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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6) 내가면 외포1리 외주동으로 박골, 바꼴이라고도 한다. | | 406) 내가면 외포1리 외주동으로 박골, 바꼴이라고도 한다. |
| 407) 송기호(1865년 출생) 본관은 여산(礪山). 1885년 식년시 생원(生員) 3등 157위로 합격하였다. | | 407) 송기호(1865년 출생) 본관은 여산(礪山). 1885년 식년시 생원(生員) 3등 157위로 합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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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 항주(項州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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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項州洞口問星田항주동 입구에서 별밭을 방문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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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牟麥春光上下連보리가 봄볕 속에 위아래로 연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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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申老閑眠桑樹下신씨노인 뽕나무 아래 한가로이 졸다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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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時呼穉子讀靑篇어린아이 공부하라고 때맞추어 소리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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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항주(項州)에는 성전(星田)이 있다. 어떤 이는 별이 떨어진 곳이라고도 한다. 평산 신씨(平山申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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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9. 낙인동(樂仁洞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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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國賜峯前王訪村국사봉 앞쪽에 왕방촌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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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世居全氏向陽門전씨들이 양지쪽에 대대로 살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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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丹花仙籍黃金印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관직 올라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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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觀海眞工自有源관해공의 참된 공부 스스로 근원이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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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낙인동(樂仁洞)은 항주에서 갈라진 동네이다. 성주 전씨 전신(全信)410)은 고려조의 병부상서로서 공왕(恭王)을 수행하여 이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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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어와 살았다. 우리 태종이 공을 방문하였는데 왕방리(王訪里)에서 물어보았기 때문에 그 마을 이름을 왕방리라고 하였다. 권농사(勸農使)를 제수하였고 큰 산 하나를 하사하였기 때문에 그 산을 이름하여 국사봉(國賜峯)이라고 한다. 그 후손은 무과에 급제하여 연일·초계·경주의 영장(營將)과 백령 첨사를 역임하였으며 영사원종일등공신(寧社原從一等功臣)에 등록되었다. 성품이 매우 강직해서 청백리로 이름을 날렸는데 일찍이 강화부 중군(中軍) 때에 공용 면포 한 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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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상(馬裳)으로 하도록 하였는데 체임될 때를 미쳐 그 마상을 중군청에 도로 갖다 주었다. 그 아들 전기업(全起業)은 정축년(1637) 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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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 순절하였으니 일이 충렬사 주(註)에 보인다. 그 후손 관해공(觀海公) 전재봉(全在鳳)411)은 일찍이 문과에 합격하여 대간의 청직을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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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쳐서 제주 목사로 나갔다. 물러나서는 그 친척과 자손들이 이곳에 많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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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08) 양도면 인산2리 항주동으로 황골이라고 한다. 황골 동남쪽에 별밭[星田] 마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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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09) 양도면 인산1리 왕방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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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0) 전신(생몰년 미상)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호는 사와(謝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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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1) 전재봉(1834년 출생)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1861년 식년시 병과(丙科)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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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로 합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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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0. 흥천동(興川洞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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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岐巖山下是興川기암산 아래에 흥천 마을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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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短竹疎松繞宅邊작은 대와 성근 소나무가 집 주위에 둘러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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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大冶爐頭金躍否커다란 쇠가마에 쇳물을 끓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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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犂商鼎賈若紛然쟁기장수 솥장수가 분주히 다녀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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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 동네에는 주철(鑄鐵)의 분점(盆店)이 있는데 호미 장사와 솥장사가 많이 모여 왕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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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산 이름은 기암(岐岩)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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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2) 양도면 삼흥2리 흥천 마을이다. 고려시대에 흥천사가 있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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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1. 산문동(山門洞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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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山門洞倚碧山松산문동은 푸른 소나무 숲에 의지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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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漸覺泉聲瀉兩峯양 봉우리 솟아나는 샘물소리 차츰 들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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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灌入稻畦能免旱논에 물을 댈 수 있어 가뭄 걱정 면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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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年年相賀太平容해마다 태평한 모습 서로서로 치하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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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땅의 형세가 산이 높고 골이 깊어서 샘물이 마르는 일이 없고, 가뭄이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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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3) 양도면 삼흥2리 산문 마을로 흥천 동남쪽에 있다. 이 산문동 부분이 원본에는 106면 ʻ정두동ʼ 뒤에 실려 있으나, <고창서 발문본>의 순서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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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곳으로 옮겼다. 산문동은 흥천동과 인접하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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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 존강동(存江洞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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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存江洞口久停鞭존강동 입구에서 오래토록 머물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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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因坐南宮舊榻筵남궁씨 옛 터전에 잠시나마 앉아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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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溪柳庭花分植處시내버들과 정원화초 나누어 심은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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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淸風明月尙依然맑은 바람 밝은 달은 아직도 의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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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구춘당(九春堂)의 후손으로 주사를 지낸 남궁혁(南宮金赫)은 이곳에 살았다. 