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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화평화전망대는 남한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북한 주민의 생활상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곳으로 민족 동질성 회복과 평화적 통일의 기반구축을 위한 문화관광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민통선북방지역에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건립되어 | ||
+ | 2008년 9월 5일 개관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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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방 약2.3㎞ 해안을 건너 예성강이 흐르고, 좌측으로는 황해도 연안군 및 백천군으로 넓게 펼쳐진 연백평야가 있고 우측은 개풍군으로 북한주민의 생활모습과 선전용 위장마을, 개성송수신 탑, 송악산 등을 조망할 수 있어 타 지역에선 보기 힘든 북한의 문화생태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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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반도 분단'''=== | ||
+ |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자신들의 영향력 증대를 먼저 고려한 것은 냉전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당시 여론은 좌우 합작을 통한 중도적인 통일정부의 수립이었다. 이북을 김일성이 장악하고 남측에서는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천명하자 중도 정치 세력들은 1946년 7월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이로 인해 좌우 합작은 결렬되었다.[12] 한편, 일본 관리들을 모조리 쫓아낸 소비에트 연방은 6개월 군정을 무사히 마친 후, 1946년 2월 16일에 북쪽에는 이미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설립되었으며 2년간 계속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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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년이 되자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본격화되었고 유엔에서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의결되자 분단을 반대하던 민족주의 정치가들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한국독립당의 김구와 민족자주연맹을 조직한 김규식 등은 남북의 모든 정치세력이 평양에 모여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열 것을 제안하였다. 김일성은 이 대회를 이북 정권의 정당성 확보의 장으로 이용하려 하였다. 이후 김구는 5·10 단독 선거에 불참하면서 통일 국가의 수립을 역설하였으나 뜻을 실현하지 못한 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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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정부 수립을 선포하여 일제에서해방을 알렸으나 9월 9일에는 북한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어 한반도는 공식적인 분단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 ||
+ | <ref>[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B%B0%98%EB%8F%84_%EB%B6%84%EB%8B%A8]</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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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쟁'''=== | ||
+ | 6.25 남침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이 '폭풍'이라는 작전명으로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남한을 선전포고도 없이 무단으로 남침[19]하면서 발발한 전쟁으로, 유엔군과 중국 인민지원군 등이 참전한 국제적 대리전으로 비화되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 3년 1개월 간 이어졌다. 이후 남북한 모두 준 전시상태를 유지하며 군사적 대치를 이어갔으며, 세계사에 유례없이 긴 휴전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진기록을 실시간으로 갈아치우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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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차 세계 대전 종결과 함께 전개된 냉전 구도가 열전(熱戰)으로 폭발하게된 사례중 하나로 꼽히며,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었던 미국-영국-프랑스-소련-중국이 직간접적으로 전쟁을 벌인 사례이기도 하다. 간혹 이 전쟁으로 인해 분단된 것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으나 그 이전부터 남북은 이미 별개의 정권으로 분단돼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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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편으로 일본이 경제적으로 크게 부흥하였고, 국공내전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에 내몰린 중화민국이 살아나는 등 주변국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침략자로 규정된 중화인민공화국은 20년 넘게 고립을 면하지 못했다. | ||
+ | <ref>[https://namu.wiki/w/6.25%20%EC%A0%84%EC%9F%81/%EB%8C%80%EC%B2%B4%EC%97%AD%EC%82%AC]</ref> | ||
=='''시각자료'''== | =='''시각자료'''== |
2019년 5월 23일 (목) 06:33 판
강화평화전망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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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명칭 | 강화평화전망대 |
영문 명칭 | Ganghwa Peace Observatory |
주소 |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전망대로 797 |
위도 | 37.826693 |
경도 | 126.433188 |
목차
개관
한국어
육안으로 살펴볼 수 있는 북녘, 그리고 북녘 땅의 사람들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던 강화군 양사면 민간인 통제선 북방지역에 위치한 강화평화전망대는 북한의 문화를 아주 가까이에서 느끼고 비교할 수 있는 곳이다. 전방 약2.3㎞ 해안
을 건너 예성강이 흐르고, 좌측으로는 황해도 연안군 및 백천군으로 넓게 펼쳐진 연백평야가 있고 우측은 개풍군으로 북한주민의 생활모습과 선전용 위장마을, 개성송수 신 탑, 송악산 등을 조망할 수 있어 타 지역에선 보기 힘든 북한의 문화생태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강화평화전망대는 지하 1층과 지상 4층 규모로 지하층과 4층은 군부대 전용시설이다. 1층에는 강화특산품과 북한의 특산물 등을 판매하는 토산품 판매장과 식당, 관리사무실, 게스트 룸이 있다. 이산가족의 한을 달래고 통일을 염원하는 의미에서 설치된 디지털 나무도 있는데 여행객들의 소망을 담은 종이를 매달아 놓는 통일염원소 역할을 한다. 2층에서는 남북한의 군사력을 비교한 자료와 6.25 전쟁 당시의 배경, 그 이후의 피해 상황 등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3층의 전망대에서는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와 있는 북한의 산하를 볼 수 있다. 또한 야외망배단이 설치되어 북한에 고향을 두고 온 이산가족들이 고향을 바라보며 조상들에게 제를 올릴 수 있도록 상시 개방하고 있다.
