 300여 리의 땅에 있었던 까닭에 당시 사람들이 '덕왕(德王)448'이라 불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덕왕은 무슨 이유로 경사에 있지 않고 외지에 있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친왕(親王)449 이 경사에 있으면 다른 뜻이 있을까 염려하는 까닭에 그들의 나이 16세 이상이 되기를 기다려서 모두 왕으로 봉하여 외지로 내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산동에 있는 덕왕이 관할하는 곳은 복심(腹心)의 땅인데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습니까?”

“왕부(王府)의 각 관사(官司)의 관원이 정사를 관장하고 교수(敎授)하는 관원도 있고 호위하는 관원이 있어, 왕은 그들과 함께 시서(詩書)를 강론하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사열할 뿐입니다. 정사를 호령하는 일은 왕이 할 수 없고 모두 조정에서 나옵니다.”

18th Day. Passing Te-chou. This day was fair; high winds blew up sand.

[We went from Meng-chia-k'ou to An-te Station.] Ch’en Hsüan asked me, “Do the people of your country use tea to exchange drinks with their guests?” I said, “They use wine, not tea.” Ch'en Hsüan said, “All my countrymen use tea for guests. For people from far away for whom they have deep affection, some may use wine.” I asked Fu Jung, “In China, what are the regulations for umbrellas, hats, belts and belt tablets?” Fu Jung said, “For umbrellas and light silk gauze hats, there are no categories. As to kai umbrellas, the First and Second Ranks have yellowish-black gauze coverings, red raw silk linings, three tiers and silver spires. The Third and Fourth Ranks have the same, but the spires are red. The Fifth Rank has blue gauze coverings, red raw silk linings, two tiers and red spires. The Seventh, Eighth, and Ninth Ranks have blue, oiled, raw silk coverings, red raw silk linings, one tier and red spires.90 “As to the belts, the First Rank has jade, the Second Rank rhinoceros [horn), the Third Rank inscribed gold, the Fourth Rank burnished gold, and the Fifth Rank inscribed silver, the Sixth Rank burnished silver, and the Seventh, Eighth, and Ninth Ranks horn.91 “As to tablets, all the civil officials from First to Ninth Rank have pewter tablets. On one side the office in which one serves is written in square style, and on the other side the four words“Attached for all time,' are written in seal characters. Lictors carry them. All military officers for whom there are lictors and offices wear them.” I asked, “Sometimes do the Tatars make raids?” Jung said, “Formerly they did, but now there are grand defending regional commanders on each border. The infantry and cavalry are constantly on guard, and [the Tatars], therefore, do not get in to raid.” | At night we passed the wall of Te-chou. The river curved round west of the wall and then went north. The city had been the old P’ing-yuan-chün. It was a big place, crowded with people, and travelling merchants gathered there. We came to a river bank, the name of which I do not know, and stopped. Fu Jung said to me, “A younger brother of the previous Emperor, being virtuous, was enfeoffed in Lu and entitled Lu Wang, with a territory of over three hundred li within the borders of this Te-chou. That is why men of the time called him Te Wang.??92 I said, “Why did Te Wang live outside instead of inside the capital ?”! Fu Jung said, “If princes of the blood were inside, disloyalty would be feared. When they are sixteen, therefore, they are all enfeoffed as princes and put outside.” I said, “With Te Wang in Shantung, he dominated a strategic area. Did he also on his own authority administer public affairs?” Fu Jung said, “Officials of the offices of the Prince's Palace [Wang-fu] take charge of palace affairs only. There are an education official and a defense official. With them the Prince discusses literature and reviews archery and charioteering, but that is all. The Prince has nothing to do with administering public affairs, which are all directed from the Court.”

  • 3월 19일

十九日,過良店驛,是日晴,早發過皮口鋪、高家鳳鋪,至吳橋縣地方,又過羅家口、高官廠等鋪、關王廟,至濟南府地方良店驛,又過桑園兒、薄皮口鋪、狼家口鋪、郭家口鋪、舊連窩鋪,至連篇驛,又至連窩遞運所而泊,

양정역(良店驛)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일찍 출발하여 피구포(皮口鋪)·고가봉포(高家鳳鋪)鋪)를 지나서 오교현(吳橋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나가구(羅家口)·고관창(高官廠) 등 포와 관왕묘(關王廟)를 지나서 제남부(濟南府) 지방의 양점역(良店驛)에 이르렀습니다.

