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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강릉 선교장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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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루봉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를 기준으로 남쪽을 향해 좌청룡과 우백호의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어머니의 품안처럼 감싸 안은 집터를 만들었다.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개인 살림 집으로, 전형적인 양반 상류주택이지만, 일반 사대부의 집들과는 다른 공간특징을 가지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본채의 규모는 건물 9동에 총 102 칸 이며, 건평은 318평에 이른다. 배다리 골에 있었던 부속 건물과 가랍집 초가까지 포함하면 대략 300칸에 이르는 대 장원이었다.<ref>" 차장섭,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집 이야기』, 열화당, 2011, 78쪽</ref>
 
  시루봉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를 기준으로 남쪽을 향해 좌청룡과 우백호의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어머니의 품안처럼 감싸 안은 집터를 만들었다.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개인 살림 집으로, 전형적인 양반 상류주택이지만, 일반 사대부의 집들과는 다른 공간특징을 가지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본채의 규모는 건물 9동에 총 102 칸 이며, 건평은 318평에 이른다. 배다리 골에 있었던 부속 건물과 가랍집 초가까지 포함하면 대략 300칸에 이르는 대 장원이었다.<ref>" 차장섭,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집 이야기』, 열화당, 2011, 78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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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상류주택은 평면구조에 따라 日자형, 月자형, 口자형, 用자형 등의 길상문자형의 공간구조를 가지 고 있지만, 선교장은 분산형 주택으로 다른 상류주택에서 볼 수 자유로운 공간구조를 가지고 있 다. 전체적으로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로우면서 유기적인 공간구조로 되어 있다. 또 한, 안채의 口자형 구조로 창건되어 폐쇄적인 구조에서 점차 오랜 세월에 걸쳐 개방적인 구조로 확장되어 왔다.<ref>유선미-숙명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환경디자인학과 실내디자인전공-석사학위논문『현상학적 지각체계를 통한 체험공간에 관한 연구 - 강릉 선교장을 중심으로』2013,39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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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년 이전에 건립된 안채는 이내번이 지었으며, 선교장의 건물들 중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안채의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주인전용의 별당건물인 동별당은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열화당은 사랑채로서 순조 15년(1815)에 이후(李厚)가 세웠으며,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1700년 이전에 건립된 안채는 이내번이 지었으며, 선교장의 건물들 중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안채의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주인전용의 별당건물인 동별당은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열화당은 사랑채로서 순조 15년(1815)에 이후(李厚)가 세웠으며,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2017년 4월 10일 (월) 00:19 판


정의

강릉 선교장은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집으로 300년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는 한국 전통 상류주택이다. [1]

위치


역사

선교장은 조선 영조때(1703년)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내번이 족제비 떼를 쫓다가 우연히 발견한 명당 자리에 집을 지은 후, 그 후손이 지금도 살고있다.[2]

총건평 1,051.24m²(318평)으로, 99칸의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상류주택으로서 1965년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 5호로 지정되어 개인소유의 국가 문화재로서 유명한 장소이다. 300여년동안 그 원형이 잘 보존된 아름다운 전통가옥으로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미를 활달하게 포용하여 조화를 이루고 돈후한 인정미를 지닌 후손들이 지금가지 거주하는 살아숨쉬는 공간이다.

따라서 한국의 유형 문화재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강릉문화를 대표하며 경포 호수권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에 전통문화 시범도시인 강릉시의 문화 관광 자원으로서 부각되었다.

하늘이 족제비 무리를 통해 점지 했다는 명당터인 선교장은 300여년전 안채 주옥을 시작으로 동별당, 서별당, 연지당, 외별당, 사랑채, 중사랑, 행랑채, 사당들이 지어졌고 큰대문을 비롯한 12대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대장원을 연상케 한다. 입구에는 인공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지어 활래정(活來亭)이라 이름을 짓고 연못과 함께 경포호수의 경관을 바라보며 관동팔경 유람하는 조선의 선비와 풍류들의 안식처가 되었다.만석꾼 곳간채에는 항상 곡식이 가득하여 흉년에는 창고를 열어 이웃에게 나누어주며 베푸는 집안의 표상이 되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경포호수를 가로질러 배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 다녔다하여 선교장 이라고 지어진 이름 이지만 그 호수는 논이 되었고 대장원의 뒤 야산에 노송의 숲과 활래정의 연꽃 그리고 멀리보이는 백두대간 사계절 변화의 모습을 바라보는 운치는 한국 제일이라고 하겠다. 2000년을 기해 한국 방송공사에서 20세기 한국 TOP 10을 선정할 때 한국 전통가옥 분야에서 한국최고의 전통가옥으로 선정되었다. [3]

강릉 선교장의 특징

시루봉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를 기준으로 남쪽을 향해 좌청룡과 우백호의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어머니의 품안처럼 감싸 안은 집터를 만들었다.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개인 살림 집으로, 전형적인 양반 상류주택이지만, 일반 사대부의 집들과는 다른 공간특징을 가지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본채의 규모는 건물 9동에 총 102 칸 이며, 건평은 318평에 이른다. 배다리 골에 있었던 부속 건물과 가랍집 초가까지 포함하면 대략 300칸에 이르는 대 장원이었다.[4]

일반적인 상류주택은 평면구조에 따라 日자형, 月자형, 口자형, 用자형 등의 길상문자형의 공간구조를 가지 고 있지만, 선교장은 분산형 주택으로 다른 상류주택에서 볼 수 자유로운 공간구조를 가지고 있 다. 전체적으로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로우면서 유기적인 공간구조로 되어 있다. 또 한, 안채의 口자형 구조로 창건되어 폐쇄적인 구조에서 점차 오랜 세월에 걸쳐 개방적인 구조로 확장되어 왔다.[5]

1700년 이전에 건립된 안채는 이내번이 지었으며, 선교장의 건물들 중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안채의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주인전용의 별당건물인 동별당은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열화당은 사랑채로서 순조 15년(1815)에 이후(李厚)가 세웠으며,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안채와 열화당 사이에는 서재 겸 서고로 사용되던 서별당이 있었다. 대문 밖 바깥마당의 남쪽으로 위치한 넓은 인공연못에 서 있는 활래정은 열화당을 세운 다음해에 지었다. 돌기둥이 받치고 있는 마루가 연못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누각형식의 ㄱ자형 건물이다.

전체적으로 이 집은 낮은 산기슭을 배경으로 독립된 건물들을 적당히 배치하고 각 건물의 구조도 소박하게 처리함으로써, 집 밖의 활래정과 함께 자유스럽고 너그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또한 소장하고 있는 여러 살림살이들은 옛날 강릉지방 사람들의 생활관습을 알아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있다.[6]

가상현실

주석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강릉 선교장-정의, 참고날짜 2017.04.09
  2. 『나이버지식백과』대한민국구석구석강릉 선교장 개요 참고날짜 2017.04.09
  3. [http://www.knsgj.net/soge/soge1.php 선릉 선교장 사이트-선릉 선교장의 역사, 참고날짜 2017.04.09
  4. " 차장섭,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집 이야기』, 열화당, 2011, 78쪽
  5. 유선미-숙명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환경디자인학과 실내디자인전공-석사학위논문『현상학적 지각체계를 통한 체험공간에 관한 연구 - 강릉 선교장을 중심으로』2013,39쪽
  6. "강릉 선교장",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