그 아들 남궁경(南宮氵敬)은 나와 매우 친했는데, 지금은 고인이 되었다. 그 자손이 여기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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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4) 양도면 삼흥1리 존강 마을로, 존개이·종개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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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 건평동(乾坪洞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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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名是乾坪卽水坪이름은 건평이지만 물 많은 수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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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滿堰春波灌稻粳뚝에 가득 봄물 차니 논에 물을 대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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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且畊且讀諸君子밭 갈면서 책 읽은 이 모두가 군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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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聊得斯中一味淸그러한 가운데서 맑은 기운을 얻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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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평해 황씨(平海黃氏), 함열 남궁씨(咸悅南宮氏), 강진 안씨(康津安氏), 파평 윤씨(坡平尹氏)가 모두 이곳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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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5) 양도면 건평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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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 장지포(長池浦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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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長池春水漲東西장지포 봄물은 동서로 넘쳐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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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井浦乾坪築兩堤정포와 건평에는 두 둑을 쌓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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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欹笠何翁投釣餌삿갓을 쓴 어떤 노인 낚시 바늘 던져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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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白鳩飛去影高低나는 백구는 그림자가 높았다가 낮아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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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제방은 유수 서필원(徐必遠)417)이 쌓은 것인데 물이 항상 얕지 않아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의지하여 생업을 이루어나갔다. 동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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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있는 두 제방은 항상 낚시꾼들이 있어서 취미를 얻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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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 양도면 건평리 노고산 북쪽에 있는 갯고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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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7) 서필원(1614∼1671) 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재이(載邇), 호는 육곡(六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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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 진강산 귀운(鎭江山歸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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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鎭江山色碧如屛진강산 산색은 푸른 병풍을 친 듯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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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片片歸雲錦繡形흐르는 조각구름 비단에 수놓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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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首智遺墟何處是수지현 옛터는 어디쯤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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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造翁筆下影丹靑조물주의 붓끝 아래 단청이 그려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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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산릉을 두르고 있는 산은 벌려져 있고 굽어 있어서 그 아래에 의지하여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으니 옛날에 진강현(鎭江縣)이 그 아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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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구려의 수지현(首智縣)418)의 터는 진강 남쪽에 있었다. 그 서쪽 5리에 해녕향(海寧鄕)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능곡(陵谷)은 옮겨져서 찾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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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돌아가는 구름[歸雲] 역시 강화부부 10경(景)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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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8) 원문에는 수지손(首智孫)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따라 ʻ孫ʼ을 ʻ縣ʼ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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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 목장(牧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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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三百年前設牧場삼백년 이전에 목장이 설치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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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古稱此地馬多良좋은 말이 많은 곳으로 오래 전부터 불려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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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盖聞伐代驄云者듣건대 벌대총이라 불린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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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內廐嘶風獨異常궁궐 마구간에서 울부짖는 모습도 예사롭지 않았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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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옛날에 목장이 있었는데 인조 기축년(1649)에 유수 조계원(趙啓遠)419)이 장계를 올려서 목장을 파하고 농사를 짓게 하자고 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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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으며, 기해년(1719)에는 유수 심택현(沈宅賢)420)이 태복을 지낼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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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장에는 훌륭한 말의 종자들이 있으니 다시 목장을 설치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길상산(吉祥山)이 이곳이다. 세속에 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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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종이 심양에서 돌아올 때 청나라 황제가 말 한 마리를 돌려주면서 ʻ이것은 너희 나라 진강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가 나라로 돌아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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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때 이 말과 함께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ʼ라고 하였다. 효종은 그 말을 사랑하여 돌아와서는 장차 강을 건너고자 하니 말이 먼저 날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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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너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비로소 그것이 신령스러운 종자임을 알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일설에는 “효종이 심양에서 돌아올 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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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장에서 팔준마를 얻었다.”라고 하기도 한다. 일설에는 “효종이 말 한 마리를 길러서 내구에 두었는데 벌대총(伐大驄)이라고 이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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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였다. 