또 상원아(桑園兒)·박피구포(薄皮口鋪)·낭가구포(狼家口鋪)·곽가구포(郭家口鋪)·구련와포(舊連窩鋪)를 지나서 연와역(連高驛)에 이르렀다가 다시 연와체운소(連窩遞運所)에 이르러 숙박하였습니다.

19th Day. Passing Liang-tien Station. This day was fair.

[We went from P’i-k’ou Stop past Liang-tien Station to Lien-wo Transfer Station and stopped there.]

  • 3월 20일

二十日,晴,曉過王家口鋪,至景州地方任家口鋪,又過東光縣,縣治在河之東岸,又過油房口鋪、北下口鋪,至南皮縣地方,過北下淺鋪,又至交河縣地方,過曹道灣、薄頭鎮,至新橋,又過鎮武廟、藥王廟、戚家女医軍屯,夜二更,至泊薛家窩里前.

맑았습니다.

새벽에 왕가구포(王家口鋪)를 지나서 경주(景州) 지방의 임가구포(任家口__)에 이르렀습니다. 또 동광현(東光縣)을 지났는데 현치는 강의 동쪽 언덕에 있었습니다. 또 유방구포(油房口鋪)·북하구포(北下口鋪)를 지나서 남피현(南皮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북하천포(北下淺鋪)를 지나서 또 교하현(交河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조도만(曹道灣)·박두진(薄頭鎭)450을 지나서 신교(新橋)에 이르고 또 진무묘(眞武廟) · 약왕묘(藥王廟)452. 척가언군둔(戚家堰軍屯)을 지나서 밤 2경에 설가와리(薛家窩里) 앞에 이르러 숙박하였습니다.

20th Day. Fair.

We went from Wang-chia-k’ou Stop to Hsüeh-chia-wo Village and stopped there.]

  • 3월 21일

二十一日,過滄州,是日晴,早過三鎮道、馮家口、楊橋口、磚河南、戴河南口等鋪,至河驛,又過王家圈口·羅家圈口紅披口·南關等鋪、長盧巡檢司、鹽運司、遞運所、睡武科門,到滄州搬夫廠,州城臨河之東岸,即漢之渤海郡也,河邊有望上懸人頭以示眾,傅榮謂臣曰:“彼乃强盗首也,漢之巢遂以單車,入此地平墓盜,有賣買牛之說,此地盗多劫殺人,自昔猶然,”又過聯芳、應奎、司練等門,至泊長蘆遞運所前,臣問諸傅榮曰:“自過淮河以後,若兵部、刑部、吏部等各司之官之紅,絡繹不絕,何也?”榮曰:“今天子聖明,朝臣以舊日所為,或致小過者,皆降貶之,河路中帶錫牌而歸者,皆見貶下鄉朝士也,前日在紹興府,問你所從來之總兵官黃宗,亦貶罷歸,”臣曰:“朝臣貶秩者多,何以不斥官寺之徒,使得意以行?”榮曰:“宦官見殺降貶者,亦不可勝計,今在河進京者,皆先帝所差,回則亦難保,前日相見太監羅公、公,皆因回遲,貶作奉御之職,”臣曰:“當今天下,再得堯舜之君,學元凱,點四匈,朝廷肅清,四海安帖,不亦賀乎?”榮曰:“正是正是,我皇帝遠之者,小人與宦官也,日親經筵,與閣老學士講詩書、論政事,疊疊不已,以今三月初九日,躬幸國子監,釋奠先聖,崇儒重道之意亦至矣.”臣戲之曰:“天子亦拜於列國之臣乎?”榮曰:“孔子,萬世之師,豈以人臣之禮待之乎?但天子當釋奠時,贊禮官曰:“鞠躬拜,天子欲拜,傍又有一贊禮官曰:孔子會為魯司寇,贊禮官又唱曰:平身,禮當拜而實不拜,此尊先師尊天子之禮,兩不悖也,”臣曰:“孔子之道,大於天地,明於日月,信於四時,達之天下萬代而無窮,卿、大夫、士、庶人學其道,以修其身,諸侯學其道,以治其國,天子學其道,以平治天下,則自天子以至於庶人,皆當事以先聖先師之禮,又何舉魯司寇之稱,當拜而不拜乎?若舉司寇以稱孔子,則孔子是一小國陪臣,又安可屈天子之學以記之乎?”榮嘿然,夜間榮又來語臣曰:“方才中來者言:有一尚書與一學士對立,不知所言,校尉拿告于天子,命下錦衣衛,監問所言何事,學士身居內(閣)(閣], 至尊有大小事,皆與議,今與尚書相對言,尤恐有私囑,故問之!”