[1]
영어
Ganghwa Peace Observatory, which is a building with 1 story below ground and 4 stories above ground, was constructed on the forest land in the northern area of the Civilian Passage Restriction Line at Cheolsan-ri Yangsa-myeon. It can be recalled that the entry to this area was once strictly prohibited for the general public since the end of 2006. Since its public opening on September 5, 2008, it has been providing accessibility to visitors for them to get an in-depth look on the unique cultural ecosystem of North Korea that may not be experienced in other areas.
The basement and the 4th floor space are exclusively used for military purposes. The 1st floor space is used for restaurants, administration offices, guest rooms and specialty shops selling specialty goods originated from Ganghwa and North Korea. The 2nd floor space is equipped with a high-performance telescope that enables a visitor to view images such as ‘Defense Experience at Ganghwa’ that depicts the traces and misery of war, ‘Endless War and We, the Korean Race’ that reminds the visitors about the provocation of North Korea, Comparison of Military power between South and North, and Unification Policy, ‘Way to Unification’ that enables the visitors to relive the experience of the trip to North Korea. Aside from the high-performance telescope, there is also an image providing device that shows a variety of images including the background of Korean War at that time, the process of occurrence of wars at home and abroad, and the damage sustained due to the war. At the 3rd floor, there is an observatory facility where the visitors can view the exquisite sceneries offered by the mountains and rivers. Being equipped with a highly advanced screen, this observatory facility is very much capable such that the feather of North Korea can be easily seen through the image even in bad weather condition.
Looking from this observatory, the Yesung River runs approx. 2.3 km ahead of it across the seashore while the Aegi-bong observatory in Gimpo, Odu-san Unification Observatory in Paju and Ilsan New Territory are located at its right side bordered with Gaesung Industrial Complex, Imjin River/Han River Junction area, and Nadul Island (Expected to be placed). On its left side, you can find Yeonbaik-gun, the place where you can observe the feature of life of the North Korean residents, the disguised village for propagation, Gaesung Industrial Complex Tower, Mt. Songak, a variety of barracks, etc.[2]
러시아어
Обсерватория мира Ганхва
'Обсерватория мира', расположенная в северной части Ганхва-гуна, где общественный доступ строго контролируется, - это место, где люди могут максимально близко почувствовать и сравнить культуры Северной и Южной Кореи. Обсерватория находится на расстоянии около 2,3 км от берега и пересекает побережье реки Йесунг. С левой стороны - равнина Йонгбонг, которая широко распространена на острове Хванхэ и Пэкчеон, с правой стороны - Кёнхё-гун, где можно увидеть образ жизни Северной Кореи, пропагандистский камуфляжный поселок, Новую башню Гэсон Сонгсу и гору Сонгак. Это место, где вы можете почувствовать культурную экологию Северной Кореи, которую трудно увидеть в других областях. Обсерватория мира Ганхва имеет один подземный и четыре надземных этажа. Подземный и 4-й этажи посвящены воинским частям. На первом этаже расположены сувенирные магазины, кафетерий, офис управления и гостевая комната, где представлены сувениры и фирменные блюда из Северной Кореи. Есть также цифровое дерево, установленное с целью поддержания разлученных семей, а также выражающее желание народа в объединении двух Корей. На данное дерево вешаются бумажные листы, содержащие пожелания путешественников по отношению к объединению корейского полуотсрова. На втором этаже вы можете увидеть данные, сравнивающие военную мощь двух Корей, предысторию Корейской войны и нанесенный ущерб.
