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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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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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사진 = 흥선대원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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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입: 인물
|이름 = 이하응, 흥선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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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명: 흥선대원군 (이하응)
|출생 =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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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명: 興宣大院君 (李昰應)
|사망 = 1898
+
* 영문명: Prince Regent Heungseon <ref>[http://thesaurus.history.go.kr/eng ''Korea - The Politics of the Vortex'', Gregory Henderson (Harvard Univ. Press, 1968), p.6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용어영문시소러스에서 재인용.]</ref> (Yi Ha-eung)
|성별 =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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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년: 1820
|국적 =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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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년: 1898
|직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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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할: 종친, 왕족, 정치가
|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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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자: [[강혜원]], [http://kadhlab102.com/wiki/index.php/201410325%EC%9E%A5%EC%84%A0%EC%98%81 장선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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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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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이름은 이하응(李昰應)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이며,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영조의 5대손(五代孫)이며 [[고종]]의 아버지이다. 1843년(헌종 9)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1846년 수릉천장도감(緩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이 된 후 종친부 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도총관(都摠管) 등 한직(閑職)을 지내면서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勢道政治) 밑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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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KU |조선]] 후기의 왕족·정치가. [[고종 KU |고종]]의 즉위로 대원군에 봉해지고 섭정이 되었다. 당파를 초월한 인재등용, [[서원철폐 KU |서원철폐]], 법률제도 확립으로 중앙집권적 정치기강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경복궁 KU |경복궁]] 중건으로 백성의 생활고가 가중되고 쇄국정치를 고집함으로써 국제관계가 악화되고 외래문명의 흡수가 늦어지게 되었다. [[임오군란 KU |임오군란(壬午軍亂)]], [[갑오개혁|갑오개혁(甲午改革)]] 등으로 은퇴와 재집권을 반복하였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56520&cid=40942&categoryId=33383 두산백과, 확인일자: 2014.05.27]</ref>
  
왕족에 대한 안동김씨의 감시가 심하자 보신책(保身策)으로 불량배와 어울려 파락호(破落戶) 행세를 하여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칭(卑稱)으로까지 불리면서 안동김씨의 감시를 피하는 한편, 철종이 후사(後嗣)가 없이 병약해지자 조대비(趙大妃)에 접근하여 둘째 아들 명복(命福;고종의 아명)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허락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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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칭별칭 : 자 시백(時伯), 호 석파(石坡), 시호 헌의(獻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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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신지 :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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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 : 전주(全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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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사건 : [[임오군란 KU |임오군란]], [[을미사변 KU |을미사변]], [[아관파천 KU |아관파천]], [[병인양요 KU |병인양요]], [[신미양요 KU |신미양요]], [[서원철폐 KU |서원철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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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관직(경력) : 종친부 유사당상(有司堂上), 오위도총부 도총관
  
1863년(철종 14) 철종이 승하하고 조대비(趙大妃)에 의해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지고 어린 고종의 섭정이 되었다.
 
대권을 잡자 안동김씨의 주류(主流)를 숙청하고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부패관리를 적발하여 파직시켰다. 47개 서원(書院)을 제외한 전국의 모든 서원을 철폐하고, 국가재정의 낭비와 당쟁의 요인을 없앴으며, [[육전조례(六典條例)|육전조례]] [[대전회통(大典會通)|대전회통]] 등을 간행하여 법률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정치 기강을 수립하였다.
 
  
[[비변사(備邊司)|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議政府)|의정부]][[삼군부|삼군부(三軍府)]]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시켰으며, 관복(官服)서민들의 의복제도를 개량하고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는 한편, 세제(稅制)개혁하여 귀족과 상민(常民)의 차별 없이 세금을 징수하였으며, 조세(租稅)의 운반과정에서 조작되는 지방관들의 부정을 뿌리뽑기 위하여 사창(社倉)을 세움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민생이 다소 안정되고 국고(國庫)도 충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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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년 음력 11월 16일(양력 12월 21일) ~ 1898년 음력 2월 2일(양력 2월 22일))은 조선 말기의 왕족이자 정치가, 화가이며 [[대한제국 KU |대한제국]]의 황족, 추존왕이다. 이름은 이하응(李昰應)이다. 부인은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다. [[남연군]](원래는 인평대군의 6대손이나 후에 양자 입적)과 군부인 민씨의 넷째 아들이며, 대한제국 [[고종 KU |고종]]의 친아버지이다. 1863년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었으며, 안으로는 유교의 [[위민정치 KU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였고, 밖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의 침략적 자세에 대하여 [[척왜강경정책 KU |척왜강경정책]]으로 대응하였다. 또한 서원을 철폐하여 양반·기득권 토호들의 민폐와 [[노론 KU |노론]]의 일당독재를 타도하고 [[남인 KU |남인]][[북인 KU |북인]]을 채용하였으며, [[동학 KU |동학]]과 [[천주교 KU |천주교]]탄압하였다.
  