창주(滄州)를 지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아침 일찍 삼진도(三鎭道)·풍가구(馮家口)·양교구(楊橋口)·전하남(磚河南)·전하남구(磚河南口) 등 포를 지나서 전하역(III河驛)에 이르렀습니다.

또 왕가권구(王家圈口)·나가권구(羅家圈口)·홍피구(紅技口)·남관(南關) 등 포와 장로순검사(長蘆巡檢司)·염운사(鹽運司)453. 체운소(遞運所)·종무과문(腫武科門)을 지나서 창주발부창(滄州撥夫__)에 도착하였습니다.

창주성(滄州城)은 강의 동쪽 언덕에 접하여 있으니 곧 한(漢) 나라 때의 발해군(渤海郡)이었습니다.

운하가에는 장대 위에 사람의 머리를 매달아 놓고 여러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바라보였습니다.

부영이 신에게 말하기를,

“저것은 강도의 머리입니다. 한(漢)나라의 공수(襄遂)454가 단거(單車)로 이 지방에 들어와서 도적 떼를 평정하여 '칼을 팔아 소를 산다'455는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지방 도적이 사람을 약탈하고 죽이는 일이 많은 것은 옛날부터 그러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또 연방문(聯芳門)·응규문(應奎門)·사간문(司諫門) 등을 지나서 장로체운소(長盧遞運所) 앞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신은 부영에게 묻기를, “회하를 지난 뒤부터 병부 · 형부 · 이부 각 관사(官司) 관원의 배가 계속 이어지고 끊이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천자께서 영명하시어 조신(朝臣)들 중 지난날의 잘못된 행위나 작은 과오를 범한 자들도 모두 강직(降職)하거나 폄출(貶點)시키고 있습니다. 운하에서 석패(錫牌)를 차고 돌아가는 사람은 모두 폄직되어 고향으로 내려가는 조신들입니다. 전일에 소흥부에서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심문했던 총병관 황종도 평직되어 돌아갔습니다.”

“조신들 중에는 폄직된 사람이 많은데, 어찌하여 환관의 무리들을 물리치지 않아 마음껏 행세하게 합니까?”

“환관들 중에도 죽임을 당하고 강직되고 폄출된 사람 또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지금 운하로 경사에 가는 사람들은 모두 선제(先帝)께서 파견하셨던 자들이지만 돌아가면 또한 보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전일에 만났던 태감 나공(羅公)과 섭공(公)도 모두 늦게 돌아갔다는 이유로 봉어(奉御)456의 직으로 평직되었습니다.”

“지금 천하가 다시 요순(堯舜) 같은 군주를 만나서 원개(元凱)457 같은 이가 등용되고 사흉(四凶)458 같은 이가 폄출되어 조정은 맑아지고 사해(四海)는 편안해졌으니 또한 경하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고 말고요. 우리 황제께서 멀리하시는 자는 소인과 환관입니다. 날마다 경연(經筵)459에 몸소 나아가 꾸준히 각로학사(__老學士)460들과 시서(詩書)를 강론하고 정사(政事)를 의논해 마지 않으십니다. 지난 3월 9일에는 몸소 국자감(國子監)에 행차하여 선성(先聖)462에게 석전례(釋奠禮)를 거행하셨으니 유교를 숭상하고 도학(道學)을 존중하는 뜻이 또한 지극합니다.”

신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천자께서도 열국(列國)의 신하에게 절을 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공자는 만세의 스승인데 어찌 신하의 예절로 대우하겠습니까? 다만 천자가 석전례를 거행할 때에 찬례관(贊禮官)463이 몸을 굽혀 절하시오'라 하면 천자께서 절하시려 합니다. 그럴 때 옆에 있는 또 다른 찬례관이 공자는 일찍이 노나라 사구(司寇)였습니다'라 하면, 찬례관이 또 소리를 높여 몸을 펴시오(平身]라고 합니다. 예(禮)로는 당연히 절해야 하는데도 실상은 절하지 않는 것이니, 이는 선사(先師)를 높이고 천자를 높이는 예로서, 양 쪽 모두 어긋나지 않은 것입니다.”

