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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사 김규식은 1881년 1월 29일 조선 문신이었던 김지성과 경주 이씨 부인 사이에서 2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풍, 호는 우사, 죽적이며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에는 김성, 중문, 일민, 왕개석 등의 이명을 사용했다. 부친 김지성은 선전관을 역임하고, 개항 이후 외교 관리로 일본과 러시아 등지를 다녀왔다. 김규식이 태어난 곳은 부친이 관리로 지내던 동래부였으나 본적지는 강원도 홍천이다. 양반 관리의 자제로 태어났지만 부친인 김지성이 부산 개항장에서의 불평등 무역을 지적하는 시정을 올렸다가 귀양을 가며 어려움을 겪는다. 충격으로 모친이 세상을 떠날 때 김규식의 나이는 4세였다. 언더우드는 고아가 된 김규식을 입양했다. 고아학당에서 지낼 당시 김규식이 병에 걸려 삼촌에게 돌려보냈으나 올바로 양육받지 못한 상황을 전해듣고 다시 데려온다. | ||
+ | 고아학당을 졸업하고 국문과 영문으로 발간하던 독립신문에 입사, 독립협회에도 가입해 활동한다. 서재필의 권유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 것은 1897년이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며 로녹대학을 어렵게 졸업한 후 1903년 가을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해 영문학 석사학위를 딴 뒤 1904년 봄 귀국한다. 이후 새문안교회를 중심으로 언더우드를 도와 선교사업에 헌신하며 경신학교, Y.M.C.A학관,배재학당 등에서 교육과 민중계몽 활동에 앞장선다. | ||
+ | 이후 1910년 12월 황해도 지역에서 민족운동가들을 탄압하는 안악사건 외 데라우치총독 암살 음모조작 사건이 벌어지자 1913년 4월 상해로 망명해 활동한다. 1918년에는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한국 민족대표로 선출되어 파리에서 독립활동을 이어간다. | ||
+ |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김규식은 외무총장 겸 강화회의 파리 대표위원으로 임명되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3.1운동 등 한국 독립운동에 관한 소식을 세계 만방에 알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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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22일 (수) 16:23 판
김규식 | |
한글명 | 김규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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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金奎植, 본관 청풍(淸風) |
이칭 | 변갑, 번개비 |
성별 | 남 |
생년 | 1881년 2월 28일 |
몰년 | 1950년 12월 10일(69세) |
직업 | 언더우드 선교사의 비서, 경신학교 교수와 학감, 1918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파리대표부 위원장, 구미외교위원회 위원장, 부위원장, 학무총장,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 민족자유연맹 총재 등 |
출신지 | 조선 경상도 동래도호부 |
출신학교 | 로녹 대학교(Roanoke College)영문학 학사,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영문학 학사, 언더우드 고아학당 |
아버지 | 김지성(김용원) |
어머니 | 경주 이씨 부인 |
배우자 | 조은수(사별), 김순애(재혼) |
자녀 | 김진필, 김진동, 김진세, 김한애, 김민애, 김우애 |
기본정보
우사 김규식은 1881년 1월 29일 조선 문신이었던 김지성과 경주 이씨 부인 사이에서 2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풍, 호는 우사, 죽적이며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에는 김성, 중문, 일민, 왕개석 등의 이명을 사용했다. 부친 김지성은 선전관을 역임하고, 개항 이후 외교 관리로 일본과 러시아 등지를 다녀왔다. 김규식이 태어난 곳은 부친이 관리로 지내던 동래부였으나 본적지는 강원도 홍천이다. 양반 관리의 자제로 태어났지만 부친인 김지성이 부산 개항장에서의 불평등 무역을 지적하는 시정을 올렸다가 귀양을 가며 어려움을 겪는다. 충격으로 모친이 세상을 떠날 때 김규식의 나이는 4세였다. 언더우드는 고아가 된 김규식을 입양했다. 고아학당에서 지낼 당시 김규식이 병에 걸려 삼촌에게 돌려보냈으나 올바로 양육받지 못한 상황을 전해듣고 다시 데려온다. 고아학당을 졸업하고 국문과 영문으로 발간하던 독립신문에 입사, 독립협회에도 가입해 활동한다. 서재필의 권유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 것은 1897년이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며 로녹대학을 어렵게 졸업한 후 1903년 가을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해 영문학 석사학위를 딴 뒤 1904년 봄 귀국한다. 이후 새문안교회를 중심으로 언더우드를 도와 선교사업에 헌신하며 경신학교, Y.M.C.A학관,배재학당 등에서 교육과 민중계몽 활동에 앞장선다. 이후 1910년 12월 황해도 지역에서 민족운동가들을 탄압하는 안악사건 외 데라우치총독 암살 음모조작 사건이 벌어지자 1913년 4월 상해로 망명해 활동한다. 1918년에는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한국 민족대표로 선출되어 파리에서 독립활동을 이어간다.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김규식은 외무총장 겸 강화회의 파리 대표위원으로 임명되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3.1운동 등 한국 독립운동에 관한 소식을 세계 만방에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