반면, [[경복궁|경복궁(景福宮)]]을 중건(重建)하면서 [[당백전(當百錢)|당백전]]을 발행하고 [[원납전(願納錢)|원납전]]을 강제로 징수하여 백성의 생활고가 가중되었으며, 천주교도 박해를 비롯한 통상수교거부정책을 고집함으로써 1866년(고종 3) [[병인양요]]에 이어 1871년 [[신미양요]]를 초래하는 등 국제관계가 악화되고 외래문명의 흡수가 늦어지게 되었다. 또한, 섭정 10년 동안 반대세력이 형성되어, 며느리인 [[명성황후]]가 반대파를 포섭하고 고종이 친정(親政)을 계획하게 되자, 1873년 그의 실정(失政)에 대한 [[최익현(崔益鉉)|최익현]]의 탄핵을 받았다. 이에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자 [[운현궁(雲峴宮)|운현궁]]으로 은퇴하였다.
 
<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56520&cid=40942&categoryId=33383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ref>
 
  
=='''클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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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항목'''==
 
* 인물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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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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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연군]]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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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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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원철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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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오군란 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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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오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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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미사변 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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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관파천 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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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인양요 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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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미양요 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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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width:250px"|이 문서||style="width:200px"|관계||style="width:250px"|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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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A은 B을 중건에 살곶이 다리를 자재로 사용하였다.||[[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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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A은 B와 관련이 있다.||[[남연군의 묘(南延君―墓)]], [[남연군묘 도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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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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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자원'''==
*[[장원석]]: 처음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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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56520&cid=40942&categoryId=33383 두산백과 흥선대원군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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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출처'''==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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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장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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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서원 KU]]
[[분류:문화유산 디지털 콘텐츠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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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아차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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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11일 (수) 23:12 판

메타데이터

  • 타입: 인물
  • 한글명: 흥선대원군 (이하응)
  • 한자명: 興宣大院君 (李昰應)
  • 영문명: Prince Regent Heungseon [1] (Yi Ha-eung)
  • 생년: 1820
  • 몰년: 1898
  • 역할: 종친, 왕족, 정치가
  • 편자: 강혜원, 장선영


내용

조선 후기의 왕족·정치가. 고종의 즉위로 대원군에 봉해지고 섭정이 되었다. 당파를 초월한 인재등용, 서원철폐, 법률제도 확립으로 중앙집권적 정치기강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으로 백성의 생활고가 가중되고 쇄국정치를 고집함으로써 국제관계가 악화되고 외래문명의 흡수가 늦어지게 되었다. 임오군란(壬午軍亂), 갑오개혁(甲午改革) 등으로 은퇴와 재집권을 반복하였다.[2]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년 음력 11월 16일(양력 12월 21일) ~ 1898년 음력 2월 2일(양력 2월 22일))은 조선 말기의 왕족이자 정치가, 화가이며 대한제국의 황족, 추존왕이다. 이름은 이하응(李昰應)이다. 부인은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다. 남연군(원래는 인평대군의 6대손이나 후에 양자 입적)과 군부인 민씨의 넷째 아들이며, 대한제국 고종의 친아버지이다. 1863년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었으며, 안으로는 유교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였고, 밖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의 침략적 자세에 대하여 척왜강경정책으로 대응하였다. 또한 서원을 철폐하여 양반·기득권 토호들의 민폐와 노론의 일당독재를 타도하고 남인북인을 채용하였으며, 동학천주교를 탄압하였다.


관련 항목


웹자원

  1. 두산백과 흥선대원군 기사.
  2. 네이버캐스트 인물한국사.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