“공자의 도(道)는 천지보다 크고 일월보다 밝으며 사시보다 믿음성이 있어 천하 만세로 두루 미쳐서 다함이 없습니다. 경대부(卿大夫)와 사서인(士庶人)은 그 도를 배워서 몸을 닦고, 제후는 그 도를 배워서 나라를 다스리고, 천자는 그 도를 배워서 천하를 다스리니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땅히 선성(先聖)과 선사(先師)를 대하는 예절로 섬겨야 할 것인데, 또한 노나라 사구란 칭호를 들어서 당연히 절해야 할 것인데도 어찌 절하지 않는 것입니까? 만약 사구를 들어서 공자를 일컫는다면 공자는 한 소국의 배신(臣)465인데 또한 어찌 천자의 존엄함을 굽혀서 그에게 제사하겠습니까?”

부영은 말이 없었습니다.

밤에 부영이 또 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방금 북경에서 온 사람이 하는 말이 "어느 상서(尙書)와 어느 학사(學士)가 마주서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데, 교위(校尉)467가 천자께 알리니 천자께서 금의위(錦衣衛)에 내리어 무슨 말을 했는지 심문하도록 명하셨다고 합니다. 학사는 몸이 내각(內閣)에 있으며 지존(至尊)468께서 크고 작은 일을 모두 그와 더불어 의논하시는데, 지금 상서와 서로 마주 서서 말하니 사사로운 청탁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여 이를 심문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21st Day. Passing Ts'ang-chou. This day was fair.

[We went from San-chen-tao Stop to a workers' quarters of Ts’ang-chou.] The wall of the department overlooked the east bank of the river. [The place] had been the Po-hai-chün of Han. At the edge of the river, a man's head fastened on top of a pole was displayed to all. Fu Jung said to me, “That is the head of a notorious bandit. Kung Sui of Han came to this land in a single carriage and subdued all the bandits. 93 There is a story that they sold their swords and bought oxen. “The bandits here plunder much and kill people, and it has been so since olden times.” We passed Lien-fang, Ying-k’uei, and Ssu-chien gates, came to Ch’ang-lu Transfer Station, and stopped in front of it. I asked Fu Jung, “Ever since we passed the Huai River there has been a steady line of boats of officials from the various bureaus of the Ministries of War, Punishments, and Personnel. Why?” Fu Jung said, “Because some of the ministers of the Court may have made small errors in what they did in former days, the present Emperor in his wisdom is dismissing them all. All those who are carrying pewter tablets and going the other way in the river are ministers of the Court who have been dismissed and are going to their homes. Even Huang Tsung, the Regional Commander who asked you about your past the other day at Shao-hsing Prefecture, has been dismissed and gone home.” I said, “If many court ministers are being degraded, why does [the Emperor] not dismiss the eunuchs instead of letting them have their way?” Fu Jung said, “Eunuchs are also being executed and dismissed beyond number. All those now going to the capital on the river were commissioned by the previous Emperor. It is difficult to say what will happen to them when they go back. Both his Excellency Lo and His Excellency Nieh, the Overseers you met previously, have been degraded to the position of valet because they were slow in returning.” I said, “Now the Empire has got again a ruler like Yao and Shun. He elevates good men and dismisses wicked ones. The Court is calm, and the Four Seas are steady. Shall we not give praise ?”' Fu Jung said, “Quite so, quite so. The ones our Emperor keeps at a distance are the petty men and the eunuchs. He attends the exposition of the Classics daily and discusses literature and government with the chief ministers and scholars. He keeps it up without tiring. On the 9th Day of the Third Month he attended personally the National University and sacrificed to Confucius, which shows indeed that he honors the Confucian scholars and the Way.” Joking, I said, “Does the Emperor bow to a subject of a feudal state?” Fu Jung said, “Confucius was the teacher of all ages; how could the Emperor treat him like a subject? But when the Son of Heaven attends the sacrifice to Confucius, a master of ceremonies says, 'His Majesty will bow.' The Son of Heaven is about to bow when from the side another master of ceremonies says, 'Confucius was Criminal Judge of Lu.' The master of ceremonies then calls out, ‘His Majesty is excused from bowing.' He is supposed to bow but actually does not. Thereby the ceremony honors Confucius and the Son of Heaven with slight to neither.” I said, “Confucius' Way is greater than heaven or earth, brighter than the sun or moon, and more constant than the four seasons. It persists endlessly through all ages of the world. If the officials, gentry, scholars, and common people study his Way to train themselves; and the nobles study his Way to govern their states; and the Emperor studies his Way to put the world to order, all, from the Emperor to the common people, must pay homage through the Rite to Confucius. Why do you say the name ‘Criminal Judge of Lu,' and, ‘His Majesty need not bow?' If you use Criminal Judge to designate Confucius, that makes Confucius the secondary minister of a minor state. Then how can you humble the Emperor with such a sacrifice?" Fu Jung was silent. | At night Fu Jung came again and spoke to me. “Someone who recently came from the capital says that a minister (shang-shu] and a grand secretary [hsüeh-shih] were standing face to face and talking, it was not known about what. A captain of the police arrested them and reported it to the Emperor. They were ordered to be sent down to the Superintendent of the Imperial Bodyguard94 for questioning on the subject of their talk. The grand secretaries are in the Cabinet [Nei-ko], and the Emperor discusses all matters, large and small, with them. When this one talked intimately with a minister, then, it was greatly feared that there might be collusion for selfish ends. That is why they were questioned.”

