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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23일 (목) 09:00 기준 최신판

홍의교회

강화 두번째 개신교 교회. 교산교회 설립 3년 후인 1896년에 설립되었다. 이 마을 서당훈장이던 박능일이 교산교회의 김상임을 만나고 돌아와 자기 집(상도리 958번지)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되었다. 서당학생 20여 명, 종순일, 권신일과 함께 자기 집에서 홍의교회를 설립했다. 홍우, 홍해, 삼해라고도 불렸다. 구한말 제물포에 남, 여 매일학교가 하나씩 밖에 없었는데 강화 홍의교회에도 하나가 있었다. 1898년 교회 출석인 고씨부인이 별세했을 때 곡하지 않고 찬송가를 부르며 비석대신 십자패를 세웠다. 선원, 길상, 석모도, 주문도, 성검도, 영정도, 인천 등지에 전도하던 교회다.

인물

김상임 전도사의 개종 소식을 듣고 따지러 갔다가 박능일도 개신교에 감화되어 개종하게 되었다. 그는 서당을 운영하던 훈장이었다. 개종 이후 그의 서당은 근대 학교로 변모하였고 토담집은 예배당으로 바뀌어 자립적인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1년도 채 안 되어 예배 출석 인원이 80명에 육박했다. 일자 개명을 처음 한 인물로 인천 제물포 영화학당 교사이기도 했다. 1900년 12월 평양신학회에서 전도사 과정 이수후 잠두교회에서 1901년 4월 1903년 2월까지 담임으로 시무했다. 존스 목사와 함께 잠두의숙을 설립했다. 1903년 3월 1일 별세. 당시 <신학월보>는 '기둥같은 선생을 잃었다'고 논평하였다.

홍의교회 신자 중 종순일은 <마18:23-35>의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읽고 나서 자신의 구원을 1만 달란트빚을 탕감받은 자로 여겼다. 그는 당시 마을에서 부자여서 많은 사람이 그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사람들을 한 마당에 모았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빚문서를 불태웠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제 여러분들은 제게 빚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선포 했다. 그리고 가산을 다 팔아서 강화도 근처의 섬들을 돌며 전도활동을 했다. 그는 예수를 믿고 삶을 뒤집어 버렸다. 부자가 가난한 자가 되어 복음 하나만 들고 섬들을 찾은 것이다. 이는 대한그리스도인 회보. 1900년 6월 6일자에 소개되었다. [1]

참고

  1. 출처: [홍의교회 이야기. 아이굿뉴스_기독교연합신문.2012.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