이것은 진강의 종자들이 다른 말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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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름을 지은 데에는 특별한 뜻이 있기 때문에 가장 사랑하고 길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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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9) 조계원(1592∼1670)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자장(子長), 호는 약천(藥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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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20) 심택현(1674∼1736)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여규(汝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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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도면(上道面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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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 하일동(霞逸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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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霞峴西南谷谷幽 하현의 서남쪽은 골짝마다 그윽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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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山中宰相古今留 재상이 예로부터 이 산중에 머물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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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二公宅址三公墓 두 정승의 집터422)와 세 정승의 무덤423)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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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云是江州第一區이곳을 강화도의 ʻ제일구(第一區)ʼ이라고 부른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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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상도면(上道面)은 강화부 관아 남쪽 35리에 있다. 도촌(陶村) 정유성(鄭維城)424)은 연일 정씨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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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 선원면(仙源面) 연동(烟洞) 부분의 주(註)에 보인다. 현종 때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며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묘는 하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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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霞逸里)의 서쪽 산기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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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425)는 도촌의 손자이다. 집터가 여기에 있는데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여러 번 조정에서 불렀지만 나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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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 않았다. 고향에 은거하면서 도학을 온전히 갖추었으며 오조를 거쳐 국태로(國太老)의 학자라고 하였다. 또 하곡(霞谷) 선생이라고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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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었으며,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의 명을 받들어 지위가 숭록대부 우찬성 겸 성균좨주(崇祿大夫 右贊成 兼 成均祭酒)에까지 올랐고, 죽어서는 문강(文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거처하는 초가집은 비바람을 막지 못하여서 유수 민진원(閔鎭遠)426)이 평소에 선생을 공경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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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 때문에 집을 지어주었다. 묘는 하현(霞峴)의 동쪽 기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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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그 손자인 참판(參判)을 지낸 정원하(鄭元夏)427)가 와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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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영의정을 지낸 간재(艮齋) 최규서(崔奎瑞)428)는 해주 최씨인데 이 집이 진강산 서쪽에 있었다. 집이 매우 허름하여 경상(卿相)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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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같지가 않았으며 거실에 편액하기를 수운헌(睡雲軒)이라고 하였다. 9언4구의 시가 전해진다. “구름이 산에 있을 때에는 말렸다가 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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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펴졌다가 다시 말리고(雲在峀 捲復舒 舒復捲), 사람이 난간에 있을 때에는 잠자다가 깨고 깼다가 다시 잠드네(人在欄 睡復醒 醒復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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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리면 잠드는 것은 사람이 산에 있고 구름이 난간에 있을 때이고 (捲則睡 人在峀 雲在欄), 펴지면 깨는 것은 사람이 난간에 있고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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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산에 있을 때라네(舒則醒 人在欄 雲在峀).” 당시 심은 자단(紫檀)나무와 측백나무가 여전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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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안동권씨 권개(權愷)429)는 강정(康定) 권철(權轍)430)의 아들이다. 관직은 호조좌랑을 지냈고, 묘는 하곡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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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21) 원본에는 ʻ상도면ʼ이 빠져있으나, 구창서발문본에 따라 삽입하였다. 상도면은 오늘의 양도면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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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22) 정제두와 최규서의 집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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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23) 정유성, 정제두, 권개의 무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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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24) 정유성(1596∼1664)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덕기(德基), 호는 도촌(陶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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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25) 정제두(1649∼1736)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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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26) 민진원(1664~1736)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세심(洗心). 1705년, 1710년 두 차례 강화유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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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27) 정원하(1855년 출생)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성조(聖肇). 아버지는 연안도호부사 기석(箕錫)이며, 어머니는 풍산홍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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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28) 최규서(1650~1735)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문숙(文叔), 호는 간재(艮齋)·소릉(少陵)·파릉(巴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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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29) 권개(1530~1568) 강화부사였던 권적의 손자이며 영의정을 지낸 권철의 아들이고, 임진왜란 때 명장 권율의 형이다. 의금부도사·호조좌랑 등을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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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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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0) 권적(1503~1578)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유(景由), 호는 쌍취헌(雙翠軒). 아버지는 강화부사 적(勣),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며, 율(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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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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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 하촌(霞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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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霞村卜築幾人基하촌에 집을 짓고 누구 누구 터 잡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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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南望貂皮一筆奇남쪽의 초피산은 붓끝처럼 기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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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閔朴許同三逕月민씨와 박씨가 함께 세 달 지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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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桂蓮掛榜又時時과거 시험 함께 보고 함께 급제 하였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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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남쪽으로는 붓의 형상을 하고 있는 초피산(貂皮山)이 있는데, 여흥 민씨 장령 민응세(閔膺世)의 후손이 많이 살고 있다. 밀양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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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사 박승위(朴承偉)가 이 옹일촌(雍逸村)431)에 살고 있다. 현석공(玄石公)의 손자로서 진사 박선수(朴善壽)도 이곳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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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1) 양도면 하일리 옹일 마을이다. 