  • 3월 22일

二十二日,過興濟縣,是日陰,曉過安都(塞)(寨](口)鋪、清水王家口鋪,至乾寧驛,興濟縣之治,在驛之後,驛前有巨家,陳萱曰:“此 新皇后張氏之私弟也,初 新皇帝為皇太子時,欽天監奏:“后星照河之東南,先帝命選河東南良家女子三百餘人,皆聚京師,先帝與皇太后更選,張氏中選,封為正后,后之祖,知鳳陽府,父無職,舊為國子監生,今特拜為都督”云,過左衛鋪、柳巷口鋪、三聖祠”、盤古廟、高士圖,至蘆臺舊城,城北接青縣之治,俱在河之西北岸,縣前通真、保定、流三河所會,故謂之三叉,又過鍾樓閣、社稷壇、峭帆亭、中州集,至河間府地方,府城在河之北七八里許,又至流河驛,日已昏膜,過流河鋪,夜二更,至泊夏官屯.

흥제현(興濟縣)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새벽에 안도채포(安都寨鋪)469 - 청수왕가구포(淸水王家口鋪)470를 지나서 건녕역(乾寧驛)에 이르니 흥제현의 현청은 건녕역(乾寧驛) 뒤에 있었습니다.

건녕역 앞에 큰집이 있었는데 진훤이 말하기를,

“이것은 새 황후 장씨(張氏)의 사저입니다. 전에 새 황제께서 황태자로 있을 적에 흠천감(欽天監)이, '황후의 별이 황하의 동남방에 비칩니다'라 아뢰니 선제께서 황하 동남방의 양가 규수 300여 인을 뽑아 모두 경사에 모이도록 명하셨습니다. 선제께서 황태후와 함께 다시 선발한 결과 장씨가 이에 뽑혀 정후(正后)가 되었습니다. 황후의 조부는 봉양지부(鳳陽知府)이었고 부친은 관직은 없고 전에 국자감생(國子監生)473이었는데, 지금은 특별히 도독(都督)으로 배수되었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좌위포(左衛鋪)·유항구포(柳巷口鋪)·삼성사(三聖祠)474. 반고묘(盤古廟)·고토강(高土崗)을 지나서 노대(蘆臺)의 옛 성476에 이르니, 성은 북쪽으로 청현(靑縣)의 현청에 접해 있으며 모두 강의 서북쪽 언덕에 있었습니다.

청현의 앞은 통진하(通眞河)·보정하(保定河)·호타하(淳施河)477의 세 강물이 만나는 곳이므로 '삼차(三叉)'라고 불렀습니다.

또 종루각(鐘樓閣)·사직단(社稷壇)·초범정(啪帆亭)·중주집(中州集)을 지나서 하간부(河間府) 지방에 이르니 하간부성(河間府城)은 강의 북쪽 7-8리쯤에 있었습니다.

또 유하역(流河驛)에 이르니 날이 벌써 어두웠습니다.

유하포(流河鋪)를 지나서 밤 2경에 하관둔(夏官屯)478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22nd Day. Passing Hsing-chi County. This day was cloudy.

At dawn we passed An-tu-sai-k’ou Stop and Ch’ing-shui-wang-chia-k’ou Stop and came to Ch’ien-ning Station. The seat of Hsing-chi County was behind the station, in front of which was a huge house. Ch'en Hsüan said, “That is the private house of the new Empress, née Chang. At first, when the new Emperor was Crown Prince, the Directorate of Astronomy memorialized that the star of the Empress shone southeast of the Yellow River. The previous Emperor ordered that over three hundred daughters of good families southeast of the Yellow River be selected and assembled at the capital. The former Emperor and the Empress Dowager made a further selection, and Miss Chang was chosen and made Empress. The Empress's grandfather was Prefect of Feng-yang Prefecture. Her father did not hold office but formerly was a student in the National University. Now he has been made a general.” [We went from Tso-wei Stop to Hsia-kuan-t’un and stopped t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