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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3일 (수) 18:05 판

1937.2.20 뉴욕 길드극장 추정 검무.jpg




최승희의 검무(1934)




《검무(劍舞)》는 1934년 9월 20일 오후 6시 일본청년관(日本靑年館)의 최승희 무용 작품 제1회 발표회에서 조선무용으로 편성된 제2부 2번째 작품으로 초연되었다.[1] 《검무》는 타악기 반주로 두 손에 단검을 갖고 추는 용장한 춤이다. 본래 신라 황창(黃昌)의 영웅적 행위를 악무로 재현한 것이었는데, 후에 여성적 동작으로 변한 것을 최승희가 원형을 추정해 만든 것이었다.[2]

최승희의 《검무》는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 7년(660) 7월황산벌전투에서 백제의 장군 계백(堦伯)에게 목이 잘린 좌장군(左將軍)[3]품일(品日)의 16세 아들 화랑 관창(官昌)의 춤이다. 최승희의 《검무》무용해설에서 ‘관창’을 ‘황창’이라고 언급한 것은 《황창무(黃昌舞)》가 ‘관창’을 기리는 춤이라는 것을, 최승희가 인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4] 신라의 기백을 담은 《검무》는 이의현의 『도곡집』,[5] 정약용의『다산시문집』[6] 등에서 확인되듯이 신라의 멸망 이후, 기방의 유희적 춤으로 변이되었다. 최승희는 역사적 고증을 통해[7]화랑의 《검무》를 재건설하였는데, 검이 칼과 손잡이가 분리된 개량된 형태인 까닭은 최승희가 기생의 《검무》를 연구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8]

최승희의 《검무》는 칼을 들고 도는 동작에서 나오는 소리로 서늘한 분위기를 연출하였으며,[9]칼을 양손에 들고 찰칵찰칵하는 소리를 내며 무대가 좁다는 듯이 무대 양 끝을 달려가면서 춤을 춰 역동적 면을 보여주기도 하였다.[10]

사진 속 갑옷 의상의 《검무》는 세계 순회공연을 준비하면서 갖춰진 것인데, 《검무》에서 쓰고 있는 투구는[11]전투적이고 공격적인 화랑의 모 습을 극대화하기 위한 최승희의 창작이다. 《검무》는 삼국통일을 이룬 승 전국 신라의 위상과 화랑의 ‘박력이 있는’ 동작으로 강한 조선을 표방하려 했던 그의 의도가 담긴 무용으로 해석되고 있다.

김연수, 「일제강점기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1938~1940)과 ‘조선무용’」, 건국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2022, 47~48쪽.

주석

  1. 조선에서는 1934년 10월 28일 오후 7시 경성 하세가와 쵸우(長谷川町, 현:소공동) 公會堂에서 발표되었다. 「人氣 바야흐로 絶頂 一日延期 朝劇서 公演 제一일야 회중 二천의 대성황 崔承喜 石井漠 新作發表舞踊」, 『매일신보』 1934년 10월 20일 자 ; 「崔承喜女史 舞踊會 今月 二十八, 九兩日」, 『매일신보』 1934년 10월 21일 자 ; 日本靑年館 崔承喜舞踊作品第一回發表會プログラム.(1934.9.20.)
  2. 牛山充의 글 「崔承喜作品解說」인용. 崔承喜, 『나의 自敍傳』, 京城:以文堂, 1937, 150쪽
  3. 660년 7월 황산벌전투에서 신라군이 세 길로 나누어서 堦伯이 이끄는 백제군을 공격하였는데, 品日이 左軍을 지휘하였기 때문에 左將軍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4.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황창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황창 설화는 전승되는 과정에서 16세의 관창의 어린 나이를 강조하기 위해 7세의 황창으로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동경잡기』권2 「관창」 조에는 李詹이 고려말인 1385년에 경주에서 가면을 쓴 아이가 검무 추는 것을 보고 “황창 ··· 이는 분명 관창이다. 기록하여 전한 자의 착오이다.”라고 한 기록이 있는데, 이미 李詹도 황창을 관창의 와전으로 보았던 것이다. 전경욱, 『한국전통연희사전』, 민속원, 2014, 1157~1158쪽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21 경상도 경주부.
  5. “검무를 구경하고 감회가 있어 두보의 「舞劍器行」 시에 韻하다. 公孫은 이미 아득하고 황창도 죽었는데. 누가 기방에 다른 지방의 것을 전했는가…신라 때의 높은 기상 다시 볼 수 있을까. 검 어루만지며 부르는 슬픈 노래에 눈물이 절로 나네.” 이의현, 『도곡집』 권 3, 시.
  6. 「무검편증미인(舞劍篇贈美人)」“…羅女樂은 우리나라 으뜸인데. 황창무라 옛 곡조 예로부터 전해오네…” 정약용, 『다산시문집』 권 1, 시.
  7.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유구한 무용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나라의 하나다. 『삼국사기』,『고려사』,『조선왕조실록』,『악학궤범』,『진찬의궤』,『정재』,『무예도』등에서만이 아니라 고구려 무용총, 안악 고분 벽화를 비롯한 고전 미술 작품들, 최치원, 김시습, 정다산, 박제행, 박종의 작품을 비롯한 고전 문학 작품들, 『영산회상』,『장생불로지곡』을 비롯한 고전 음악 작품들을 통하여서도 우리나라가 예로부터 다양하고 풍부한 무용 동작과 기법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용 동작과 기법에 있어서도 상당히 발전된 것이었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는 최승희의 글에서 그의 《영산회상》,《장생불로지곡》,《칼춤》등의 조선무용이 한국 역사와 고전을 고증하여 창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최승희, 「조선무용동작과 그 기법의 우수성 및 민족적 특성」, 『문학신문』 1966년 3월 22일 자.
  8. 실제 고대 화랑의 《검무》는 일반 장검의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칼과 손잡이가 분리된 개량된 형태의 칼은 조선 제23대 왕 순조의 孝明世子가 대리청정 시기(1827.2~1830.5) 만든 것으로 전해지나, 입증할 수 있는 문헌 자료가 요구되는 부분이다.
  9. 「최승희 여사의 무용을 보고」, 『신한민보』 1938년 2월 10일 자.
  10. 카프 八峰 金基鎭의 장녀 金福姬 여사가 본 최승희의 《검무》 인상은 다음과 같다. “칼춤을 출 때는 ‘꽝’ 하고 먼저 징이 울리며 막이 열린다. 조명을 받으면서 양손에 칼을 든 최승희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분의 기와 음악 모두가 어린 나에게는 섬뜩하고 무섭기까지 하였다. 사또가 쓰는 모자 같은 것을 쓰고 오색찬란한 줄이 늘어진 칼을 양손에 들고 찰칵찰칵하는 소리를 내면서 무대가 좁다는 듯이 이편 끝에서부터 저편 끝으로 달려가면서 춤추던 모습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섭기도 하고 이상한 충동을 느끼게 하는 그런 춤이었다.” 김복희,『아버지 팔봉 김기진과 나의 신앙』, 정우사, 1995, 214쪽.
  11. 《검무》의 將軍 冠 모형이 역사적 배경에서 고안한 것 같지 않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였다. 具王三, 「崔承喜 舞踊을 보고....」,『삼천리』 제7권 제1호, 1935년 1월 1일 자, 128~129쪽.