하일의 남서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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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 묵와선생(黙窩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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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春風來拜黙窩翁봄바람 쐬면서 묵와선생께 절을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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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世世家聲學業崇학업 숭상 가문 명성 대대로 이어온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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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識得箇中淸意味사물의 밝은 의미 훤히 알고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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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時人浮說摠如聾세상의 경박한 말은 귀를 막고 안 들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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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묵와(黙窩) 민재승(閔載昇)은 문학으로써 가업을 계승하였으며 그 마음은 부드럽고 스스로를 깨끗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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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 능내동(陵內洞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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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陵內村中草結廬능내촌 가운데에 풀을 엮어 집을 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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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金申坐讀古人書김씨와 신씨가 고전을 읽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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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蔭郎庠士何歸速음직 낭관 지낸 그대는 어찌 빨리 돌아가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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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尤是情雲鎖舊居정다운 구름만 옛집을 에워싸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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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강릉 김씨 수창(睡窓)의 후손인 진사 김연의(金演儀)433)와 고령 신씨 죽당(竹堂)의 후손인 교관 신홍구(申鴻求)는 나와 친지로서의 정이 있는 사이이다. 모두 세상 사양하고 추탄(追歎)하였다. 그 아우와 조카는 모두 이곳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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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2) 양도면 능내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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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3) 김연의(1856년 출생) 본관은 강릉(江陵). 1891년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 110위로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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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 가릉(嘉陵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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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一片鎭江碧幾層진강산 한쪽 편에 겹겹의 푸른 기운 감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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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白雲多處是嘉陵흰 구름 많은 곳에 가릉이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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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年年杜宇東風淚해마다 두견새는 동풍에 눈물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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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每向開花百感增개경을 향할 때마다 만감이 더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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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려 원종(元宗)의 비 순경태후(順敬太后)435)의 능(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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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개화(開化)는 송도의 옛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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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4) 양도면 능내리에 있는 고려 24대 원종의 비 순경태후 무덤으로 사적 370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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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5) 순경태후(?∼1236) 고려 원종의 비. 성은 김씨(金氏). 본관은 경주(慶州). 아버지는 약선(若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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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 조산동(造山洞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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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造洞來尋李石翁조산동에 이르러 이석 옹을 찾아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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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梅蘭菊竹屋西東매란국죽 사군자가 집 주위에 둘러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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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四時長得春風氣사계절 내내토록 봄기운을 얻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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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倚案淸談老亦雄책상 기대어 하시는 말씀 늙었지만 힘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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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여흥 이씨로서 소릉(少陵)의 후손인 이성구(李星九)는 호가 석치(石痴)인데 이곳에 살면서 화초를 가꾸며 스스로를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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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6) 양도면 조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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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 장하동(場下洞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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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古木春深荷麓村하록촌의 고목에도 봄기운이 완연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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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權公舊第逈開門권 선생 옛집엔 저 멀리 문 열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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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追思四十年前事사십 년 전의 일을 돌이켜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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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牖我書中自有源내가 쓰는 글솜씨의 연원이 여기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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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안동 권씨 환성재(喚惺齋) 권갑만(權甲萬)은 미수(尾叟)의 문인이다. 은거하면서 벼슬하지 않았다. 6세손인 하은공(荷隱公) 권호(權灝)는 문장과 효로써 세상에 드러났는데 내가 일찍이 수학한 적이 있다. 그의 손자인 주사를 지낸 권병두(權炳斗)와 여러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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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7) 현재의 양도면 도장2리 장아래마을이다. 진강목장의 아래에 있는 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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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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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 청주한씨(淸州韓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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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鎭江山下列韓門진강산 아래에 한씨 가문 모여 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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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認是槐亭裕後昆이들은 모두가 삼괴정의 후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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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入室眞工司馬老입실 공부 바르게 하여 진사로 늙어 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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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至今光彩動文垣지금까지 문장으로 빛을 발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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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주 한씨로서 삼괴정 한경린의 후손인 한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그 중에 한형석(韓亨錫)438)은 고종 을유년(1885)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일찍이 문학으로 이름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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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 평해황씨(平海黃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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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欲問荷軒正悄然하헌 댁을 방문하려니 정녕 숙연하여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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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穉蘭小屋兩三椽어린 난초 있는 작은 집에 서까래 두세 개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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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眞源覺得淸如許참된 근원 청백함을 깨달아 얻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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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薇月藝風度六年미월(薇月) 예풍(藝風)과 함께 6년 세월을 보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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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하헌(荷軒)은 평해 황씨 황장(黃火章)공이다. 