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상원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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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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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는 현재 월정사의 말사로 있으나, 국내에서 유일하게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있는 문수신앙의 중심지이다. 기록에 의하면 보천, 효명 두 신라 왕자가 중대 지로봉에서 1만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고 하며, 왕위에 오른 효명태자(성덕왕)가 재위 4년 만인 705년 지금의 상원사터에 진여원(眞如院)을 창건함과 동시에 문수보살상을 봉안하였고, 이어 725년 동종을 주조하였다.조선의 7대 임금인 세조가 이곳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만나 불치의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세조는 친히 권선문을 작성하고 진여원을 확장하였으며, 이름을 ‘상원사’(上院寺)라 바꾸고 원찰(願刹)로 정하여 문수동자상을 봉안했다. 이후 몇 차례 중창되다가 1907년 수월화상이 방장으로 있을 때 크게 선풍을 떨쳤으며, 1951년 입적한 방한암 스님이 30여 년 동안 이곳에서 지냈다. 방한암스님이 한국전쟁 때 병화로부터 상원사를 지켜낸 일화 또한 매우 유명하다. 방한암의 제자인 탄허스님도 강원도 일대에 이름난 분이다. <ref>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7441&cid=42840&categoryId=42847 『답사여행의 길잡이』 3 동해ㆍ설악, 돌베개, 1994)]</ref>
 
상원사는 현재 월정사의 말사로 있으나, 국내에서 유일하게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있는 문수신앙의 중심지이다. 기록에 의하면 보천, 효명 두 신라 왕자가 중대 지로봉에서 1만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고 하며, 왕위에 오른 효명태자(성덕왕)가 재위 4년 만인 705년 지금의 상원사터에 진여원(眞如院)을 창건함과 동시에 문수보살상을 봉안하였고, 이어 725년 동종을 주조하였다.조선의 7대 임금인 세조가 이곳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만나 불치의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세조는 친히 권선문을 작성하고 진여원을 확장하였으며, 이름을 ‘상원사’(上院寺)라 바꾸고 원찰(願刹)로 정하여 문수동자상을 봉안했다. 이후 몇 차례 중창되다가 1907년 수월화상이 방장으로 있을 때 크게 선풍을 떨쳤으며, 1951년 입적한 방한암 스님이 30여 년 동안 이곳에서 지냈다. 방한암스님이 한국전쟁 때 병화로부터 상원사를 지켜낸 일화 또한 매우 유명하다. 방한암의 제자인 탄허스님도 강원도 일대에 이름난 분이다. <ref>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7441&cid=42840&categoryId=42847 『답사여행의 길잡이』 3 동해ㆍ설악, 돌베개, 1994)]</ref>

2017년 4월 5일 (수) 16:23 판

개요

상원사는 현재 월정사의 말사로 있으나, 국내에서 유일하게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있는 문수신앙의 중심지이다. 기록에 의하면 보천, 효명 두 신라 왕자가 중대 지로봉에서 1만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고 하며, 왕위에 오른 효명태자(성덕왕)가 재위 4년 만인 705년 지금의 상원사터에 진여원(眞如院)을 창건함과 동시에 문수보살상을 봉안하였고, 이어 725년 동종을 주조하였다.조선의 7대 임금인 세조가 이곳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만나 불치의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세조는 친히 권선문을 작성하고 진여원을 확장하였으며, 이름을 ‘상원사’(上院寺)라 바꾸고 원찰(願刹)로 정하여 문수동자상을 봉안했다. 이후 몇 차례 중창되다가 1907년 수월화상이 방장으로 있을 때 크게 선풍을 떨쳤으며, 1951년 입적한 방한암 스님이 30여 년 동안 이곳에서 지냈다. 방한암스님이 한국전쟁 때 병화로부터 상원사를 지켜낸 일화 또한 매우 유명하다. 방한암의 제자인 탄허스님도 강원도 일대에 이름난 분이다. [1]

위치

역사

특징

오대산

오대산은 태백산맥의 한줄기로서 비로봉, 호령봉, 상왕봉, 두로봉, 동대산 등 다섯 봉우리가 오목하게 원을 그리며 누대를 이루고 있는 까닭에 붙여진 명칭이다. 즉, 오대산은 어느 하나의 봉우리를 지칭한다기보다는 다섯 봉우리를 아우르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이 봉우리에는 각각 중대(적멸보궁), 북대(미륵암), 서대(수정암), 동대(관음암), 남대(지장암)의 다섯 암자가 있다. [2] 오대산은 자장이 월정사를 개창한 이래 불교신앙의 성산으로 추앙되어 왔다. 일찍이 고려시대부터 오대산은 "나라 안의 명산 중에서도 이곳이 가장 좋은 곳이니 불법이 길이 번창할 곳이다."(《삼국유사》「대산월정사 오류성중」) 라는 말이 있었다.[3] 또한 옛 사람들은 오대산을 '삼재가 들지 않는 명당 터'라 여기기도 했고 '어떤 재앙이 닥쳐도 안전한 땅'이라고 믿었다. [4]

그런데 사실 오대산은 중국 산서성 북동부에 있는 청량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청량산 또한 동서남북중의 다섯 봉우리가 누대를 이루고 있어 오대산이라고 부르며, 예로부터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불교 성지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이곳은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으로 알려져있고, 월정사를 최초 창건한 자장이 신라로 돌아오기 이전에 문수보살을 만난 곳도 바로 이곳이다. 중국의 오대산인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만나고 다시 신라의 오대산으로 돌아와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월정사가 세워졌으니 이는 매우 의미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5]

오대산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림지대로 동식물상이 다양하고 풍부하며, 1975년에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월정사로부터 상원사로 이어지는 10km의 계곡은 5백년 된 전나무들과 고산식물, 잡목들로 우거진 숲으로 수려하고 웅장한 경관을 자랑한다.

평창 올림픽

관련 인물 및 설화

나옹

한암

탄허

경내 문화재

가상현실

참고문헌

주석

  1. 『답사여행의 길잡이』 3 동해ㆍ설악, 돌베개, 1994)
  2.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와 암자" 한국문화유산답사회,『답사여행의 길잡이3 - 동해,설악』, 2011,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
  3. "월정사 역사와문화-1" 『원행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문수성지 오대산 월정사, 2014년 2월 3일 작성
  4. "오대산의 월정사"신정일,『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9: 우리산하』, 다음생각, 2012,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
  5. "월정사 역사와문화-1" 『원행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문수성지 오대산 월정사, 2014년 2월 3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