На смотровой площадке на третьем этаже вы можете увидеть горы Северной Кореи. Кроме того, при обсерватории имеется открытая зона, предназначенная для того, чтобы члены разлученных семей могли совершить обряд помянания предков, оставшихся в Северной Корее.
지도
해설
강화평화전망대는 남한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북한 주민의 생활상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곳으로 민족 동질성 회복과 평화적 통일의 기반구축을 위한 문화관광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민통선북방지역에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건립되어 2008년 9월 5일 개관하였다.
전방 약2.3㎞ 해안을 건너 예성강이 흐르고, 좌측으로는 황해도 연안군 및 백천군으로 넓게 펼쳐진 연백평야가 있고 우측은 개풍군으로 북한주민의 생활모습과 선전용 위장마을, 개성송수신 탑, 송악산 등을 조망할 수 있어 타 지역에선 보기 힘든 북한의 문화생태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한반도 분단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자신들의 영향력 증대를 먼저 고려한 것은 냉전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당시 여론은 좌우 합작을 통한 중도적인 통일정부의 수립이었다. 이북을 김일성이 장악하고 남측에서는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천명하자 중도 정치 세력들은 1946년 7월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이로 인해 좌우 합작은 결렬되었다.[12] 한편, 일본 관리들을 모조리 쫓아낸 소비에트 연방은 6개월 군정을 무사히 마친 후, 1946년 2월 16일에 북쪽에는 이미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설립되었으며 2년간 계속되었다.
1947년이 되자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본격화되었고 유엔에서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의결되자 분단을 반대하던 민족주의 정치가들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한국독립당의 김구와 민족자주연맹을 조직한 김규식 등은 남북의 모든 정치세력이 평양에 모여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열 것을 제안하였다. 김일성은 이 대회를 이북 정권의 정당성 확보의 장으로 이용하려 하였다. 이후 김구는 5·10 단독 선거에 불참하면서 통일 국가의 수립을 역설하였으나 뜻을 실현하지 못한 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정부 수립을 선포하여 일제에서해방을 알렸으나 9월 9일에는 북한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어 한반도는 공식적인 분단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3]
한국전쟁
6.25 남침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이 '폭풍'이라는 작전명으로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남한을 선전포고도 없이 무단으로 남침[19]하면서 발발한 전쟁으로, 유엔군과 중국 인민지원군 등이 참전한 국제적 대리전으로 비화되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 3년 1개월 간 이어졌다. 이후 남북한 모두 준 전시상태를 유지하며 군사적 대치를 이어갔으며, 세계사에 유례없이 긴 휴전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진기록을 실시간으로 갈아치우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과 함께 전개된 냉전 구도가 열전(熱戰)으로 폭발하게된 사례중 하나로 꼽히며,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었던 미국-영국-프랑스-소련-중국이 직간접적으로 전쟁을 벌인 사례이기도 하다. 간혹 이 전쟁으로 인해 분단된 것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으나 그 이전부터 남북은 이미 별개의 정권으로 분단돼 있었다.
한편으로 일본이 경제적으로 크게 부흥하였고, 국공내전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에 내몰린 중화민국이 살아나는 등 주변국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침략자로 규정된 중화인민공화국은 20년 넘게 고립을 면하지 못했다. [4]
시각자료
사진
영상
- 연합뉴스, "[6]"
가상현실
출처
기여
일자 | 역할 | 이름 | 전공 |
2019년 5월 | 편집 및 정리 | 김예브게니아 | 정치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