충신공(忠臣公)의 7세손이며 무안공(務安公)의 고손이다. 일찍이 문학으로 이름을 떨친 분인데 내가 일찍이 그의 문하에서 6년 동안 수학하였다. 지금은 어린 손자들이 이곳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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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8) 한형석(1866년 출생) 본관은 청주(淸州). 1885년 식년시 생원(生員) 3등 189위로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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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 석릉(碩陵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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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碩陵知在鎭江巒석릉이 진강산에 자리함을 아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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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獨閉空林月影寒빈숲에 홀로 문 닫고 있자니 달그림자 차갑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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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猗我聖朝封築謹아, 우리나라 조정에서 봉분을 수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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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年年奉審地方官해마다 지방 관리가 받들어 살핀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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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려 희종440)의 능(陵)이다. 강화부의 4기의 왕릉은 유수 조복양(趙復陽)441)이 찾아내어 봉분을 개축하였다. 10년 마다 예조에 낭관을 파견하여 살피도록 하였으며 지금 지방의 관원들이 해마다 순찰하여 살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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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려 태조의 현릉(顯陵)은 왕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 참봉을 두었으며 매년 봄가을로 여러 능을 두루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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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9) 양도면 길정리에 있는 고려 희종의 무덤으로 사적 제369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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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40) 희종(1181∼1237) 고려의 제21대 왕. 재위 1204∼1211. 이름은 영(韺), 초명은 덕(悳). 자는 불피(不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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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41) 조복양(1609∼1671)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중초(仲初), 호는 송곡(松谷).강화유수로는 1664년 1월에 부임하여 1665년 2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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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 장두동(場頭洞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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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場頭洞在野中間장두동은 들판의 가운데에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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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低麓如籬四面環낮은 기슭 울타리처럼 사면을 둘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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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列屋東南誰是主동남쪽에 늘어선 집은 주인이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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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安居樂業摠閑閑안씨들이 생업을 즐기며 사니 모든 것이 한가롭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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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순흥 안씨(順興安氏)가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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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42) 양도면 도장1리 장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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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 추포정(秋浦亭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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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秋浦亭墟摠緲然추포정 옛터는 아련하기만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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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一坪水色一空烟온 들에는 물빛이요 온 하늘에는 연기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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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堤頭香木人猶指제방위의 향나무를 사람들이 가리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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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曾繫黃公釣月船일찍이 황공이 낚시배를 묶었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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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판서 추포(秋浦) 황신(黃愼)444)의 집터는 상도리(上道里) 추포정(秋浦亭)에 있었다. 정자 터에는 향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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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우 무성하다. 세속에 전하기를 가릉언(嘉陵堰)과 선두언(船頭堰) 두 제방이 아직 쌓여지기 전에 황공은 이곳에서 배를 묶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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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43) 양도면 도장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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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44) 황신(1562∼1617)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사숙(思叔), 호는 추포(秋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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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 가릉포(嘉陵浦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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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嘉陵春水晩來生가릉벌의 봄물이 늦게야 고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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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荷鍤紛紛灌稻坪가래질 바삐하여 논에다 물을 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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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靜聽老農桑下語늙은 농부 뽕나무 밑에서 하는 말 조용히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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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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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風調雨順際昇平풍우가 순조로워야 태평세월 맞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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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가릉포(嘉陵浦)는 상도(上道), 오동(五洞)의 사이에 있다.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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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되어있는 물이 항상 부족할까 염려되었으며, 반드시 비가 순조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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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와야만 풍년을 기약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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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45) 양도면 능내리의 개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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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외주동(外州洞406))
幽谷橫斜是外州깊은 골짝 비스듬히 외주(外州) 마을 있는데,
門前南出一貂頭문 앞에 남쪽으로 초피산이 솟아 있네.
宋金兩姓連書屋송씨·김씨의 글방이 나란히 있으니,
各採紅蓮玉漵秋각 집안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네.
○ 외주동(外州洞) 남쪽으로는 초피산(貂皮山)의 한 봉우리를 바라 볼 수가 있는데 붓처럼 생겨서 매우 보기가 좋다. 그 거주하는 이는
여산 송씨 송기호(宋基皓)407)와 김해 김씨가 있는데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그 친척과 자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406) 내가면 외포1리 외주동으로 박골, 바꼴이라고도 한다.
407) 송기호(1865년 출생) 본관은 여산(礪山). 1885년 식년시 생원(生員) 3등 157위로 합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